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과거
그 시각, 아로스는 신전 뒤편의 노대 아래에 조용히 앉아 달빛이 내려앉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답도, 위안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쉽게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때, 율리아가 조용히 아로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기척에 아로스는 짧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율리아님."
"자매님은 지금 정결의 전실에 있습니다.”
"그렇군요... 오늘이 다섯째 밤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자매님은 그동안 누구와도 단 한 마디를 나누지도, 눈도 마주치지도 않으며 조용히 그곳에서 자신을 맡기고 있습니다."
율리아는 말을 멈추고 잠시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흐르는 물소리에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안에는 깊은 연민이 배어 있었다.
"...스스로를 정결케 한다는 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의 시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로스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서도 시선은 멀어진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무녀란...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그는 오래 참고 있던 의문을 마침내 꺼내놓았다. 율리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숨을 고르며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무녀는 단순히 신을 섬기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계와 사람들 사이를 잇는 다리지요. 신과 인간, 고통과 희망, 과거와 미래... 그 경계 어딘가에 서서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품을 준비가 된 자. 그런 이들만이 무녀가 될 수 있습니다."
율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우로라의 무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룡께서 내리신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진실로 세상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그 고통 앞에서 끝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요. 무녀가 되면 '용의 시선'을 부여받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닌 그 이면의 이념과 감정, 사람이 쉽게 외면하고 싶은 진실까지 꿰뚫어 볼 수 있지만 그 힘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녀는... 강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해 그 힘을 쓸 수 있으려면 자기 삶을 먼저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니까요."
율리아의 말은 더없이 선명했지만, 아로스의 마음 어딘가에는 아직 풀리지 않는 매듭이 남아 있었다.
"...그런 길이라면, 더더욱 묻고 싶습니다. 시즈... 아니, 무녀님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 무게를 감당하려 나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율리아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정리하듯, 말이 맺히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겠군요."
율리아는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가 다시 들며 말을 이었다.
"제가 처음 시즈를 알게 된 건 비룡의 습격으로 불타버린 마을에서였습니다. 잿더미가 된 폐허 속에는 시즈와 그 아이의 어머니를 발견했죠. 시즈의 어머니는 화마에 휩쓸려 검게 타버린 몸으로 마지막까지 딸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이불로 아이를 감싸고, 가진 모든 이능을 쏟아부은 흔적이 역력했어요. 덕분에 시즈는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아로스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했지만 율리아는 그 반응을 흘려보내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뒤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전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누구의 얼굴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고, 며칠이고 창밖에 앉아 움직이지 않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시즈는 조심스레 교리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감흥도 없어 보였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눈빛이 서서히 달라졌습니다. 여명과 희망, 새로운 시작에 대해 써 내려간 문장들이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절실했을까요. 그 무렵부터는 도서관 한구석에 앉아 하루 종일 책 속에 파묻혀 지내곤 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가라앉은 어느 날... 시즈는 무녀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 아이가 귀공을 붙잡으려 했던 건... 귀공께서 가야 하는 그 길 위에, 자신이 겪은 고통과 너무도 닮은 풍경이 겹쳐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말에 아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부정하려 들지 않았고, 받아들이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래된 그림자 위로 처음 겹쳐지는 얼굴 하나를 떠올릴 뿐이었다. 혼자 걷는 줄만 알았던 길 위를 언제부터인지 누군가 함께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늦게나마 느껴졌다.
율리아는 잠시 시선을 거둔 뒤 백색 머리칼을 천천히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머리칼에 가려졌던 가면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가면 중심의 눈 주변에 새겨진 초승달과 태양, 교차된 기둥의 문양. 그 문양의 중심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달빛도, 불빛도 아닌 깊고 조용한 빛이었다.
