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맥의 이면
소녀는 곧장 달려들지는 못했지만, 한참을 멈춰 서서 망설인 끝에 조심스레 다가가 그의 가죽 장갑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작은 손끝은 떨렸음에도 불구하고 처절할 만큼 절실했고, 아로스는 말없이 조용히 그 손을 내려다봤다. 무겁게 드리운 감옥의 공기 속에서 아이가 보여준 그 작은 움직임이 무엇보다 크게 다가왔다.
그 순간, 사방에서 낡은 몸부림이 일어났다. 불에 문드러져 손가락조차 남지 않은 팔목과 손들이 아로스의 다리를 향해 매달리듯 다가왔다. 힘없는 몸들이 바닥을 질질 끌며 기어와, 마치 구원을 바라는 망자들처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발목을 억눌렀다.
"나도... 나도 데려가줘..."
"여기서 죽게 두지 말아 다오..."
"부탁이야... 제발......!"
죄수들의 갈라지고 찢어진 목소리가 잇따라 흘러나왔다. 그 처절한 몸짓들이 어둠 속에서 덩어리처럼 밀려오자, 아로스의 발걸음은 굳어졌다.
그때였다. 멀리서 금속을 끄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거운 발자국이 점점 가까워졌고, 이내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두 개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얼굴 반쪽이 검게 문드러져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눈구멍만 뚫린 철가면을 뒤집어쓴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구와아아아아악——!"
괴성이 감옥의 공기를 갈기갈기 찢었다. 죄수들은 공포에 질려 바닥에 엎드렸고, 소녀는 본능적으로 아로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형씨! 지금 당장 나가야 돼!"
벨라미가 날카롭게 외치자, 두 사람은 서둘러 감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숨이 턱 막히는 장면을 마주했다. 지나온 길목이 바위더미로 완전히 메워져 있었다.
"젠장... 어떡하냐, 길이 막혔어!"
벨라미가 이를 악물며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이야!"
그러나 그곳에서도 또 다른 간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축한 발자국과 함께 거구의 간수들이 사방에서 길을 막아서자 벨라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거 이거, 완전히 망했는데...?"
아로스는 대답 대신 품에 안고 있던 소녀를 벨라미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 손끝의 무게가 옮겨지는 순간, 벨라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 형씨? 또 뭘 하려는 거야!"
벨라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아로스는 이미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쇳빛이 불길한 어둠 속을 가르며 번뜩였고, 길을 가로막는 간수들에게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날카로운 칼끝이 간수의 목덜미를 가르려는 순간,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동작이 튀어나왔다. 간수가 순식간에 도끼를 치켜들어 아로스의 칼날을 막아내자 쇠와 쇠가 맞부딪히며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로스는 이를 악물고 힘으로 밀어붙였지만 간수는 전혀 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산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인지 조금 전 동굴에서 몸이 가벼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힘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고, 결국 아로스는 숨을 가다듬고는 돌연 힘을 빼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간수가 앞으로 비틀거리자 그는 곁의 벽에 걸려 있던 횃불을 집어 들어 그대로 간수의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쳤다.
"그아아아아아아악——!!!"
불길이 번져 뒷머리와 등이 타오르자 간수는 비명과 함께 괴성을 지르며 아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기세를 정면으로 맞받은 아로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횃불을 간수의 눈구멍에 박아 넣어 쓰러뜨렸고, 그 위로 다시 온 힘을 다해 힘껏 눌러 꽂았다.
검은 피가 폭발하듯 눈에서 터져 나오자 몸을 뒤틀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간수는 이내 축 늘어졌다. 아로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붉게 물든 손을 내려다보는 순간, 벨라미의 다급한 외침이 귀를 찔렀다.
"형씨! 뒤! 뒤!!"
아로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눈구멍만 뚫린 철가면을 쓴 간수가 거대한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칼날은 삐죽삐죽 불균형하게 다듬어진, 네모반듯하면서도 흉악한 모양새였다. 쇳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내려왔지만 아로스는 허리를 숙여 피했고, 동시에 칼끝을 휘둘러 간수의 발목을 베어냈다.
"쿠엑——!"
발목을 잃은 간수는 무지막지한 체중과 앞으로 쏠린 균형에 휘말려 그대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요란하게 나뒹구는 순간, 아로스는 뒤를 돌아 벨라미와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뛰어!"
벨라미는 소녀를 품에 안은 채 곧장 몸을 날렸다. 세 사람은 미친 듯이 어둠 속을 향해 달렸고, 바위벽에 메아리치는 발소리 뒤로는 간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뒤쫓아왔다.
