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로라의 무녀 (9)

불의 장벽

by 이샤라

시즈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떨리는 팔에 힘을 주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흔들리던 다리는 곧 중심을 되찾았고, 두 발은 똑바로 문양 위에 섰다. 전신을 감싸던 푸른 아우라가 서서히 흩어지며 따스한 기운으로 바뀌면서 떨리던 손과 호흡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으며, 눈빛에는 고통을 견디고 돌아온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 아텐시아에게 예를 표하는 그때, 율리아가 조용히 시즈의 앞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무녀들이 착용하는 가면과 목걸이가 들려 있었고, 그녀는 말없이 목걸이를 걸어준 뒤 가면을 건넸다. 굳게 다문 입술과 수많은 감정이 실린 채 흔들리는 눈빛에는 말로 다하지 못한 슬픔과 자긍심이 엇갈렸다.


조용히 가면을 받은 시즈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깊은 숨을 내쉰 뒤 천천히 얼굴에 가면을 씌웠다. 가면이 왼쪽 눈을 덮는 순간 그녀의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한참을 숨죽이며 서 있던 시즈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마지막 무녀로서... 지고의 존재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아로스는 그 말을 듣고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빛 속에 남아 있던 불안이 자취를 감춘 채, 오직 경외와 안도만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시즈를 둘러싼 무녀들 또한 그녀가 견뎌낸 고통 앞에 고개를 숙이듯 눈빛으로 깊은 경의를 표했다.


아텐시아는 시즈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이 고통을 견뎌낸 것은 단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허락된 힘 또한 축복으로 여기지 마라. 이는 곁에 선 자, 환시를 품은 이의 사명을 끝까지 함께 짊어지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 힘은 가볍지 않다. 누구에게도 허락된 적 없는 용의 기운이 그대 안에 새겨졌으니, 필연코 그에 걸맞는 대가와 책임을 요구할 것이다. 허나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힘은 마음과 함께 흔들리고, 끝내 무너질 수도 있다. 내면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에게 이 힘은 축복이 아닌 스스로를 갉아먹는 재앙과 다름없다.」


아텐시아는 천천히 아로스를 바라본 후 다시 시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차분했으나, 그 안에는 엄중한 경고의 울림이 담겨 있었다.


「환시를 품은 이와 함께 걷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짊어진 사명은 깊고 험난하여 때로는 빛 없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단순한 동료로서 머무르지 않고 그 길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가 넘어지려 할 때 손을 내밀어 앞을 가로막는 어둠을 함께 헤쳐나가야 한다. 앞으로의 여정 속에서 세상의 상흔과 직면하게 될 것이니... 두 사람 모두 더 깊은 어둠과도 맞설 수 있는 자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 말을 조용히 들은 시즈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떨림 없는 목소리에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저에게 주어진 힘과 역할을 소중히 여기며, 그의 여정에서 제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


아로스는 시즈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는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시즈를 따라 조용히 몸을 숙여 아텐시아를 향해 예를 표했다.


고요해진 동굴의 침묵은 이전과는 달랐다. 새롭게 태어난 무녀의 아우라는 자리에 있던 모두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중심에 선 존재는 단지 무녀의 지위를 넘어선 새로운 의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텐시아의 눈동자 너머에는 장엄한 위엄과 함께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슬픔이 깊게 머물러 있었다.




불의 장벽은 먼 거리에서도 이미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노아와 아마룬이 그 거대한 벽에 다가갈수록 풍경은 점점 낯설어졌다. 대지는 무언가에 지져진 듯 반들거렸고, 발 아래의 흙조차 마른 껍질처럼 부서졌다. 오래도록 평원을 휘감던 부패와 독기의 기척조차 불길의 기세에 쫓겨난 듯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공기는 뜨거웠다. 아니, '덥다'기보다는 피부를 스치는 순간마다 불길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온기였다. 아직 수십 킬로미터가 남았을 터였지만 불길의 숨결은 이미 눈썹 끝까지 와 있었다.


장벽은 하늘과 맞닿은 선에서부터 천천히 굽이치며 타올랐다. 끊임없이 치솟는 붉은 불꽃의 격류가 지면에서 하늘로 흐르는 기이한 역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땅의 가장자리가 틈을 벌려, 그 속에서 태초의 불이 다시 깨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벽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 같네요."


