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용광로
단순한 뜨거움이 아니었다. 피부를 넘어 뼛속까지 파고들만큼 맹렬한 열풍이 통로를 뒤덮었다.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킨 노아는 이곳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공간임을 단박에 깨달았다. 폐의 가장 깊숙한 곳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그 열기에는 온도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처럼 허락되지 않은 자에게는 그 자체로 경고가 되었다.
그 틈으로, 마침내 공방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높은 천장에서는 마그마가 쏟아지고 있었다. 새빨간 불기둥들이 검은 바위의 틈을 타고 사방으로 흘러내렸고, 그 위압적인 흐름 곳곳에서 마치 대지 자체가 숨을 쉬듯 불꽃의 심장소리가 쿵, 쿵 하고 울려 퍼졌다.
검은 바위 아래에는 거인 철기장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쇳내와 열기 속에서 망치를 쥔 채 묵묵히 일에 집중하는 그들의 손놀림은 마치 오랜 망각에서 깨어난 기억처럼 자연스러웠다. 모루와 화덕, 풀무,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철판과 기구들. 진열대에는 수십 개의 망치와 집게, 굵은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바닥에는 굳은 용암의 흔적이 응고되어 굽이쳐 있었다.
그리고 공방의 가장 깊은 끝자락에, 신전에서 들었던 울림의 원천이 있었다.
신들의 용광로.
산맥을 통째로 파내 만든 것처럼 보이는 용광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이와 높이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내부를 따라 흐르는 마그마의 줄기는 멈추지 않는 숨결 같았고, 그 위로 솟구치는 불기둥은 천장을 뚫고 하늘마저 삼킬 듯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광경에 노아는 말을 잃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상상하던 어떤 전설보다도 거대하고 장엄했으며, 동시에 끔찍할 만큼 생생했다. 일반적인 대장간과는 전혀 달랐다. 단지 규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과 쇠, 고열과 진동, 신들의 의지가 서로 맞물리며 형성된 이곳은 필멸자이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을 넘은 현장이었다. 실제로 이 앞에 선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이야기로만 듣던 장소였지만 지금 이 순간, 신화 속 한 장면에 자신의 몸이 그려져 있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전선의 대장간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네요."
노아가 옆에 선 아마룬을 바라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아마룬 역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자신도 손재주 하나는 있다고 여겼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차원이 달랐다. 이곳이라면, 정말로 무언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오르드가 망치를 들어 천장의 돔을 향해 뻗었다. 망치를 감싼 뇌격이 돔에 새겨진 문양을 두드리는 순간 묵직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던 돔 아래의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거대한 원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돔 아래에서 거대한 원탁이 서서히 솟아오르자, 공방을 가득 채우던 거인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치 용암이 흐르는 바위처럼 보였다. 용광로의 불꽃이 거인들의 피부를 붉게 물들였고, 그들의 등 뒤로는 타오르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철기장의 신을 섬기는 이들답게 거인들의 피부는 용암에 그을린 검붉은 바위처럼 거칠었다. 앞서 마주쳤던 거인들보다도 더 짙고 더 뜨거운 기색이 몸에 배어 있었고, 근육 위에는 오래전 불길과 금속이 남긴 자국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중 일부는 아예 금속 조각들이 피부 깊숙이 박힌 채 고정되어 있었고, 그 모습은 오랜 세월을 불길과 함께한 존재라는 증표처럼 느껴졌다.
거인들은 바위를 밀어내듯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수십의 시선이 용광로의 붉은빛을 반사하며 원탁을 향해 쏟아졌다. 그들의 발걸음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대지를 짓누르는 듯했다. 말 한마디도 없었지만 움직임만으로 서로 연결된 듯한 흐름이 느껴졌다.
가까이에서 본 거인들의 손은 아마룬과는 전혀 달랐다. 거친 바위를 연마한 듯한 표면은 불에 그을린 돌처럼 갈라져 있었고, 일부는 용암이 흐른 흔적 같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오랜 세월 풀무 앞에 선 장인의 손이라고 해야 될까. 외형은 거칠었지만 움직임은 위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철기장이 아닌 신들의 불꽃을 다루는 자들이었고, 수백 년 동안 이곳에서 무기를 벼려온 존재들이었다.
