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아래의 비극 (1)

오만과 균열

by 이샤라
"용의 형상을 가진 존재들이 나타났다고들 말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실체를 확실히 알지 못해. 사실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하지. 아우로라의 고룡들을 제외하면 태고의 용들은 전부 멸족당했으니까."

서쪽 대륙을 향하던 어느 여행자의 이야기



단절 아래의 비극



서늘한 바람이 에스트라 가도를 따라 낮게 깔렸다. 가도의 거친 바위길 너머, 중앙대륙과 서쪽 대륙을 잇고 있는 마법의 다리가 푸른 기운을 머금은 채 가늘게 떨렸다. 깊은 정막 속에서 반사되는 은빛 잔광은 머지않아 닥칠 여정의 무게를 예고하듯 길고 무겁게 퍼져나갔다.


말을 멈춰 세운 시즈는 다리 앞에 선 채 깊게 숨을 골랐다. 검은 예복 위에 수 놓인 아우로라의 문양은 햇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차가운 빛을 냈고, 묵직한 결의를 담은 시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의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아로스가 조용히 서 있었으며, 말 아래로 길게 드리운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뒤이어 다가온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땅을 두드렸고, 그 소리의 주인은 율리아였다. 일찍이 배웅은 필요 없다는 시즈의 여러 차례의 만류에도, 율리아는 끝내 고개를 저으며 따라나선 것이었다. 곁에는 몇몇 아우로라의 기사들이 함께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시즈에게 머물러 있었다.


율리아는 입을 다문 채 시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에서 내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망토 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휘날렸다.


"...기어이 떠나는구나."


"여기까지 오지 않으셔도 됐는데요."


작은 숨결처럼 번진 대답이었지만, 그 말에 율리아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가 대신 갈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네가 겪을 고통도, 짊어질 운명도 모두 내가 대신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길은... 끝내 너의 몫이더구나."


시즈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율리아의 곁으로 다가가,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떨리는 손을 천천히 감쌌다.


"그동안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전부 율리아님 덕분이에요."


율리아는 그 손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가는 그 느낌은 동생을 떠나보내던 날의 공허함과 겹쳐졌다.


"넌 언젠가 내 곁을 떠날 아이였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이 순간이 오니 마음이 자꾸만 돌아가려 하는구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애틋함은 숨기지 못했다.


"앞으로 얼마나 고된 길이 너를 기다릴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네 몸과 마음만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잊지 않겠습니다."


시즈는 율리아를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고, 그녀의 손을 잠시 더 붙들었다가 놓았다. 그 순간, 율리아는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 팔이 조심스럽게 시즈를 품는 동안 망설임이 스러지고 안타까움이 남았다.


"언제까지라도, 나는 매일 너를 위해 기도 할 거란다. 그리고... 너무 교리에 얽매여 스스로를 소홀히 하지 말거라."


걱정이 가득 담긴 그 말은 아주 작고 떨렸지만, 마음을 깊이 울리는 마지막 인사였다. 시즈는 말없이 율리아의 품을 잠시 더 느꼈고, 이내 조용히 몸을 뗐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이별의 슬픔이, 눈꺼풀에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율리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녀는 조용히 서 있던 아로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귀공,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는 형식적인 위탁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율리아는 무녀로서의 사명과 수호의 책임을 넘긴 것이 아닌, 시즈라는 한 사람의 삶을 길러준 양어머니로서 부탁한 것이었다.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아로스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율리아는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서 두 사람의 앞을 비워주었다.


시즈와 아로스는 다시 말 위에 올라탔다. 고룡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다리는 앞을 향해 은은히 빛났고, 투명한 바닥 너머로는 잔잔한 흐름이 바다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시즈가 잠시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은 율리아와 기사들이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멀어질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려 있던 기억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제야 아로스가 조용히 말했다.


"돌아보는 시간을 오래 두지 마십시오. 무녀님께서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시즈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다시 고삐를 당겼다. 두 사람은 천천히 다리 위로 말을 몰았다. 투명한 바닥의 까마득한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두 사람이 지나가고 난 다리의 끝은 안개의 벽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율리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눈동자 아래 깊이 내려앉은 감정은 쉽게 말로 옮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복잡한 떨림은 시즈가 아우로라를 떠나기 하루 전, 신전 옥상에서 아텐시아와의 기억으로 이끌었다.


