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의 칼날
등 뒤로 교역소에서 따돌렸던 망령 기마대가 다시 나타나 맹렬히 추격해 오고 있었다. 분노에 찬 망령들의 울음소리는 죽음의 소용돌이처럼 평원을 뒤흔들었다.
"망할... 산 넘어 산이군."
아로스가 낮게 이를 갈며 고삐를 세차게 당기자, 레클레스가 땅을 박차고 더 빠르게 평원을 내달렸다. 그러나 잠시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듯, 이번에는 머리 위로 울루니아 두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위...! 머리 위를 조심하세요!"
시즈는 벼락을 떨어뜨리기 위해 손끝으로 마력을 끌어모았지만, 위태롭게 일렁이던 뇌격은 허무한 섬광과 함께 흩어져버렸다. 간신히 봉합한 옆구리의 깊은 상처가 남긴 통증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왜...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무력감은 숨이 막힐 만큼 짙게 내려앉았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거칠게 가슴을 파고들었고, 눈앞의 위협을 알면서도 손을 뻗을 수 없는 현실에 억울하고 분했다.
그러나 생각에 잠길 여유조차 없었다. 아로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울루니아들이 찢어진 날개를 퍼덕이며 급강하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선 괴물의 등에 타고 있던 뒤틀린 기사가 도끼를 높이 치켜든 채 검은 기운을 흩뿌리며 그대로 뛰어내렸다.
아로스는 몸을 틀며 검을 빼들었다. 칼날이 번뜩이며 도끼를 받아치자 금속음과 함께 기사는 궤도를 빗나가며 추락했다. 그러나 곧장 뒤를 따르던 다리아와 부딪혀 땅을 뒹굴었고, 둘은 함께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다리아!"
시즈의 외침이 찢어지듯 터져 나왔다. 눈가에는 순식간에 눈물이 맺혔고, 멀어져 가는 다리아의 모습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러나 감정에 휩쓸릴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검은 연기가 주변에 깔리는 동시에 이번에는 두 사람의 앞길이 막혔다. 절벽으로 좁아드는 평원의 길 위에 또 다른 울루니아가 착지하며 길을 가로막고 있었고, 그 옆에는 뒤틀린 기사가 칼끝을 드리운 채 서 있었다.
그 순간, 레클레스가 돌연 속도를 높였다. 마치 전신이 힘으로 부풀어 오르듯 눈앞의 장벽을 정면으로 들이받을 기세였다. 아로스는 뒤늦게 레클레스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손을 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맹렬한 충격과 함께 레클레스가 울루니아를 걷어차며 잠시 길이 열렸으나, 뒤틀린 기사는 그것을 방패 삼아 그대로 달려들며 레클레스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엄청난 충돌과 함께 두 사람은 결국 안장에서 튕겨나 허공으로 내던져졌다.
바람이 귀를 찢으며 울려 퍼짐과 동시에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아로스는 본능적으로 시즈를 끌어안으며 몸을 틀었고, 그녀가 받을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아래로 향하게 했다. 공기가 폐를 짓누르면서 땅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대한 충격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바닥에 충돌했다.
쿵——
"크허억...!"
아로스의 시야가 번쩍 뒤틀렸다. 왼쪽 어깨로 떨어지면서 검에 꿰뚫렸던 쇄골 언저리의 상처가 더 크게 벌어졌고, 고통은 불길처럼 목과 등줄기를 타고 번졌다. 숨이 턱 막히면서 온몸의 뼈가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 몰려왔지만 그는 끝내 시즈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충격의 여파는 피할 수 없었다. 응급처치로 봉합해 둔 시즈의 관통상은 순간적으로 상처가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일으켰고, 그녀의 몸은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비명은 억눌린 채 짧게 끊겼지만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무녀님!"
