진실을 찾는 이
「공허의 신도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림자 속에서 비밀스럽게 움직여 왔다. 그들의 본질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가 어렵지.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의 목적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는 점이다. 엘나가 사라진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는 횟수가 잦아졌다는 것은 뭔가를 준비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그들이 노리는 것은 세계의 근간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구나.」
아텐시아의 말에 신전 안의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고, 시즈는 조심스레 질문을 이었다.
"공허의 신도들이 심연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틈새 너머의 누군가를 숭배해 왔다고 전해진다. 의심할 여지는 충분하지. 너희가 가진 단서와 나의 기억이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전신이 너희에게 남긴 단서... 그곳은 필히 심연이 맞을 것이다.」
율리아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떨리는 손끝을 가만히 움켜쥐는 그녀의 목소리는 얇게 갈라졌다.
"말씀하신 정보라면... 무저갱을 뜻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짧은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율리아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고 어두운 슬픔이 번졌고, 애써 눌러온 감정이 복받쳤다.
"...하지만 지고의 신이시여. 일전에...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무저갱. 그 이름 하나만으로 율리아의 내면은 고통의 파편들로 일그러졌다.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스스로를 긁어내듯 되살아났고, 오래전에 찢겨진 상처가 다시금 저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친우 아리엘을 따라 자발적으로 깊은 어둠의 골짜기로 들어간 율리아의 여동생 엘리샤는 그곳으로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선택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남겨진 것은 그녀의 이해를 초월한 슬픔과 지울 수 없는 고통뿐이었다.
율리아는 눈을 감았다. 그 침묵은 말보다 더 선명하게 무너진 마음의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림 끝자락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길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조용한 예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아텐시아의 눈빛에는 짙은 자책과 회한이 서려 있었다. 고룡으로서 앞날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한 것과 더불어, 그곳으로 향한 이들의 미래를 읽어내지 못했던 후회의 흔적이 가만히 표정 위에 내려앉았다.
「...그 날의 선택은 나의 불찰이 맞다. 무고한 이들이 나의 섣부른 판단으로 생을 잃었지. 허나 지금은 다르다.」
아텐시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은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금 의식 속에서 낮게 퍼졌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그대들에게 안개의 땅에 내려온 최초의 언령을 들려주겠다.」
푸른 아우라가 신전 내부를 감싸며 천천히 짙어졌다. 공간 전체가 장엄한 적막에 잠기면서 숨소리마저 가라앉았다. 이윽고, 공기를 가르며 깊고도 무거운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닌 의식을 직접 울리는 공명에 가까웠다.
나의 아이들이여.
생명이 닿지 않은 깊은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라.
빛바랜 심장이 필멸자의 육신으로부터 말미암아,
모든 것을 꿰뚫는 저 너머에서 진실을 찾는 이를 기다릴 것이다.
언령이 끝나자 신전 안을 감돌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남겨진 것은 그 울림이 가라앉은 뒤의 정적뿐이었다.
율리아와 시즈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지나간 듯한 당황이 눈빛에 번져 있었고, 시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건... 설마, 지금 들린 그 목소리는......?"
아텐시아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슬픔과 회한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목소리는 나의 쌍둥이 형제, 아틸리엔이다. 이 언령은... 엘나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춘 그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아틸리엔. 아우로라의 또 다른 지배자이자, 아텐시아의 남매. 15년 전, 그는 엘나가 사라지면서 용기사 발터와 함께 아우로라를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언령의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 채 기사들을 무저갱으로 보낸 것은 큰 실수였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어둠의 진실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율리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깊은 고통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텐시아의 말 한 줄 한 줄이 그녀의 기억 속에 박힌 상흔을 다시 건드렸다.
뇌리에서 또다시 엘리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짓는 미소, 그리고 무저갱으로 향하던 뒷모습.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너무 선명한 장면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이 언령을 외면하고 싶었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권속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고, 언령의 진의를 밝히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침묵 속에 머물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대지의 기운을 지닌 전사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언령은 단순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었다. '진실을 찾는 이'란 바로 그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찾는 이'라는 말에 아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를 바라보며, 아텐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환시의 등불을 품은 그대는 언령에 따라 어둠 속에서 진실을 밝혀낼 열쇠를 지녔다. 내가 과거에 보냈던 권속들과는 달리, 그대는 언령이 말하는 존재다.」
아로스는 잠시 말을 잃고 아텐시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푸른 아우라가 은은히 신전 안을 물들였다. 마치 진실을 담으려는 듯 더욱 짙게 일렁이며 공간의 결을 바꾸고 있었다.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환시의 등불을 품은 이는 그대뿐만이 아니었다. 엘나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라지던 날 자신의 힘을 안개의 땅 곳곳에 흩어 남겼다. 그리고 그 위에 언령을 새겨 등불을 품은 전사들이 진실의 여정을 따라 자신에게 오기를 바랐다.」
그 말에 시즈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전선에서 아마룬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딘가에서 걸었던 길과 남긴 발자국이 갑자기 하나의 그림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아텐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씀은... 환시의 등불을 지닌 자들이 지금 다른 곳에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 거죠?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건가요?"
