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로라의 무녀 (10)

침묵하는 불의 심장

by 이샤라

아마룬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온몸이 터져나갈 듯한 열기 속에서도, 그는 단 한 번도 노아를 내려놓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텨라! 이제 거의 다 왔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머리 위 하늘이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갈라졌다.


이그니카의 성벽 너머에서 불덩이들이 쏟아지듯 날아왔다. 화염의 창들이 비처럼 떨어지더니 그들을 뒤쫓던 무리들을 덮쳤다. 뼈가 튀고, 절규가 폭음 속으로 삼켜지면서 대지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폭발은 두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룬이 말라붙은 해자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도개교가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내려왔다. 금속이 갈리는 중후한 진동이 대지를 타고 퍼졌고, 불빛에 물든 그림자 속에서 두 거대한 형체가 걸어 나왔다.


거인이었다. 검붉은 피부, 가슴을 타고 흐르는 용암빛 흐름,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빛. 그들이 망치를 어깨에 멘 채 다가오자, 아마룬은 해자 앞에서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다잡고 품에 안고 있던 노아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거인들은 두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그중 하나가 아마룬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남쪽에서 온 형제여, 이곳에 무슨 일로 왔는가."


"안개의 땅의 존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아마룬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거인들의 시선이 곧 노아에게로 옮겨졌다.


"이 필멸자는 누구지?"


아마룬이 말하려던 찰나, 노아가 먼저 대답했다.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을 찾으러 왔습니다. 여기 있을지도 몰라서요."


"이산가족 상봉을 하러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냐?"


거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자, 노아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노아 아그니 플록스. 그리고, 형의 이름은 데미안 바노르 플록스 입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고, 거인들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두 눈에서는 번뜩이던 장난기 대신 진지한 기색이 내려앉았다.


"......증명해라."


노아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조용히 양손을 모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작고 조용한 불꽃이었지만 생명처럼 일렁이는 그 불길은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를 바꿨고, 그 광경을 바라본 거인들 중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 그 피를 잇고 있군."


그는 등을 돌리며 짧게 말했다.


"따라와라."


두 거인이 돌아서자 아마룬과 노아는 함께 그 뒤를 따랐다. 도개교가 완전히 올라간 뒤 두꺼운 성문이 천천히 닫혔다.


도시는 들어선 순간부터 공기가 달랐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을음 냄새가 벽과 땅에 배어 있었다. 그것은 오랜 전쟁의 잔향이었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화강암을 정으로 쪼아 만든 듯했다. 두텁고 단단한 벽은 직선보다는 완만한 곡선을 따라 마감되어 있었다. 창문이라기보다는 좁고 깊게 파인 틈이 벽면마다 규칙적으로 뚫려 있었고, 출입구마다 낮게 드리운 처마는 그늘처럼 입구를 감췄다.


규칙적으로 반복된 형태 때문인지 건물들은 마치 전부 같은 무게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또한 불과 쇠, 돌이 맞부딪혀 서로를 다듬은 뒤 남은 감촉이 도시에 녹아 있었다. 건물의 모서리와 바닥에는 얇게 파인 문양들이 있었는데 겹치고 엇갈린 듯 돌 위에 새겨진 선들은 길인지 장치인지 모를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늬들조차 온전히 남아 있진 않았다. 무언가로 인해 무너졌고, 불에 그을렸으며, 날붙이처럼 깊게 패인 자국이 겹쳐 있었다. 타올랐다가 꺼진 자국, 검게 그을린 벽, 썩어가던 흔적을 불로 덮은 듯 매끈하지만 깊이 패인 면, 그리고 거대한 무언가에 찍힌 듯 부서진 돌기둥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노아는 그 상처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기도 부패가......"


그 와중에도 몇몇 시민들이 길을 걷고 있었고, 노아는 스쳐가는 얼굴들을 곁눈질했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무언가를 잃은 자들, 그리고 그것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의 눈이었다.