아로스가 황급히 시즈의 얼굴을 감싸자, 희미하게 떨리던 그녀의 눈꺼풀은 이내 힘없이 감겼다. 겉으로 드러난 부상은 없었지만 코끝에서 선홍빛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억눌린 내상이 충격으로 터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머리 위로 어두운 기운이 드리워졌다. 절벽 위로 기사들과 망령 기마대가 몰려들어 어두운 그림자를 뿜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좁아터진 골짜기였기에 기마대나 괴물들이 곧장 뛰어내릴 수는 없었으나 그 존재감만으로도 압박감은 숨을 막았다.
아로스는 이를 악물며 시즈를 품에 안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끝장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을 짓밟으려는 듯 네 명의 기사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땅에 떨어진 순간 그들의 다리는 처참하게 부러졌으나 고통 따위는 못 느낀다는 듯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며 점점 가까워왔다. 삐걱대던 뼈마디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원래의 자리로 맞춰지자 기사들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 불길한 발소리가 메아리치자, 아로스는 부활한 이래 처음으로 진정한 위기를 느꼈다.
바람 한 점 없는 부패한 대지 위로 낯선 이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청소년이라 해야 겨우 될 법한 작은 체구, 검은 망토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와 팔과 다리를 감싼 붕대, 그리고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는 거대한 부러져나간 칼날을 지니고 있는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오미누스', 혹은 '죽음을 거니는 자'라 불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원을 거닐던 중, 멀리서 낯선 소란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먼지바람 너머에서 땅을 찢는 듯이 불길하게 메아리치는 울음소리는 단순한 짐승의 울음이 아닌 죽은 자들의 목구멍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오미누스는 먼 곳에서 말을 몰아 달려오는 기병대를 보았으나 그것이 흔한 전장의 병사들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그들은 망령 기마대였다. 죽은 육체를 억지로 붙들어 움직이는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고, 허공 위로는 찢긴 날개를 단 울루니아들을 타고 검게 뒤틀린 기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누군가가 쫓기고 있었다.
기사 한 명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품에는 한 여인이 안겨 있었고, 그는 마치 자신의 몸이 방패라도 되는 듯 철저히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갑옷은 이미 피로 젖어 있었지만, 속도는 줄지 않았다.
오미누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춤에 걸린 거대한 부러진 칼날을 무심히 매만지며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망령 기마대는 맹렬히 추격해오고 있었고, 앞쪽에는 또 다른 울루니아와 뒤틀린 기사가 길을 막아섰다. 그럼에도 기사는 주저하지 않으며 그대로 말을 몰아 정면을 돌파하려 했다.
말은 괴물의 몸통을 걷어차며 길을 열었으나 옆에 있던 뒤틀린 기사가 달려들어 균형이 무너졌다. 결국 말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기사는 마지막 순간조차 여인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자신의 몸을 먼저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오미누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반사나 본능이 아니었다.
기사는 분명 자신의 온몸을 내던졌다. 부서지고 피투성이가 된 팔로 여인을 안아내며 땅과의 충돌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흙먼지가 치솟아 시야를 가렸으나, 먼지가 가라앉는 뒤로도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죽었어야 했다. 아니, 죽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기사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비틀대며 휘청거렸음에도 끝내 여인을 품에 안은 채 일어섰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오미누스의 시선이 절벽 위로 옮겨지는 동시에, 망령 기마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더 위협적인 것은 이미 네 명의 뒤틀린 기사들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두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땅에 떨어져 부러진 다리와 팔다리는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지만 그들은 고통조차 개의치 않는 듯했다.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가는 몸뚱이들은 시간이 흐르자 삐걱대며 원래대로 맞추어져 다시 일어섰더니, 그 불길한 발걸음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두 사람을 향해 다가섰다.
그 모습을 보자 두 사람은 오래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죽을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채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발은 떨어지지 않았고, 시선은 다시 절벽 아래로 향했다. 기사는 이미 한계였다. 숨은 거칠고, 몸은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인을 감쌌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덜 다치도록, 끝까지 몸을 방패처럼 내주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았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설령 강자라 해도 결국 언젠가는 무너진다. 저 기사는 이미 무너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고뇌하는 사이에 뒤틀린 형체들이 점점 두 사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손끝이 두 사람을 덮치려는 순간, 기사는 남아 있는 힘을 짜내 몸을 움직였다.
