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꿈, 평범을 그리며
오베디안은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섣불리 맞선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용인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령 만전의 상태를 갖추더라도 결과는 달리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은 힘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기에 자존심 마저도 그를 물러서게 만들었다.
"네놈과 저 기사들이 무슨 목적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비디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이미 예견한 듯 여유로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도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군요. 당신의 주인을 위한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들은 당신이 대적해야 할 상대도, 대적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닙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혼란과 파괴일 뿐이니 말이죠. 아,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감정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으니까요."
차분히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신경을 긁는 와중, 오베디안은 자신의 손아귀가 이미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땀은 두려움이 빚어낸 것이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을 죄어오는 압박이 전신을 감쌌다. 지독히 불쾌한 감정이었으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정체를 끝내 파악하진 못했지만 그는 본능으로 느꼈다. 비디아와 기사들은 이 세상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아로스는 품에 안긴 시즈가 의식을 잃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손도 문제였지만 옆구리를 꿰뚫은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창백해지는 피부와 함께 호흡은 눈에 띄게 약해졌고, 그녀의 몸은 금세라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힘없이 꺼져버릴 듯 위태로웠다.
독기와 부패가 스민 평원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을 죄어 왔고, 언제 다시 용인들이 그들을 덮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죽음의 땅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는 일은 하늘의 별빛을 손에 쥐는 것만큼이나 아득했다.
'이대로는 버티지 못한다. 어디든 숨을 고를 수 있는 곳이 필요해.'
끊임없이 황량한 평원을 훑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아로스를 끌어당겼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하면서도 처음 마주하는 기운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다가와 은밀히 내면 깊은 곳을 두드리며 한 방향을 가리키는 듯했다.
아로스는 고삐를 당기며 그 흐름을 따라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발걸음은 서서히 낯선 지형 속으로 파고들었다. 점차 굴곡지던 평원은 바깥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움푹 팬 땅으로 이어졌고, 빛이 닿지 않는 골짜기는 마치 세상으로부터 은폐된 틈새처럼 잠들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언덕과 썩은 덩굴의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을 자리였다.
'이런 곳에... 길이?'
더 깊숙이 들어가자, 막다른 곳에 다다른 아로스는 말들을 멈춰 세우고 주위를 살폈다. 분명 무언가가 살아 숨 쉬던 자리였으나 지금 남아 있는 건 사라진 흔적뿐이었다. 그 중앙에는 무참히 잘려나간 줄기 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메마른 풀들은 색을 잃은 채 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렸다. 생명이 깃들었던 기척조차 믿기 어려울 만큼 모든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로스는 시즈를 안은 채 레클레스에게서 조심스레 내린 뒤, 잘려나간 줄기의 거친 그루터기에 몸을 낮춰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기댔다. 그리고 허공을 스치듯 한 손을 들어 이곳에 남아 있는 기운의 결을 더듬었다.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빛이 꺼지듯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폐허와는 달랐다. 생명이 완전히 끊긴 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미세하지만 분명한 기운이 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때, 시즈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로스는 즉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손끝이 아주 약하게 떨렸고, 창백한 얼굴 위로 희미하게 눈꺼풀이 떨렸다.
"......여기......는......"
바람에 흩날리듯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의식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무녀님."
아로스가 낮게 부르자, 마침내 눈이 조금 열리며 빛없는 달빛 아래서 지친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곳에 남아 있던 희미한 흔적이 작게나마 온전치 않은 의식에 숨결을 불어넣은 듯했다. 그러나 아로스의 시선은 곧 다시 시즈의 옆구리로 향했다. 상처로 검붉게 젖어 있는 자리에는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그는 재차 확인하려는 듯 손가락으로 피에 절은 옷가지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지금 당장 처치를 해야 합니다."
아로스는 허리춤에서 깨끗한 손수건 하나를 꺼내 접어 시즈에게 내밀었다.
"재갈처럼 물고 계십시오. 견디셔야 합니다."
시즈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받아 입에 물었다. 숨이 거칠게 억눌렸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아로스는 그녀의 옆구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상처는 창이 몸을 꿰뚫고 지나간 듯 무자비하게 찢겨 있었고, 피는 멈출 기미 없이 서서히 흘러내려 옷자락과 바닥을 번들거리게 적셨다.
아로스는 작게 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작은 약재 통을 꺼냈다. 약재 통 안에는 곱게 빻아낸 회색 가루가 담겨 있었고, 그는 다시 시즈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시즈가 손수건을 문 채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로스는 곧장 약재 통을 쥐고 상처 깊숙이 쏟아 넣었다. 가루가 상처속으로 파고들면서 시즈의 온몸이 움찔거리며 뒤틀렸다. 손수건이 입 안에서 물리며 진득하게 젖어갔고, 억눌린 신음이 미친 듯 터져 나왔다.
"으으으으읍......! 끄으으읍......!!"
활처럼 휘어진 몸이 끊어질 듯한 긴장 속에서 가늘게 떨었다. 뼈를 긁어내는 듯한 고통이 살을 태우듯 지독하게 번져나갔지만 아로스의 손길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그녀의 온몸에서 긴장이 서서히 빠져나갔고, 억눌린 신음 또한 천천히 손수건 틈새로 흘러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제야 아로스는 시즈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잘 참으셨습니다."
