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로라의 무녀 (11)

분열과 약속

by 이샤라

이 도시의 시작, 불길의 탄생, 신들의 약속과 붕괴... 그리고 내전. 한때 이곳은 세계를 이끌던 창조의 중심이자 신의 불길이 벼려지던 곳이었다. 하지만 엘나의 부재는 결국 신들 사이마저 갈라놓고 말았으며, 거듭된 혼란은 신도들의 신념을 하나둘 무너뜨리며 이탈로 이어졌다.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오르드뿐이었고,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 지금의 이그니카가 있었다.


"당돌한 필멸자여. 네가 이곳에 와서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불의 도시는 이제 바람 앞의 등불이다. 버티는 것만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지. 도시에 남은 불씨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는 있다. 이 땅을 좀먹는 것들은 불에 지독하게 약하니 말이지. 하지만 그것이 길이 될 수는 없다. 언젠가 내가 쓰러지게 된다면 이곳도 결국 함께 무너질 것이니 말이다."


오르드의 말에 노아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이그니카까지 찾아온 것은 오직 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희망 하나로 목숨을 걸고 이 땅을 밟았건만 지금 들은 말은 마지막 기대마저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뭔가가 가슴속에서 무너져 내렸고, 허탈감이 모든 감각을 덮었다. 뒷걸음질을 치지도 않았지만 노아는 마치 어디에도 닿지 않는 허공 위에 서 있는 듯했다. 그저 무너진 기대의 잔해를 가슴 안쪽에서 끌어안은 채 어깨만이 천천히 떨렸다. 표정은 이미 결론에 닿아 있었고, 더는 감정을 쏟을 힘조차 없어 보였다.


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아마룬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다. 현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으며, 자신을 구해준 이 소년에게 해줄 말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또 다른 신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


소리는 작았지만, 무게는 가벼움과 거리가 멀었다. 그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본질적인 의문이었고, 동시에 마지막 남은 책임의 윤곽을 묻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을 받은 오르드의 굵은 손이 고뇌하듯이 천천히 가면을 덮었다. 가면을 뒤덮은 손 너머로 이어지는 호흡은 짧고 무거웠다. 오랜 시간 동안 닫아 두었던 기억의 문이 그 질문 하나로 다시 열리고 있었다.


"보아라, 오르드. 우리가 이렇게까지 전락할 줄 알았나? 신으로서 우리가 만든 세계가, 이 모양 이 꼴이 될 줄 상상이라도 했느냐?"


하카르의 외침에 오르드는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가슴 깊은 곳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카르, 지금 와서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그때의 선택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최선? 최선이었다고?"


하카르는 언성을 더욱 높이며 오르드에게 다가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그때 뭐라 했지? 아나릴을 만든다는 그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엘나가 다시 무너지기라도 하면 우리 힘까지 묶일 수밖에 없다고 분명 내가 경고했잖나!"


"경고를 했던 건 기억하지. 하지만 자네는 끝내 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았어. 반대만으론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세계는 무너지고 있었고, 선택의 시간은 없었다."


그 말에 하카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쌓여 있던 분노가 뚜껑 열리듯 터져 나왔다.


"엘나는 사라졌고, 대륙은 카노라스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어. 이게 자네가 말한 최선의 결과인가?"


오르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카르의 목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찬성을 종용했던 너희들은 눈앞의 위기에만 급급했고 그 결과가 이 모양이지. 엘나가 사라지면서 신들의 힘 마저 묶인 데다가 신계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도 못하고 있어. 심지어 매일같이 신계에서는 바트라의 불이 쏟아진다. 그 불길을 보고도 감이 안 잡히나?"


"자네가 그렇게 몰아세워도... 그 선택이 없었더라면 세계는 더 빨리 무너졌을 거야. 아나릴이 엘나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균열은 더 깊어졌겠지. 그때는 정말,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았나!"


"그래서? 이제는 뭐가 달라졌지?"


하카르가 오르드의 눈앞까지 성큼 다가섰다.