"정말 이대로 두셔도 괜찮으십니까? 자매님께서 곧 여정을 떠나십니다."


아우로라 신전의 옥상, 구름이 드문 하늘 아래에서 율리아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리자 넓은 노대 위에 거대한 성채처럼 누워있는 고룡 아텐시아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지쳐있던 그녀는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가 깊은 숨결로 공간을 울렸다.


그 아이를 배웅하지 않은 것은 외면함이 아니다. 내가 나서면 괜스레 그 아이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 수 있기에 그러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직접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자매님께 큰 힘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배웅이란 떠나는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는 이의 위안을 위한 것이지. 내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그 아이의 걸음에 그림자가 드리웠을 것이다.」


그 말은 다정함과 냉정함이 함께 깃든 울림이었다. 율리아는 그 울림에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말없이 시선을 내리던 그녀에게, 아텐시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대가 걱정하는 바를 알지만... 이제는 보내야 할 시간이다. 축복은 이미 의식을 통해 남겼고, 곁에는 환시를 품은 이가 함께 하지. 그 아이의 발걸음은 오래전부터, 마치 강의 흐름처럼 조용히 이어져 왔다.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는 알고 있지만... 물은 바람에 흔들리고 바위에 부딪히면서 때로는 길을 비틀기도 하지.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위안보다도, 함께 걷는 의지가 두 사람을 더 굳건히 지켜줄 것이다.」


고요히 숨을 고르던 아텐시아는 짧은 침묵 끝에 덧붙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내가 온전히 가늠할 수 없는 결로 이어져 있더구나. 서로를 감싸는 그 흐름은 어딘가 더 깊은 차원에서 맞닿아 있는 듯했다. 눈앞에 있어도 손에 닿지 않는 안개처럼... 분명히 느껴지지만 끝내 그 본질에는 닿을 수 없더구나.」


그녀의 말은 단정되지 않은 채 어딘가 열려 있었다. 시즈의 앞길이 이미 정해져 있으면서도 그 흐름이 누군가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연대에 대한 언급은 율리아의 마음속에 잔잔한 불안을 남겼다. 그 모든 것을 담담히 말하는 아텐시아의 태도에 율리아는 무겁게 숨을 내쉰 뒤 조심스레 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환시를 품은 이가 끝까지 그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반드시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


말 끝에 실린 여운은 무거웠다. 아텐시아의 목소리는 예언처럼 들리면서도, 한 편의 가능성으로 남아 율리아의 마음속에 길고 깊은 잔상을 남겼다. 그 잔상은 지금, 신전을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억누르고 있던 감정의 결을 스치고 있었다.