"시즈는 아직 용의 시선을 부여받지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귀공의 고통을 일찍이 알아챘겠지요. 말하지 않아도, 외면해도... 귀공이 가는 길 위에 놓인 상흔을 마치 자기 일처럼 안고 있었어요. 그 아이는 누구보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알아요. 스스로 무너졌던 아이였기에 누구보다 깊이 감각할 수 있는 결이지요. 귀공이 눈 돌리던 마음을 누구보다 먼저 이해하고 있었을 겁니다."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아로스는 말없이 율리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일이 되면 시즈는 정식으로 무녀가 됩니다. 그건 단지 의식을 거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아이가 끝내 자신을 증명하는 동시에, 아우로라의 무녀를 넘어 당신과 함께 커다란 사명을 짊어지는 것을 알리는 자리가 될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시즈를 지켜주실 수 있습니까?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아이의 곁에서 함께 할 수 있습니까?"
눈빛은 아로스를 정면으로 꿰뚫었고, 율리아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더는 확인할 것도, 다그칠 이유도 없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녀는 아로스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일 새벽, 용성당에서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율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백색 머리칼과 반쯤 가린 가면이 달빛 아래로 스며들며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자리에 홀로 남은 아로스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노대 너머로 흐르는 강물소리만이 정적을 대신하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아우로라의 대지를 스치는 가운데, 정갈한 무녀의 정복을 갖춰 입은 시즈는 조용히 계곡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푸르게 피어난 빛줄기들이 전례거리를 따라 이어지며 그녀의 길을 밝혀주었고, 그 길 위에는 오직 한 사람의 그림자만이 고요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오늘의 세례는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었다. 수천 년 전, 최초의 무녀 이래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용성당에서 거행되는 전례 없는 의식. 더불어 이번 세례에는 아텐시아가 스스로의 마력을 나누는 이례적인 선택까지 더해졌다. 지고의 힘이 직접 내려오는 순간은 파동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수 있었기에 그 자리를 직접 참관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무녀들뿐이었다. 신도들은 모두 여명의 성당에 머물며 세례가 무사히 끝나기를 기도했다.
전례거리는 텅 비어 있었지만 정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긴 청회색 머릿결이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 시즈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 밟아야 할 이 길은 단순한 시작이 아닌 마지막 무녀로서의 운명을 스스로에게 증명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계곡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폐를 타고 흐르는 숨결마저도 긴장으로 굳어졌다.
잠시 뒤, 허공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피어오르는 마력의 아우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아주 천천히, 우아하게 원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달빛보다 깊고 조용한 푸른빛과 은빛이 뒤섞인 파동은 몽환적으로 흩어지며 새벽의 대기를 신비롭게 뒤덮었다. 빛의 근원에 도착하자 비로소 대지가 입을 벌린 듯한 거대한 수직 동굴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동굴의 가장자리에는 아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우라가 만들어내는 푸른빛을 바라보며 서 있던 그는 시즈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챈 뒤 짧은 목례와 함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시즈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스는 말없이 동굴 초입부 벽면에 걸려 있던 푸른 등불을 손에 들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듯한 등불이 그의 손 위에서 은은하게 타올랐다. 아로스와 시즈는 등불을 앞세워 동굴 벽면을 따라 조성된 돌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수직의 절벽을 따라 이어진 계단은 까마득한 아래를 향해 끝없이 휘감겨 내려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정적 속에서 등불이 비추는 기나긴 나선형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긴 발걸음 끝에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 신비로운 진동이 시즈의 감각을 두드렸다. 동굴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아텐시아가 있었다.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도 은빛 비늘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고, 그 위엄은 인간의 언어로는 다 담기지 않을 신성 그 자체였다. 그녀를 둘러싼 공간에는 신비와 경외가 뒤섞인 기류가 흘렀으며, 그 앞에는 율리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경건히 모은 두 손 아래로 떨림은 없었지만 눈동자에는 깊은 걱정이 스며 있었고, 중앙의 문양 둘레에는 또 다른 일곱 명의 무녀들 또한 말을 넘어서는 중압감과 걱정이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시즈는 두려움을 누르며 용성당 중심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곳의 바닥에는 초승달 안쪽에서 해가 솟고 두 개의 기둥이 교차된 거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은 고룡의 숨결을 머금은 듯 푸른빛과 은빛의 아우라를 조용히 내뿜으며 일렁였고, 발끝이 문양 위를 디딤과 동시에 전신에 퍼지는 묘한 전율이 숨결까지 떨리게 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든 시즈는 아텐시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끝없는 바다처럼 깊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마음을 꿰뚫는 파문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각오가 되었느냐?」
시즈는 떨리는 손을 다잡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말끝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짊어져야 할 사명과 앞으로 겪게 될 위험을 알고 있습니다. 이 여정이 얼마나 험난할지 알지만... 마지막 무녀로서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어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 모든 것을 감내할 것입니다."