"엘나가 사라진 현재, 우린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신의 본질조차 엘나와 아나릴에 묶여 버렸지. '옳은 선택'이라고? 이런 비참한 말로가 우리의 운명이란 말이냐?"


"운명이라......"


오르드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선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세계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수단이었다. 누구도 결과를 전부 예측하진 못했고, 나도 확신은 없었지. 다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해야 했기에—"


"그래, 그게 네놈들의 말이지. '유일한 길'이었다고, '어쩔 수 없었다'라고. 결국 아나릴은 '희생'을 빌미 삼아 우리를 묶었을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힘은 스러지고, 남는 건 쇠락뿐이지."


하카르가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렸다. 그의 어깨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난 선택했다. 더는 이 도시에 발을 붙이지 않겠다고."


그렇게 신들의 용광로는 붕괴 직전의 화염 속에 휘말렸고, 두 신의 격돌은 도시를 파멸 직전까지 이끌었다. 오르드를 따르던 이들과 하카르를 지지하는 무리들. 모든 병기와 신도들이 서로를 찢으며 이그니카는 스스로를 불태웠다. 한때 창조의 중심이던 이그니카는 그날만큼은 완전히 파괴의 도시였다.


그 혼란의 중심에서, 하카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도시의 깊은 중심부로 은밀하게 움직였다. 신들이 안개의 땅에 발을 디딘 순간과 더불어, 이 땅의 모든 기술의 시발점이자 이그니카의 핵심 기술.


운철 각인.


정면에서 오르드의 거인 세력과 충돌해 봤자 승산이 없었기에 그 힘을 가져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계획은 단순했고, 실행은 대담했다. 하카르와 그의 무리는 불길과 혼란을 틈타 운철각인을 확보하자마자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그니카의 외곽의 붉은 하늘 아래, 하카르는 마지막으로 도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주인을 잃은 땅에 더 이상 미래는 없다. 오르드, 너희들의 책임으로 만들어진 잿더미 아래에서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발버둥 치고 싶지 않아."


하카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서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산맥 아래의 거대한 공간으로, 천연의 요새처럼 폐쇄된 땅에서 새로운 거점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아트마'. 하카르는 그곳에서 아트마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이그니카에서 훔쳐온 운철 각인을 바탕으로, 그들은 병기들을 제작하고 새로운 문명을 세워나갔다.


아트마는 이그니카와는 철학이 달랐다. 불을 숭상하던 바트라의 전통 대신 정밀한 병기와 효율적인 전술을 최우선 가치로 여겼다. 이그니카가 불의 심판과 창조의 신화를 상징했다면 아트마는 파괴와 전술, 전쟁의 전략을 품은 불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들은 신조차 해칠 수 있는 무기를 만들고자 했고, 실제로 불에 강한 갑옷과 자폭형 병기들을 대량 생산해 이그니카를 상대로 오랜 전쟁을 이어갔다.


회상에서 돌아온 오르드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은 뜨거운 쇠망치도, 불길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기억의 떨림이었다. 그날의 선택은 과연 구원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파멸을 유예시킨 형벌이었을까. 누군가는 족쇄를 보았고, 누군가는 생명줄을 보았다. 어쩌면 둘 다 옳았기에... 끝내 함께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가 선택한 길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그날 이후, 잿더미 위에 남기로 했다. 이곳이 무너진다면... 나 역시 더는 신이 아닐 테니."


노아와 아마룬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둘 다 말 그대로 넋을 놓은 얼굴이었다. 오르드의 말은 단지 과거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땅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뼈에 사무치게, 실감 나게 전한 것이었다.


그 순간, 오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이유는 없지."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마치 방금 전의 침묵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듯,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노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필멸자여, 네가 불꽃의 사제의 후계자라는 것을 증명해 봐라."


노아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손을 들어 올렸고, 손끝에서는 작고 밝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길지 않은 망설임 끝에, 노아는 오르드가 가리킨 성좌 앞의 모루 위에 불꽃을 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르드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좌 옆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망치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힘을 실어 모루를 내려쳤다.