아마룬은 불빛에 젖은 홀 너머로 마주 선 거인들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
거대한 원탁을 중심으로 노아와 아마룬을 포함한 23명의 존재들이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노아는 아마룬의 다리를 의자 삼아 그의 위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잡은 순간, 오르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회합을 시작하지. 불필요한 절차는 거두절미하고... 우선, 둘이 그간 겪은 이야기부터 들어봐야겠군."
오르드의 말에 아마룬은 깍지 낀 두 손을 천천히 원탁 위로 올렸다. 비록 평생을 용광로에 바친 철기장들처럼 투박하진 않았으나, 전선의 불꽃과 전사의 굳은살이 뒤섞인 그의 손 또한 떳떳한 위엄을 품고 있었다.
"15년 전, 카노라스로부터 세계가 부패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모두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전사로서 도시를 수호하려다 카노라스의 무저갱에서 올라온 울루니아와 마주하면서 정신이 무너졌고, 그 후 한동안 폐인으로 지냈습니다. 그 뒤로 약 4년 전까지는 시스테나 교회에 의탁하면서부터 전선의 병사들을 위해 무기와 병기들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무너졌다라... 거인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지. 어떻게 그 지경까지 간 거지?"
"놈들의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습니다. 찢어진 동공 사이로 이빨이 드러나면서 눈이 입처럼 갈라져 안에서 또 다른 눈이 솟아났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 감각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공포는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마룬은 말을 멈춘 뒤 다리 위에 앉은 노아를 바라보았다. 시선 속에는 감정이 짧게 드러났고, 노아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작게 웃었다.
"...이 소년 덕분에 그 두려움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엔 제 성질을 못 이겨 죽일 뻔했지만, 그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더군요. 덕분에 저는 오랫동안 내려두었던 갑옷과 도끼를 다시 집어들 수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겁대가리 없이 대든 이유가 있었군."
아마룬의 이야기를 들은 오르드가 노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자, 노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에 스치는 낯빛은 부끄러움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이그니카로도 울루니아들은 제법 많이 날아들긴 했었다만... 놈들은 불에 지독하리만큼 약했다. 대부분은 도시 경계를 넘지 못하고 하늘에서 격추되어 잿더미가 됐지."
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일부는 넘어왔다는 뜻인가요?"
"넘어왔다 한들, 대부분은 불에 타 추락했고 곧바로 제압됐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거대한 개체 몇은 북쪽으로 향했는데... 아우로라의 고룡 아틸리엔이 날아간 방향과 일치했다."
오르드는 북방을 가리키듯 원탁 바깥을 향해 짧게 손짓을 했다.
"놈들이 왜 도시를 무시했는지는 알 수 없다만, 마치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 아틸리엔이 금역 너머로 사라진 것도 이유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 북쪽 경계선에 수십 개의 쇠뇌를 설치했지만 15년간 어느 누구도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말을 맺은 오르드는 다시금 노아를 향해 시선을 꽂았다.
"그래, 어리디 어린 필멸자여. 너는 그 눈으로 무엇을 보았느냐?"
노아는 잠시 숨을 들이쉰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남쪽 땅 엘라리모스의 한 마을에서, 형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까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환시를 품은 기사와 그와 함께 언령을 찾는 무녀님을 만났어요."
"환시를 품은 기사?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서늘한 궁금증이 묻어난 오르드의 시선에, 노아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사선의 강에서 돌아온 전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엘나의 계시를 받아 그에 따른 여정을 하고 있는 기사죠. 저는 그분들과 함께 시스테나 전선까지 동행했습니다. 서로 갈길이 달라 금방 헤어졌지만... 그분들은 언령을 찾아 이 땅의 미래를 위한 여정을 이어나가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저와 아마룬 또한 언령의 한 구절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언령을 읊기 시작했다.
"죽음의 물결 앞에서 버티는 영혼들이여.
언젠가, 사선의 장막에서 돌아온 이가 그대들 사이를 스쳐가리라.