노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자마자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룬은 대답하지 않았다. 걸음을 늦춘 그는 한참동안 벽의 결을 따라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멈춰 섰다. 갑주 너머로 전달되는 열기. 그리고, 가슴속에서 스스로 움츠러드는 기척.


본능이 경고했다. 저것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다. 다가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절대적인 거부. 만약 신의 분노가 형상화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끝에, 아마룬이 짧게 말했다.


"...못 지나간다."


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룬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저 불은 단순한 불이 아니다. 나조차도 저 안에서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오래전... 대지를 절멸 직전까지 몰고갔다는 재앙이 떠오르는군."


불길은 여전히 하늘 높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마치 들여다보는 이들을 의식하는 듯 미묘하게 요동치는 것 같았다. 말없이 장벽을 바라보는 노아에게 아마룬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대강 짐작은 가는데, 꿈도 꾸지마라. 네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불이 아니야. 저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너는 단 한 발짝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거다."


아마룬의 말은 과장도, 위협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었다.


노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장벽을 바라보다 눈을 떨궜다. 사방은 붉게 물들고 있었고, 열기는 더는 '멀다'는 느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룬은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의 불길은 여전히 맹렬하게 솟구쳤고, 공기는 점점 숨을 쉬기조차 어렵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노아를 돌아보았다. 인간이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평원 위의 균열, 부패, 독기 한 가지라도 충분히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는 것들 사이에서 노아는 한 달을 넘게 버텼다. 중간에 태초의 땅에서 잠시 쉬어가지 않았더라면 이 평원을 건너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 상태로는 오래 못 버틴다. 나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넌—"


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룬의 시선 끝에 담긴 우려를 외면할 수 없었다.


"돌아서 가는 방법은요?"


"......불가능하진 않지. 하지만 서쪽은 완전한 절벽인데다 동쪽은 해안선을 타야 한다. 그마저도 한 달은 걸릴 거야."


침묵이 흘렀다. 노아가 땅이 꺼질듯이 한숨을 내쉬자 열기로 메마른 공기가 그의 폐로 밀려들었다.


아마룬은 다시 장벽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땅의 숨결을 더듬듯 시선을 내리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그때, 뒷편의 바위 능선 어딘가에서 미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저기."


아마룬은 말없이 턱으로 기척이 느껴진 방향을 가리켰다. 노아도 뒤따라 시선을 옮겼고, 시뻘건 공기 속에서 바위 틈 어딘가에 어둠이 엉긴 듯한 공간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위벽 아래에는 마치 숨겨진 균열처럼 보이는 움푹 파인 입구가 드러났다. 거인도 들어갈 만큼 거대한 그 입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두웠고, 주변을 타고 흐르는 공기에는 이곳 평원의 열기와 다른 미묘한 서늘함과 알 수 없는 기운이 섞여 있었다.


"...들어가야겠다."


아마룬의 말에 노아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들어가도 괜찮은 곳이에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게다가 이대로면 넌 오래 버티지도 못하지. 아니면 다시 전선으로 돌아갈 거냐?"


노아는 말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간다'는 말은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노아의 침묵을 읽은 아마룬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가보자."


동굴은 생각보다 더 깊었다. 처음에는 바위 그늘 같던 공간은 몇 발짝을 옮기자 곧 완연한 땅굴 형태로 이어졌다. 안쪽으로는 땅의 숨결 같은 것이 어렴풋이 깔려 있었다. 무거운 고요와 함께 이질적인 공기가 서서히 감각을 따라 스며들었다.


그 안쪽 어딘가에서부터 빛이 떠올랐다. 형체를 가늠할 수 없지만... 마치 살아있는 듯한 흐릿한 윤광. 맹렬히 밝은 것도 아니었고,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주변의 어둠을 바꾸는 빛.


노아는 한 걸음 멈춰 섰다. 빛은 그를 향해 온 것도 아니고, 피해 간 것도 아니었다. 마치 노아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그곳에서 맴돌고 있었다.


"......누군가의 흔적 같은데요."


그가 나직이 말하자, 아마룬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그저 단순한 흔적이 아니야."


그 말처럼, 빛은 무엇 하나 뚜렷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형체도, 의미도, 방향도 없이 떠다니며 단지 그곳에 있었다. 둘은 말없이 그 안으로 더 들어갔다. 빛은 더 많아졌고, 그 흐름은 마치 어느 날의 잊힌 기억이 노래처럼 흘러가는 모습 같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굴을 따라가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의 끝은 의외로 가까웠다. 오랜 침묵과 어둠을 지나온 탓인지, 바깥에서 새어든 빛은 더욱 낯설고 따가웠다. 한 걸음 먼저 굴에서 빠져나온 노아는 어두운 동굴에 익숙해 있던 탓인지 눈앞의 풍경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초점이 맞춰졌을 때, 그는 숨을 멈추었다.