쿠르르르르르릉——


신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동이 울렸고, 순식간에 바닥의 석판 사이마다 번개처럼 노란빛의 금이 번져나갔다. 사방으로 번진 섬광이 거대한 문양처럼 신전 내부를 휘감는 동시에 땅 속 어딘가에서 깊고 낮은 굉음이 퍼져나갔다.


그 굉음에 놀란 듯, 노아와 아마룬을 안내하던 거인 둘이 동시에 타오르는 모루를 바라봤다. 수백 년 동안 꺼져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처럼, 불꽃의 숨결이 도시가 잊고 있던 불을 다시 지피고 있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겠군."


오르드는 바닥에 번져가는 열기와 연기 너머로 노아와 아마룬을 향해 말을 이었다.


"대륙은 부패에 잠식당하고, 도시는 반쯤 무너졌지.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은 적은 없다."


그의 말은 짧았지만 단호했다.


"나는 아직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와 철기장들은 지금도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매일같이 방법을 찾고 있다. 그리고 너희 또한 지금까지의 흐름만 알아서는 부족하다. 그동안 겪은 일들과 내가 전한 이야기, 그 모든 조각이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모루 위에서 여전히 타오르던 노아의 불꽃이 그 말에 맞춰 다시금 춤을 추듯 일렁였다. 신전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굉음과 열기는 점점 더 거세졌고, 오르드의 모습은 쇠락한 도시와 대비되는, 강철과 같이 흔들림 없는 신의 형상이었다.


망치를 내려놓은 오르드는 한동안 모루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 붉은 기운은 서서히 공간 전체로 퍼지며 성소의 공기를 달궜고, 신전의 바닥을 타고 흐르던 문양의 빛은 점점 강도를 더했다.


그 순간, 성좌의 뒤편을 따라 뻗은 거대한 아치형 출입구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가자."


오르드의 대답을 끝으로 거인 둘이 먼저 움직였고, 노아와 아마룬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성소에서 신전의 후문을 지나자, 한 차례의 깊은숨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뀌었다. 신전의 뒷면을 가로지르는 대교가 하늘과 대지를 가르듯 뻗어 있었다. 눈앞으로는 거대한 칼데라니아 화산이 우뚝 솟아있었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교각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용암이 끓어올랐다. 대교는 단순한 길이 아닌 불의 도시와 대장간을 잇는 다리였다. 바닥을 뒤덮은 바위틈 사이로는 붉은 증기가 피어올랐고, 난간이 따로 없는 구조는 이 땅이 언제나 불과 쇠의 의지를 상징해 왔음을 상기시켰다.


노아는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게가 발밑에서 전해졌고, 아마룬의 눈빛 역시 평소보다 더욱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교의 끝자락에는 용암의 열기를 맞받아 솟아오른 대장간의 입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성벽처럼 보였다. 거인조차 한 줌처럼 보일 정도로 웅대한 입구는 세공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듯한 위용을 더했다.


오르드가 멈추자, 거인 하나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문 옆의 돌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무게를 잔뜩 머금은 거대한 문이 천천히 양옆으로 벌어지며 그 틈을 드러냈다.


그 순간, 아마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열려가는 문 너머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열기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틈으로 붉은 불빛이 퍼져 나오자, 오르드는 가면 아래로 미소를 지었다.


대장간의 입구 복도는 신전과는 달리 거대한 기둥 하나하나에 붉은 불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기둥들은 거칠고 투박한 외형을 지녔지만, 그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단단히 억눌린 숨결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맥을 이루었다. 기둥 사이를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천장을 가득 채운 듯이 덮은 거대한 돔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안쪽으로 희미하게 깎여 들어간 원형의 중심에는 이그니카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돔 아래 너머의 정면에는 거대한 열기의 흐름이 감돌고 있었고, 오래 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무너진 벽 너머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한순간에 꺾인 듯한 파열 흔적이 남아있는 거대한 벽 틈 사이로 솟아오르는 용암 기둥은 그 어떤 구조물보다도 광대했다.


오르드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붉게 물든 석판을 밟고, 거대한 공방문 앞에 다가섰다. 그가 손을 뻗자 문이 미세한 울림과 함께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방이 열린 순간, 막대한 열기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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