지친 육신을 내려놓는 자는 어둠으로 돌아갈 것이나,
잃어버린 의지를 모아 다시 일어서는 자는 그의 사명이 딛고 설 초석이 될지니."
원탁을 감싸던 공기가 잠시 멎은 듯 정적이 흘렀다. 희망을 핑계로 나돌던 허상 같은 말이 처음으로 실체를 지닌 목소리로 울려 퍼진 순간이었다. 오르드를 비롯한 철기장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부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일대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언령에 대한 정보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네가 말한 환시를 품은 이가 필시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가장 높은 확률의 열쇠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군."
그 순간, 거인 철기장 중 하나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노아에게 물었다.
"네 말대로라면, 이 땅의 미래를 겨우 그 필멸자 하나에게 의탁해야 한다는 말인 건가?"
껄끄러운 회의감과 공격적인 감정이 문장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오르드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을 들어 그를 조용히 진정시키자, 노아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갔다.
"그리고... 카노르 평원을 지나오면서 처음 보는 생명의 땅을 발견했어요. 아마룬도 그런 곳은 살면서 여지껏 본 적이 없다고 했죠."
아마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본 적도, 들은 바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아마 저희 세대에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평원의 협곡 아래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장소였는데, 혹시 태곳적 안개의 땅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거인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임이 번졌고, 오르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저 깊은 곳에서 살아남은 오염되지 않은 땅일 수도 있다. 과거의 대지는 불의 심판이 있던 날 전부 세상에서 지워진 마당에 무슨 근거로 태고의 생명이라 단정 짓는 거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소한 기운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온몸의 찌꺼기가 씻겨나가는 듯한,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기운... 다른 동족이 보았더라도 저와 같은 말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인격체를 만났습니다. 하반신이 뿌리처럼 박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분명 여인의 형상을 한 대지를 품은 존재였습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땅이 저를 반기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흔들림 없는 아마룬의 눈빛에 오르드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여인의 형상.
오르드는 문득 전설처럼 남은 오래된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바트라의 심판이 일어나기 직전, 남쪽으로 도망쳐 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유일한 여성의 형상을 지녔던 거인 엘라마. 설령 살아남았다 한들... 사자들에게 입은 치명상과 심판의 불길을 견뎠을 리가 없을 터. 그것은 불가능했다.
생각에 잠긴 오르드가 단정하듯 고개를 젓자, 아마룬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익인 무리가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날개를 잃고 모습을 감췄다던 그들이 어떻게 비행이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물어볼 새도 없이 대부분 놓쳐버렸습니다. 간신히 한놈을 잡았지만 금방 죽어버렸죠. 그런데... 놈이 남긴 마지막 말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신들은 이제 끝이라고 하더군요."
원탁 주위의 거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오르드가 다시 한번 그들을 진정시키자 아마룬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뒤로 불의 장벽을 넘어 이그니카로 향하던 중 낯선 동굴을 지나왔습니다. 동굴 안에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빛이 있었는데... 흐릿한 윤광이 마치 영혼처럼 떠돌고 있었습니다. 마치 잊혀진 기억들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그 기이한 빛에 대해 혹시 짐작하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오르드는 본인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말을 잃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굳은 하관이 그의 내면을 휘감은 사고의 미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사라졌다고 여겼던 생명의 땅, 실낱같은 희망이라는 핑계를 가장한 존재 여부조차 의심스러운 헛된 이야기들. 그 모든 것들이 노아와 아마룬의 입을 통해 하나의 윤곽을 가진 실체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장벽 너머에 있을 리 없다 믿었던 세계가 어느새 눈앞에 손을 뻗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퍼져 들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신들은 이제 끝났다'는 불길한 문장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허세가 아닌, 어딘가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듯 차갑게 각인된 단언처럼 느껴졌다. 오래전 사라졌다고 믿었던 문양과 겹쳐지면서 오르드의 머릿속에서 낡은 경고처럼 맴돌았다.
마치, 자신이 버티고 있는 이그니카마저도 머지않아 꺼져갈 불꽃 속으로 내던져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