아텐시아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이 모두 사라졌는지, 혹은 아직도 어딘가에서 여전히 잠들어 있는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언령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등불을 품은 이들이 다시 깨어나, 엘나에게로 향할 그날을. 그날이 오면, 세상 또한 되돌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말이다.」
아텐시아의 시선이 다시 시즈에게로 향했다. 깊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끝없는 침묵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고 있었다.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환시를 품은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 선택은 위험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끌림이 남쪽 땅에서 시작됐다.」
그 말에 시즈는 갑자기 마음속에서 오래된 기억이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자신이 순례길에 오르기 전 아텐시아가 했던 말들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날의 의미를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럼, 제가 순례길에 오르기 전에 하신 말씀도... 같은 이유에서였던 건가요?"
아텐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시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언령이 기다리고 있는 남쪽 땅, 엘라리모스를 향해 그대를 보낸 것이다. 안식교회에 언령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곳에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저의 순례는 환시를 품은 이의 여정을 위한 초석이었군요."
「그대는 무녀가 되기 위해 순례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의례나 자격을 위한 여정이 아니었다. 나는 그대가 '진실을 잇는 다리'가 될 것이라 믿었으며, 이제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할 시간이 온 듯 하구나.」
아텐시아의 몸을 중심으로, 잠시 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자, 선택하라. 남은 여정 동안 환시를 품은 이의 곁에서 끝까지 남아 사명을 완수할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 남아, 오롯이 그의 손에 이 땅의 미래를 맡기겠는가.」
시즈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숨을 들이켰고, 그 안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마음을 더듬었다. 안락한 신전의 보호, 평온한 삶... 그 모든 것이 내 뒤에 있다. 하지만 내 앞에는 홀로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등불이 있다. 저 고독한 불꽃을 외면하고 얻는 찰나의 평화가 과연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시즈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 무게는 더 이상 그녀의 발목을 붙들지 못했다.
"저는 아로스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시즈는 고개를 들고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저를 믿고 여정을 시작했던 것처럼, 저도 이제... 제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아텐시아는 시즈의 결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푸른 아우라가 그녀의 주변에서 다시 한번 잔잔히 일렁였고, 그 현상은 마치 감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대의 결단을 존중한다. 쉽지 않은 길임을 알기에, 그 용기가 더욱 귀하다. 이제 무녀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준비는 끝났다. 그대는 충분한 의지와 자질을 증명했으니 남은 것은 정식 무녀가 되기 위한 세례뿐이다. 닷새 후 다가오는 새벽에 용성당으로 오너라. 아우로라의 마지막 무녀의 의식이 열릴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아텐시아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신전 밖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정적은 한층 더 짙어졌고, 시즈의 결단은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남았다.
잠시 말이 없던 아로스는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 결심이 얼마나 단단한지 느껴졌지만, 동시에 왜 그녀가 그토록 까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눈동자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동안 함께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앞으로의 여정은 그보다 훨씬 더 험난할 겁니다. 더 깊은 어둠, 더 치열한 싸움, 수많은 죽음... 그리고 저조차도 그 끝에서 어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길입니다."
시즈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말 하나하나가 진심이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로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또렷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시즈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는지... 끝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 저는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누군가가 꺼지지 않은 불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저는 그 곁에 있고 싶어요."
아로스는 말없이 시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결심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아직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 길을 스스로 선택했고, 결코 돌아서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무녀님의 결정을 존중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 율리아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시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즈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그 눈빛에는 말보다 오래된 감정들이 얹혀 있었다. 보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의 눈이었다.
닷새 뒤에 예정된 무녀의식을 앞둔 시즈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다듬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 시간 동안은 어느 누구와도 말을 섞을 수 없었기에, 신전의 정적 속에서 스스로를 비워내듯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의식을 앞둔 마지막 밤.
시즈는 창은의 강이 시작되는 정결의 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아우로라 신전의 상부 깊숙한 곳에 있었다. 산맥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신전의 중심을 조용히 가로질러 전실로 이어졌고, 이윽고 아래로 흘러 대지를 적시며 창은의 강을 이루고 있었다.
정결의 전실에 들어서자 시즈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신비와 자연의 조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대리석 벽엔 섬세한 조각들이 숨 쉬듯 새겨져 있었고, 맑고 투명한 물은 벽 아래를 따라 부드럽게 흘렀다. 산맥의 숨결이 담긴 강줄기와 신전의 조형미가 하나가 된 듯한 전실은 경건한 고요로 가득 차 있었으며,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시즈는 그 고요 속에서 천천히 신발을 벗고 물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물이 발끝에 닿자, 생기가 스며들 듯 미세한 떨림이 퍼져나갔다. 조용히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서자 달빛 아래의 하얀 피부는 은은하게 빛났다. 긴 청회색 머릿결 사이로 섬섬옥수 같은 하얀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파고들었고, 이내 물 위로 흩어지는 머리카락과 우아한 몸선이 강물과 어우러지면서 마치 대지와 숨을 맞추는 하나의 형상이 되었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감싸 안자, 시즈는 머릿속을 떠돌던 무거운 생각들이 하나둘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눈을 감은 뒤 물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