산맥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길은 단순히 한 줄기로 뻗어 있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갈라진 통로들이 각기 다른 장소로 이어지듯 뻗어 있었다. 벽은 자연스레 뚫린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흔적이 섞여 있었고, 곧게 이어지는 듯하다가도 휘어 들어가며 다시금 좁아졌다.
시즈는 숨이 가빠와도 멈출 수 없었다. 벽과 벽 사이로 바람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몸을 내밀었지만 통로는 쉽게 외부로 빠져나가게 내어주지 않았다. 굽이마다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그 속에서 익인들의 형체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오미누스는 망설임 없이 앞을 가로막는 무리들을 뚫어냈다. 등 뒤에 걸린 거대한 칼날은 사용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듯 그는 맨손으로 익인들을 쓰러뜨렸다. 괴력의 손길 한 번에 익인들은 거품을 물며 힘 없이 벽과 바닥을 나뒹굴었고, 무력하게 쓰러진 그들의 몸짓만이 통로를 가득 메워갔다.
그러나 익인들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통로가 좁아질수록 마치 물길을 막는 둑처럼 몸을 겹겹이 쌓아 두 사람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그때, 뒤편에서 몇몇 쓰러진 익인들이 비명을 토했다.
"안쪽으로 가게 두면 안 돼! 저 방만은......!"
다급한 울음 같은 외침이 메아리쳤지만 시즈는 그 의미를 가늠하지 못한 채 혼란에 잠겼다. 그럼에도 뒤엉킨 저항은 계속되었고, 오미누스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차갑게 뻗은 손끝과 압도적인 힘에 익인들이 연이어 벽 쪽으로 나뒹굴었다.
쓰러져가는 무리의 틈새로 나아가던 순간, 시즈는 문득 의아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산 내부의 익인들은 바깥에서 몰려들던 건장했던 무리와 전혀 달랐다. 쪼그라든 날개는 훨씬 더 축 늘어져 있었고, 뼈마디가 삐죽 솟아 왜소해 보였으며, 눈빛은 격렬한 분노보다 쇠락과 피로에 더 가까웠다. 저마다 늙고 지쳐 있었으며, 허약한 그림자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틈은 없었고, 가장 안쪽 통로를 지키던 두 명의 익인이 비틀린 날개를 떨며 길목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극도의 증오가 서려있었다.
"여긴 안돼! 더는 발을 들이지 마라!"
"짐승 같은 인간 놈들! 죽여버리겠어!"
거친 포효와 함께 한 익인이 낡고 무디기 짝이 없는 칼을 휘두르며 돌진했지만, 오미누스는 주저함 없이 팔을 잡아 비틀어내더니 그 칼을 거꾸로 쥐어 익인의 날개 관절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비명이 터지며 몸이 주저앉았고, 곧장 또 다른 익인이 절규를 터뜨리며 달려들었지만 오미누스는 냉혹하게 목덜미를 붙잡아 거칠게 들어 올려 그대로 문을 향해 내던졌다.
우지직― 콰당탕――
나무문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익인의 몸은 부서진 판재와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먼지로 자욱한 방 안으로 들어선 시즈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이 크게 흔들리며 발걸음이 얼어붙듯 멈춰 섰다. 그 안에는 서른 명 남짓한 익인들이 구석에 몰려 있었다. 대부분은 어린아이들이었으나, 그들 틈에는 마찬가지로 기형을 가진 성체 익인들도 섞여 있었다. 다리가 하나 없거나 지나치게 왜소해 앙상한 뼈만 드러난 아이, 한쪽 눈이 흐릿하게 빛을 잃은 자, 부리 윗부분이 검게 썩은 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저마다의 끔찍한 결핍을 안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숨죽여 있었다.
그 광경에 시즈의 가슴이 서늘하게 무너져 내렸다. 무력을 휘둘러 이 문을 열어젖힌 순간부터 자신들이 몹쓸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떨림이 손끝까지 번져 말을 잇지 못하자, 뒤에서 다른 익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확인한 오미누스가 단호하게 손목을 붙잡았다.
"시간 없어."
낯설 만큼 냉정한 목소리와 함께, 오미누스는 그대로 건너편 돌문을 향해 사정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몇 차례의 주먹질 끝에 두꺼운 바위가 거칠게 갈라지면서 굉음과 함께 길이 열렸다.