"여긴......?"


발밑엔 메마른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불의 장벽은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솟아 있었지만, 그 앞에 늘 존재했던 부패와 독기의 기척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푸석한 바위, 갈라진 흙,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바람. 이곳은 더 이상 그들이 지나온 죽음의 평원이 아니었다.


곧이어 아마룬도 뒤따라 나왔다. 그 역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으나 오래된 감각을 더듬듯 대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어딘가 기억 저편에서 끌어올려지는 풍경. 그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금 이 땅은 북쪽 고원 지대의 이그니카를 향하는 길목이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룬은 확신했다. 두 사람은 방금 불의 장벽 반대편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노아가 뒤를 다시 돌아본 순간, 지나온 동굴의 입구는 사라져 있었다.


"어...? 동굴, 동굴 입구가 사라졌어요!"


아마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었다. 고원의 비탈 아래로 무너진 구조물들이 넓게 퍼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직경이 수십 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잔해 하나가 눕듯이 박혀 있었다. 균열과 파열로 일그러진 곡선 구조는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형상이었다.


무너져내린 신계의 북쪽 관문이었다.


그때, 능선 위로 무리 지어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누더기처럼 불에 그을린 외투를 걸치고 있던 그들의 몸에는 이곳저곳 오래된 화상의 흔적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살갗이 갈라지고 벗겨진 부분 위로는 피가 아닌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손을 들자, 손끝에서 불이 타올랐다. 불의 장벽과 똑같은 기운을 품은 불꽃이었다. 그것은 맹렬하지도, 격렬하지도 않았지만 마치 살아있는 듯 두 사람을 향해 살기를 뿜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을 피운 남자는 잠시동안 둘을 노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못 보던 거인이군."


음성은 잿더미처럼 메마르고 거칠었으며, 눈은 붉게 일렁였다. 남자는 손을 치켜들며 외쳤다.


"불의 심판을 받아라—!!"


그 외침과 동시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괴성인지 기도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절규 속에서 그들 모두의 손끝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불이여! 불이여! 태워라아아——!!"


"이방인은 타라! 더럽혀진 자여, 속죄하라아아——!!"


"심판 받을지어다! 살을 녹이고 눈을 태워라아아——!!"


노아가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서자, 아마룬은 재빠르게 그를 품에 안아 올렸다.


"꽉 붙잡아라!"


그 한마디와 함께, 아마룬은 맹렬하게 고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불덩이들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허공은 연기와 열기, 괴성으로 뒤섞였고, 사방에서 검은 점처럼 피어오르던 집단이 점점 몰려들었다.


아마룬의 발이 대지를 박찼다. 눈앞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더 이상 황량한 평원이 아니었다. 곳곳에 녹아내린 건물의 잔해들이 흉측하게 솟아 있는 그것들은 한때 이곳에 존재했던 작은 도시들의 비참한 흔적이었다. 검게 타들어 가면서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성벽,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탑의 잔해들은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널려 있었다. 아마룬의 눈에 스쳐 지나가는 그 모든 풍경 속에서 과거의 번영과 현재의 절망이 동시에 어른거렸다.


그때, 노아가 아마룬의 손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도시... 도시가 보여요!"


일렁이는 열기 너머, 마른 대지 위로 거대한 성벽이 솟아 있었다. 빛은 없었지만 열기 속에는 틀림없이 그 형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첨탑도 깃발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성이라기보다는 막혀 있는 문처럼 보였다.


불의 도시, 이그니카.


그 오른편에는 가장자리가 닳아버린 것 같은 화산이 있었다. 멀찍이 솟은 산 위로는 연기가 뿜어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로 도시와 화산 사이의 공간에 불빛이 깜빡였다. 끊임없이 숨 쉬는 심장처럼 붉은 불빛들이 희미하게 피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도시는 아직 너무 멀었다. 불꽃을 쏘아대는 무리들은 이그니카로 향하는 길목 전역에 퍼져 있었고 어디를 보아도 피할 틈이 없었다. 죽은 바다처럼 메마른 고원의 대지 위로 숨을 쉴 틈도 없이 불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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