"...하아."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미누스는 발걸음을 돌려 원래 가던 길의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허리에 걸친 부러진 칼날을 쥔 채 절벽 위를 주시하던 망령 기마대를 향해 곧장 뛰어드는 그 행동에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로스는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심장 박동에 맞춰 둔탁한 고통이 왼쪽 쇄골 언저리에서부터 파고들었고, 그곳에 새겨진 상처에서는 검붉은 피와 함께 기묘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지닌 경이로운 치유 능력마저도 검은 기운이 끊어내듯 막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로스는 끝내 검을 놓지 않았다. 품에 안겨 있는 시즈의 미약한 숨결이 그의 팔을 스치고 있었고,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그 순간, 절벽 위에서 거대한 소란이 터져 나왔다. 망령 기마대의 말들이 날카로운 울음 뒤로 난잡한 충돌음이 이어지더니, 기수들이 절벽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말과 함께 내던져진 기수들은 뒤틀린 기사들의 위로 추락하며 부서진 갑옷 틈새로 검은 안개를 흩뿌렸고, 형체를 잃은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로스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절벽 위로 돌렸다.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윤곽조차 흐릿했지만,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잔상 속에서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후드 속에서는 푸른빛을 머금은 오른쪽 눈이 어둡게 빛났다. 잠시 후, 그 존재는 주저 없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절벽 아래로 던졌다.
청록빛으로 빛나는 작은 물체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자 아로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냈다. 손끝으로 따스하고 청명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돌을 움켜쥐는 순간, 온몸을 휘감던 격심한 통증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쇄골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이 조금씩 밀려나가며 멎지 않던 피가 멈췄고, 찢겨진 살과 근육이 느리지만 닫혀가기 시작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다시 싸울 수 있을 만큼의 기운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잠깐의 찰나 직후, 날카로운 비명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듯한 기괴한 소리와 함께 아로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령 기수들이 떨어진 충격으로 깔려 있던 뒤틀린 기사들이 기수들의 잔해를 거칠게 뒤집어엎으며 몸을 경련시켰다. 바닥을 긁어내는 손끝에서는 금속이 갈리는 불쾌한 소리가 튀었고, 그 모습은 분명 이전까지 봐왔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투구 속에서 번뜩이던 보랏빛 눈동자가 발작하듯 깜빡이며 떨렸고, 부패한 갑옷 틈새에서는 짙은 안개가 들끓듯 솟구쳐 나왔으며, 손가락 마디는 불규칙하게 꺾이며 신경질적으로 경련했다. 몸 전체가 삐걱거리며 기울어지는 그 모습은 마치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듯 휘청거렸다. 목이 비정상적으로 꺾이는 동시에 균형을 되찾은 기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아로스를 노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동시에 그들의 눈빛은 미쳐 날뛰듯 광폭해졌고, 괴성을 터뜨리며 광적으로 달려들었다.
아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끝장이었다. 돌의 힘 덕분에 치명적인 고통은 일시적으로 잠잠해졌지만 쇄골 부근의 상처는 여전히 완전히 아물지 않아 다시 찢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품에 안긴 시즈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고, 관통당한 옆구리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아로스는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은 뒤 미약하게 이어지는 숨결이 가슴에 닿는 것을 느끼며 전신의 힘을 끌어모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뒤틀린 기사들이 절규를 쏟아내며 추격했다. 걸음걸이는 여전히 비틀거렸지만 속도만큼은 사람의 범주를 훨씬 넘어섰다. 그들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썩어 문드러졌고, 부패한 갑옷은 삐걱거리는 쇳소리를 울려냈다. 찢어진 망토가 밤바람을 가르며 휘날리면서 공기는 그들의 부패한 기운으로 점점 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