틈을 비집고 들어서면서 눈앞으로 또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광산의 모습을 닮은 듯한 작업장 아래에는 반쯤 깨진 채 어지럽게 흩어진 석관들과 인간 노예들의 주검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한때 돌을 다듬던 망치와 끌이 널브러져 있었으며, 벽과 바닥은 거센 불길이 지나간 듯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아수라장처럼 뒤틀려 있었는 작업장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불씨가 바람에 타오르듯 깜박이면서 짙고 매캐한 냄새를 사방으로 풍기고 있었다.
시즈와 오미누스는 작업장 곳곳에 엉켜 있는 나무다리와 돌계단을 타고 아래로 몸을 옮겼다. 곳곳이 불에 그을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공간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거대한 기척이 덮쳐왔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베리엘이 작업장 바닥을 파열시키며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은 그는 짐승 같은 웃음을 흘리며 낮게 내뱉었다.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잘도 여기까지 내려왔구나. 하지만 이제 끝이다!"
그의 양손에서 날카로운 클로가 튀어나오자 오미누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등 허리에 매고 있던 거대한 칼날을 집어 드는 순간, 무게감 있는 금속의 광휘와 함께 칼날에 새겨진 뿌리에 감싸인 듯한 기묘한 마름모의 문양이 번쩍였다. 동시에 시즈 또한 이능을 끌어올렸고, 그녀의 왼쪽 눈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며 작업장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베리엘이 먼저 돌진했다. 클로가 바위를 할퀴며 불꽃을 튀기자 오미누스는 반걸음 옆으로 비껴서며 대검을 휘둘러 받아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며 고막을 찢는 듯한 금속음과 함께 청록의 섬광이 짧게 터져 나왔고, 충격이 양쪽으로 튕겨나가며 돌가루가 흩날렸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민하게 몸을 틀어 날카롭게 허공을 찢는 소리는 칼날보다도 매서웠다. 그러나 오미누스 또한 거대한 검을 단순히 휘두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손목의 미세한 각도로 힘을 흘려내면서 마치 흐름 자체를 읽은 듯 연속 타격을 막아냈다.
순식간에 칼날과 클로가 수십 차례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는 동시에 쇳소리가 작업장을 울렸다. 힘과 힘이 충돌할 때마다 주변의 바위들이 흔들리며 금이 가는 그 순간, 베리엘의 눈이 흔들렸다.
"네놈... 그 칼날, 어디서 손에 넣은 것이냐!?"
눈앞의 상대의 무기는 투박한 대검의 무게감이 아니었다. 손끝으로 전해진 울림은 오래전 대지에서 사라진 어떤 기운과 닮아 있었다. 부러진 칼날의 균열 바로 옆에 그려진 문양은 격돌의 순간마다 청록빛을 발산하며 클로 표면을 미세하게 태웠고, 그 광경에 베리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고 더욱 강하게 받아쳤다. 하지만 클로를 더 깊숙이 꾹 눌러 붙였음에도 충격은 되려 그의 손목을 저릿하게 했다.
베리엘은 간신히 클로를 세워 막아냈지만 그 힘은 상상을 넘어섰고, 돌계단이 산산이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오미누스가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돌진하며 베리엘을 거침없이 몰아치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에서 불꽃 구체들이 날아들었다.
퍼어엉――
번쩍이는 불길이 곧장 오미누스를 향해 파고들자 그는 본능적으로 칼날을 틀어냈다. 폭발과 함께 터져 나온 열기가 돌바닥을 뒤흔들며 사방에서 연달아 불꽃이 쏟아졌고, 불길은 매캐한 연기를 동반해 작업장을 뒤덮으며 거센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까마귀 형상의 가면을 쓰고 붉은 광휘를 두른 사제들이었다. 시즈는 불꽃의 결을 보는 순간 그들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혼탁하지만... 이건 분명, 이그니카의 불꽃.'
그 불꽃은 노아가 다루던 힘과 닮아 있었으나, 어딘가 더 탁하고 난폭했다. 정제되지 않은 파괴의 성질이 그대로 드러난 불꽃이었다.
사제들이 동시에 손을 뻗자, 사방에서 폭탄처럼 불길이 쏟아졌다. 시즈는 이를 악물고 양손을 펼쳤다. 왼쪽 눈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원형의 방어막이 형성되면서 오미누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꽃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보호막에 닿은 불길은 마치 막을 태워 삼켜버리듯 파고들었다. 푸른 막이 금세 불안정하게 흔들리자 균열 같은 섬광이 표면에 일렁였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베리엘은 다시금 클로를 높이 쳐들며 파도처럼 덮쳐왔다. 오미누스가 방어막 안쪽에서 칼날을 들어 받아냈지만 불길의 압력과 겹쳐진 충격은 상상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