길은 점차 안쪽으로 향했고, 마침내 중심이 보였다. 모든 길이 향하는 끝에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돌로 쌓은 기단 위에 무거운 제단이 얹혀 있었고, 그 아래로 거대한 벽이 도시의 중심을 감싸고 있었다.


그곳은 이그니카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제단은 불이 꺼진 채 침묵하고 있었고, 무언의 정적은 도시 전역으로 스며든 듯 퍼져 있었다. 형태는 남아있어도 그곳을 지탱하던 의미는 오래전에 식어버린 듯했다.


노아는 꺼진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 위엔 아무것도 없었고, 기다림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희망이란 말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노아는 자신이 고향이라 불렀던 땅에 서 있었지만, 되돌아왔다는 감각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오래 굳어 있었고, 공기마저 바람을 잊은 채였다. 형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의문이 생각보다 더 깊게, 조용히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앞서 걷던 아마룬이 문득 멈춰 섰다.


"...아마룬?"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노아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아마룬의 시선을 따라갔다.


남쪽 하늘에 무언가 떠 있었다. 허공에 깨진 대지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틈마다 붉은 불덩이들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떨어진다기보다는 스며든다는 인상이었다. 그 아래로... 불의 장벽이 솟아 있었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장벽은 저기서부터 내려온 것이었다.


그곳은 신계 '데오르 니아'였다.


이름만 남은 장소, 한때 모든 신들이 머물렀던 땅. 위대한 무언가가 무너졌을 때의 침묵은 슬픔보다 오래 남았다. 붉은 연기에 휩싸인 성지는 애도받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설명되지 않았다. 하늘은 그저 붉은 불을 흘러내리며 무너졌다는 사실조차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멍하니 신계를 바라보는 동안, 앞서가던 거인 중 하나가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구경은 그만하고 얼른 따라와라."


거인의 재촉에 두 사람은 곧장 몸을 돌린 뒤 신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등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자, 그 뒤를 따르는 발걸음이 하나둘 묻혀 들었다.


신전은 묵묵히 입을 다문 채로 그들을 맞이했다. 한때 이그니카의 중심이라 불렸던 대성소는 웅대한 외관만을 남긴 채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문 앞의 화로는 이미 오래전에 식은 듯 검게 그을린 재만이 바닥에 얕게 가라앉아 있었고, 바람마저 불꽃의 기억을 비켜 가는 듯 고요했다. 노아는 그곳을 바라보며 잠시 발을 멈췄다. 어린 시절, 형의 손을 꼭 쥐고 신전 안쪽으로 들어섰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의 신전은 붉고 순결한 불길로 가득했고, 바닥을 타고 흐르는 문양마다 생명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그니카는 자신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인들이 신전의 문을 밀자 금속의 마찰음이 뻑뻑하게 공간을 긁었다. 오래된 철제 문이 느리게 열리며 한 줄기 바람이 흘러나왔고, 그 잔향 속에서는 더 이상 고대의 숨결이나 불꽃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부는 마치 숨만 붙인 채 간신히 존재를 유지하는 거대한 동굴 같았다. 도시를 밝히던 신의 불꽃이 꺼진 자리에는 급히 설치된 철제 횃대들이 어색하게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회랑의 기둥마다 박힌 촛대의 흔들리는 불꽃이 벽을 비췄지만 심지의 기름에는 위태로운 정적이 스며든 듯했다. 불빛 아래로는 드문드문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으나 누군가가 이곳을 돌보고 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대리석 복도 끝자락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융단 위로 어긋난 석대와 무너진 벽화 조각들이 널브러진 공간 너머로 부서진 등받이를 기댄 채 성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 형상은 한눈에 보아도 평범하지 않았다. 어깨를 넘는 거대한 근육과 등 위로 굽이치는 금빛 전류의 잔재, 허리춤에는 대지를 쪼개버릴 듯한 흠집 가득한 망치가 걸려 있었다. 기묘한 형상의 가면은 얼굴의 절반을 가리면서도, 눈동자는 보이지 않음에도 깊은 곳에서부터 우레 같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듯했다.


벼락과 철기장의 신, 오르드.