율리아는 끝내 아텐시아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고룡의 언뜻 드러낸 뜻은 마음 한구석에 그림자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래서 더욱 간절했다. 어딘가에서 그 흐름이 갈라지고, 예정된 운명이 아닌 두 사람 사이의 연대가 하나의 선택으로 바뀌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 회상은 잦아들고,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다리 위를 건너간 시즈와 아로스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그 끝은 안개의 벽 속으로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렴.'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율리아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지고신의 선견처럼...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해 이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기도는 말이 되기 전에 감정으로 가슴을 울렸고, 그 여운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따라 조용히 흘러갔다. 마치 손을 뻗지 못한 채 자식의 등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오늘날 에리스 협곡이라 불리는 그곳은 발을 딛는 것조차 위태로운 절벽의 균열이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협곡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낭떠러지로 보일 터였지만, 그 아래에는 단순한 어둠 이상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바위 절벽은 뿌리째 일그러진 지맥처럼 기괴하게 갈라져 있었고, 칼날 같은 암석 틈새 사이로는 바람조차 길을 잃고 적막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랫동안 비룡의 소굴이라 불리며 사람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던 이곳 협곡은 산등성이를 따라 걷던 이들이 실종된다는 이야기가 괴담처럼 퍼져 있었으며,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협곡의 가장 깊은 곳 아래에는 오래전부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용인(龍人). 그 이형의 존재들은 단지 협곡의 밑바닥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땅 아래를 파고, 산의 내부를 깎아 올리며 바위 속에 거대한 둥지를 틀었다. 통로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날 선 암석과 검붉은 비늘의 잔해로 덮여 있는 이곳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둥지의 중심에는 모든 시선이 닿는 중앙 홀이 있었다. 그곳은 모든 명령이 내려지고, 모든 음모가 움트는 심장부였다. 그러나 얼마 전,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되었던 이곳은 공허의 신도들이 협곡 하부와 연결된 오래된 틈을 통해 접근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홀의 중심에는 가르바가 서있었다. 샌 듯이 새하얀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두 눈과 양손은 오래된 붕대로 감싸져 있었다. 검은 수도복은 곳곳이 헤어져 있었으나, 그 낡음 속에는 한때 고결한 기품의 그림자가 머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반대편에는 거대한 체구의 용인, 오베디안이 서 있었다. 고룡의 형상을 가장 짙게 닮은 그는 검붉은 비늘과 거대한 날개, 길고 무거운 꼬리를 지닌 위압적인 존재였다. 아무 말 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노란 눈동자에는 상황 전체를 꿰뚫는 냉혹한 침묵이 깃들어 있었다.


그 무거운 공기를 찢듯 오베디안이 입을 열었다. 낮고 서늘한 그 목소리는 시퍼런 칼날과도 같았다.


"침입자들을 도륙하는 데만 혈안이 돼서 외부에 남긴 흔적은 생각도 안 하나? 이제 어쩔 셈이지? 놈들이 이 협곡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였는데... 네년의 빌어먹을 자만은 언제나 화근을 만들어내는군."


가르바는 가만히 오베디안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조롱에 가까운 웃음이 얹혀 있었다.


"이 깊은 곳까지 부른 이유가 겨우 저 하나를 꾸짖기 위해서였습니까? 지고신의 뜻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분께서 생각보다 좁은 마음을 가지셨군요."


오베디안의 눈매가 날카롭게 틀어졌다. 그의 발뒤꿈치가 바닥을 짧게 긁었고, 등 뒤 날개는 부르르 떨리듯 조여들었다.


"네년 따위가 감히 뜻을 논하다니. 아직도 사브라트께서 너를 받아줬다고 해서 대단한 위계라도 얻은 줄 아는 것이냐?"


그러나 가르바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손끝을 조용히 들어 오베디안을 가리켰다. 부드러운 말투에는 그에 못지않은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이교도들은 협곡의 하부와 연결된 오래된 틈을 파고들다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겁니다. 침범한 건 그들이지, 우리가 빼앗은 것이 아니죠."


오베디안이 비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허, 그래서 모조리 잡아먹은 게 아무 문제도 없다는 소리냐? 놈들이 협곡에 눈이라도 돌리면 어떻게 될 줄은 알고 있나? 13년 전에도 같은 실수를 저질러 놓고도 그 뻔뻔함은 여전하군."


"지고하신 존재께서 허락하셨기에, 오히려 그들을 먹이 삼아 유생들의 배를 불린 것이죠. 아우로라의 늙은 용은 그저 비룡들이 일으킨 소란으로만 알고 있으니... 작게나마 공포를 새긴 것치고는 괜찮은 결과 아닌가요?"


오베디안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었다. 시선은 점점 더 날이 섰고,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은 분노로 떨렸다.


"말끝마다 사브라트님의 이름 뒤에 숨기 바쁘군. 책임은 여전히 남의 일인가? 네년은 늘 한결같아. 스스로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준 것도 없는 것이 그 자리에 앉아 위엄인 양 떠들기만 해. 주제 파악부터 다시 해볼 생각은 없는 건가?"


가르바는 코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제 역할로 인해서 군단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걸 잊으신 겁니까? 부족하다면 직접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그분께서 주신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직접 느껴보실 의지가 있으시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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