아텐시아는 시즈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했고, 차가운 기류가 마치 얼음처럼 그 자리를 감쌌다.
「부디... 그 마음을 끝까지 지키거라.」
마지막 화답을 끝으로, 바닥을 가로지르던 문양이 갑작스레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처음엔 잔잔한 파동처럼 은은히 퍼지더니 이내 폭발하듯 솟아오른 하얀빛과 푸른 아우라가 시즈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마치 대지 그 자체가 시험을 부여하듯, 빛은 피부를 찢고 뼛속 깊이 침투하며 내면 깊숙한 곳을 찔러들어갔다.
고통이 번개처럼 척추를 타고 전신을 관통했다. 다리가 꺾이며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고, 두 손을 짚은 채 떨리는 호흡을 억지로 다잡으려 했지만 몸은 이미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으으읏......!"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피부 아래를 훑는 마력의 흐름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신경 하나하나를 짓이기며 지나갔다. 폐 안쪽에서 뜨겁게 끓어오른 숨이 튀어나왔고, 손끝은 바닥을 붙들며 하얗게 질려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즈의 비명이 동굴을 찢듯 울려 퍼졌다. 허공을 향해 고개를 젖힌 채 뱉어낸 비명은 내면을 가르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처절했다. 의식이 흐려지고, 감각은 흔들렸다. 아우라는 계속해서 그녀의 육체를 파고들었으며 고통은 그치지 않았다. 빛이 점점 거세게 일렁이면서 시즈의 안에 잠들어 있던 감정과 숨기고 싶었던 상처들이 마력에 휩쓸려 솟구치듯 일어났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두 번째 비명은 절규에 가까웠다. 무녀들은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았고, 율리아는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히 기도했다.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감히 다가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바닥에 새겨진 문양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지면서 용성당 전체를 집어삼킬 듯 강렬하게 타올랐다.
시즈는 완전히 아우라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에 고정된 채 흐트러졌고, 숨은 점점 흐릿하고 가늘어졌다. 온몸이 땀과 눈물로 젖은 그녀는 숨을 고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격렬한 떨림 속에 휘말린 모습이었다.
"이러다가는 죽을 것입니다!"
아로스는 눈동자엔 선명한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어렸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가 주먹을 꽉 쥔 채 시즈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공기를 가르며 동굴 전체를 울리는 무겁고 냉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멈춰라!」
굴절된 공기를 뚫고 번져간 그 단 한 마디는 강렬한 압력을 남겼다. 압도적인 힘이 무게를 실어 공간을 억누르듯 아로스의 움직임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푸르게 이글거리는 아텐시아의 눈동자가 그를 꿰뚫었다.
「이 고통은 저 아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방해하지 마라!」
그 말에는 단호한 결단과 초월적인 힘이 담겨 있었다. 아텐시아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제자리에 붙잡았다. 동정도, 양보도 없는 그 시선에 아로스는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멈춘 채 자리를 지켰다.
마침내 빛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동굴 안은 천천히 진정되어 갔음에도 공기 중에는 여전히 마력의 잔흔과 격렬했던 고통이 메아리쳤고, 문양의 중심에 무릎 꿇은 시즈는 희미한 숨소리로만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전히 진정되지 못한 채 떨리는 어깨가 그녀의 고통을 말없이 드러냈다. 아텐시아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조용한 발걸음 끝에 시즈 앞에 멈춰 선 그녀가 손을 뻗어 시즈의 이마 위에 얹자, 손끝에서 잔잔한 빛이 일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시즈의 왼쪽 눈에서 강렬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빛은 그녀를 감싸고 있던 아우라를 서서히 빨아들이며 몸속 깊은 곳까지 울리는 듯한 진동을 남겼다. 뒤로 고개가 넘어가 있던 시즈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으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왼쪽 눈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고, 그 안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조용히 춤을 추듯 아른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