짧은 고요가 흘렀다. 희미한 숨결과 바람에 스치는 메마른 풀잎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그 적막을 깨듯, 시즈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귀공."
"네, 무녀님."
"...이번이... 몇 번째인가요."
아로스는 그 물음의 뜻을 알아차리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녀님께서 의식을 잃으신 횟수입니까, 아니면 죽음을 가까스로 넘기신 순간 말씀이십니까."
시즈는 고통 속에서도 옅은 웃음을 지었다.
"......둘 다요."
아로스는 잠시 시선을 낮추며 숨을 고르듯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는 끝없이 이어진 그림자 같은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안식 교회와 전선에서의 사투, 산양들에게 쫓기던 순간, 타리안 성채 앞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아우로라 신전에서 감내해야 했던 혹독한 의식, 에리스 협곡의 비극... 그리고 조금 전까지의 용인들과의 추격까지. 모든 장면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짧지만 무거운 대답에, 시즈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앞으로는... 더는 그런 순간이 없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그 안에서 무녀님 또한 여러 번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시즈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정말인가요."
"예."
"...그런 일도... 더는 없길 바래야 할 텐데..."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단순한 피로만이 아닌 깊은 체념과 아로스를 향한 걱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저희가 지나온 길을 생각해 보면, 결국 또 마주하겠죠...?"
아로스의 시선이 어두운 골짜기 너머로 향했다.
"앞으로는 더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다시 서로를 구해야겠지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구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시즈의 말에 아로스는 말없이 침묵했다. 그녀의 우려가 단순한 상상만은 아님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희는 계속 여정을 이어나가야겠죠."
아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복잡 어린 표정은, 끝을 마주한 뒤에도 길이 남아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만약 여정이 끝난다면... 귀공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
아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존재는 이 여정 속에서 빚어졌고, 그 끝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그때가 오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건 너무 가혹하네요."
시즈는 슬픈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내 작게 속삭였다.
"귀공께서는... 지금까지 저와 함께 걸어왔어요. 설령 모든 것이 끝난 뒤 정말 소멸해야만 한다면... 제 힘으로는 막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로스는 그 말을 곱씹었다. 시즈가 두려워하는 건 단순히 사라짐이 아니었다. 함께한 시간, 그 안에서 쌓인 무언가를 부정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녀님께서는 여정이 끝난 후 어떤 길을 가실 겁니까?"
"...아우로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닐 거예요."
"무녀로서의 길을 내려놓겠다는 뜻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저도 평범한 삶에 대해선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만약 모든 것이 끝난다면... 조금은 고민해 보고 싶어요."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춘 채,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적지 않은 길을 지나왔고, 앞으로도 수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끝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이어진 적막을 깨며 시즈가 입을 열었다.
"혹시, 만약에라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삶을 영위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시즈의 말투는 농담처럼 가벼웠지만, 그 속에는 진지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아로스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평범한 삶이라... 어떤 모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의 질문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사명과 전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채워진 삶의 형태를 그려본 적이 없는 자의 물음이었다.
"음... 글쎄요. 적어도 지금처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없는 삶이면 좋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네, 그 정도면 됐어요."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서로의 온기를 맞대며 앉아 있는 순간만큼은 차가움이 두 사람 사이를 얼어붙게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찰나의 고요한 평화도 잠시, 아로스의 눈빛이 돌연 날카롭게 빛났다. 불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스며들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기에 손을 얹었다. 어둠이 갈라지면서 두 개의 형체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고,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갈랐다. 아로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검을 빼들었지만, 순식간에 차갑고 짙은 어둠으로 물든 검이 왼쪽 쇄골 언저리를 파고들며 피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귀공!"
시즈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 두 번째 공격이 아로스를 향하더니 또 한 번 금속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격렬한 진동이 손끝을 타고 퍼졌지만 아로스는 상대의 힘을 이용해 칼날을 비틀어 반격을 가했다. 검은 기사 하나의 목이 비스듬히 잘려나갔으나 곧 역겹게 들러붙듯 검은 액체가 솟구쳐 상처를 봉합했다.
'...젠장, 역시 쉽게 쓰러지진 않겠군.'
아로스는 이를 악물고 기사를 밀쳐내자 곧장 시즈에게 다가갔다. 피가 쇄골에서 계속 흘러내리며 갑옷을 적셨으나, 그는 아픔을 애써 억누른 채 시즈를 품에 안아 올렸다.
"귀공... 상처가...!"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시즈가 그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지만 아로스는 짧게 잘라내듯 대답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힘겹게 스스로 말에 오르려는 시즈의 모습을 보고 그녀를 안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지금은 제게 맡기십시오."
시즈를 품에 안은 아로스는 재빠르게 레클레스 위로 올라탔다. 곧바로 고삐를 틀자 레클레스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고, 다리아가 그 뒤를 잇듯 거친 숨을 내뿜으며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