산처럼 앉아 있는 그에게서는 전장의 분노도, 벼락의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굽은 허리와 숙인 어깨, 깍지를 낀 양손은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러 있던 자의 모습이었다.


노아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신의 형상이 아닌 모든 것을 잃은 도시의 잔재를 등에 짊어진 한 존재였다. 사제도, 불도 없는, 기도마저 끊긴 이곳에서 그는 홀로 남아 무너진 성좌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가면 아래로 낮고 묵직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인가."


짧은 그 한 마디가 성소 전체를 울리자, 앞서 걷던 거인들이 무릎을 꿇은 채 두 주먹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진흙과 쇳내가 섞인 숨소리만이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가운데, 두 거인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예를 갖췄다.


잠시 후, 왼쪽의 거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일족과 불의 사제의 핏줄이 남쪽에서부터 이곳으로 찾아왔습니다."


불의 사제의 핏줄. 그 말에 노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들썩였다. 오르드의 시선이 여전히 그들에게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거인의 후손이여, 그대는 무슨 연유로 이곳을 찾아왔는가."


목소리는 낮고 깊었으며, 망치의 여운처럼 바닥에 퍼졌다. 아마룬은 곧장 고개를 숙였다.


"안개의 땅의 존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짧고 간결한 답이 공간을 채웠다.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고, 오르드의 시선은 옆으로 옮겨져 노아를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다.


"필멸자여, 너는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거지?"


노아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오르드의 시선이 가슴께를 꿰뚫고 내려앉는 순간, 참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형을 찾으러 왔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내면은 복잡하게 일렁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만난 신 앞에서 가장 먼저 꺼낸 말이 가족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 대답에 오르드의 턱이 미세하게 꿈틀거렸고, 되묻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형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 순간, 무릎을 꿇고 있던 거인 중 하나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이 필멸자의 형제가 차기 불의 대사제였던 데미안 바노르 플록스라고 합니다."


거인의 대답에, 오르드는 가면 아래로 비틀린 쓴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오래도록 묵혀둔 체념이 새어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비웃는 듯한 모습에 노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시에 들어서면서 참아왔던 말이 감정에 떠밀려 터졌다.


"......그래서, 사제들은 다 어디 갔죠?"


오르드는 망치 손잡이를 천천히 일으켰다가, 다시 바닥에 탁 내리쳤다. 그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바닥이 살짝 흔들렸다.


"사라졌다."


그 무심한 대답에, 노아는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사제들이... 사제들이 전부 사라졌다니요!?"


거침없는 외침에 거인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등줄기에 두른 무쇠가 서로 부딪치며 쩔그렁거렸고, 거대한 손들이 허릿춤의 망치로 올라갔다. 그 분위기 속에서 아마룬이 다급히 외쳤다.


"진정해라! 네가 그렇게 함부로 대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노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눈에는 두려움이 아닌, 억눌린 분노와 당혹이 짙게 어렸다.


"말 그대로이다!"


오르드의 어깨가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도시를 이끌던 너희 필멸의 지도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전부 도시를 떠났다! 그들은 신의 침묵을 핑계로 불의 도리를 버리고, 도시 밖에서 '왜곡된 불꽃'을 퍼뜨렸지. 그 결과, 너희가 보았을 저 광신도들이 태어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보았을 터! 저 불타는 고원과 이름마저 잃어버린 불꽃의 잔해들을 말이다!"


오르드의 목소리는 무게가 아니라 진동이었다. 성좌의 기둥을 따라 내려앉은 울림이 벽면을 덮고, 먼지와 거미줄을 휘저었다. 그 거대한 파동에도 노아는 여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곳에는 신이 두 분이나 더 계셨잖아요. 그런데 대체... 필멸자들이 무슨 이유로 자신들의 책임을 저버리고 신들을 거역한단 말인가요?"


오르드의 공간을 뒤흔든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눈빛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신이 존재하는 한 필멸자들은 마땅히 그 뜻을 따를 거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은 그의 상식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오르드의 얼굴에 잠깐 동안 묵직한 피로가 스쳤다. 눈앞의 필멸자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걸 모른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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