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날개의 둥지 (14)

재회

by 이샤라


벨라미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다시 아로스의 등 뒤에 바싹 달라붙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벨라미의 등 뒤, 굳게 닫혀 있던 바위 문이 굉음과 함께 박살 나며 안쪽에서 부패에 물든 거구의 간수가 튀어나왔다.


"우아아악! 이번엔 또 뭐야!"


벨라미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에 질려 기겁을 했다. 동시에, 아로스의 눈앞에서는 파도의 악마들이 꾸물거리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앞에서는 녹아내리는 악마들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등 뒤에서는 썩어 문드러진 거구의 간수들의 추격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옆은 아득한 낭떠러지, 아래에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부패의 기운이 맹렬하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로스의 뇌리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이 악몽 같은 협공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벨라미!"


아로스가 눈앞의 파도의 악마 하나를 더 베어내며 외쳤다.


"내 몸을 꽉 붙잡아라!"


"뭐? 형씨, 그게 뭔 소리야! 지금 장난해!?"


벨라미가 기겁하며 되물었지만, 아로스는 그의 말을 잘랐다.


"시간 없어! 지금 당장!"


아로스의 다급한 외침에, 벨라미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 순간, 아로스는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벨라미의 찢어지는 비명이 협곡을 울렸다. 아로스를 덮치려던 파도의 악마들과, 벨라미를 쫓던 간수는 목표를 잃고 서로에게 돌진했다. 질척이는 살덩이와 썩은 거구가 뒤엉켜 부딪혔고, 균형을 잃은 그들은 비명과 함께 절벽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추락하는 아찔한 감각 속에서, 아로스는 칼을 휘둘러 절벽의 암벽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콰드드드득————


칼날이 바위를 긁어내며 불꽃을 튀겼다. 끔찍한 마찰음과 함께 몸이 쭈우욱 미끄러져 내려가다, 어느 순간 둔탁한 충격과 함께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헉... 허억... 이, 이걸... 사네......"


벨라미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스릴 넘치는 방법은 피하자고, 형씨...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하지만 그 안도감은 잠시뿐이었다. 왼편 아래, 검보랏빛 부패의 기운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산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으며, 동시에 머리 위에서는 절벽을 기어 내려온 파도의 악마들이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그들을 향해 녹아내리는 팔을 뻗고 있었다.


뚝— 치이익———


녹아내리는 살점 하나가 아로스의 갑옷 위로 떨어지자, 금속이 녹아내리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광경에 벨라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었다! 위에서는 녹이고 아래에서는 삼키고! 우린 그냥 여기서 죽을 운명이었던 거야!"


벨라미가 고래고래 악을 쓰는 동안에도 아로스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자신이 죽을 일은 없었지만, 품에 안긴 소녀와 목에 매달린 벨라미는 아니었다.


그때, 파도의 악마 하나가 천장에서 몸을 던져 그들을 덮쳤다. 아로스는 칼자루에 매달린 채 몸을 비틀어 간신히 피했지만 바로 옆까지 치고 올라온 부패의 기운을 피하려 몸을 트는 순간, 위에서 또 다른 악마가 떨어져 내렸다.


피할 곳이 없었다. 결국, 아로스는 절벽을 지탱하던 칼자루를 놓치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아득해졌다. 아래에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부패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위에서는 녹아내리는 손을 뻗는 악마의 그림자가 그들을 덮쳐왔다. 등 뒤에서는 벨라미가 아직 못 먹어본 술이 몇 갠데라며 절규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그 찰나, 시야 가득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견고한 보호막이 세 사람을 감싸는 동시에, 그들을 덮치던 파도의 악마는 푸른 불길에 휩싸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이어서 허공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아로스의 벨트를 거칠게 낚아챘더니 순식간에 추락의 감각이 사라지면서 깃털처럼 가볍게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황 속에서, 아로스는 자신을 붙잡은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오미누스였다.


"어떻게...!?"


아로스의 말문이 막힌 바로 그사이, 먼지 속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귀공...!"


시즈가 감정을 숨기지 못한 눈물 어린 얼굴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은 위태로웠다. 눈앞에서 아로스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절망, 밤낮을 찾아 헤맸던 절박함. 그리고 지금 그가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뒤엉켜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아로스의 앞에 멈춰 선 시즈는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허물어지듯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무너지듯, 기대어 쓰러지듯 그의 품을 파고든 어깨는 가늘게 떨렸고, 억지로 참아내던 흐느낌이 차가운 갑옷 위로 작게 터져 나왔다.


"저는... 저는 정말......!"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아로스는 자신의 갑옷 위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와 미세한 떨림에 숨이 멎을 뻔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망설임 끝에 시즈의 등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딱딱한 갑옷 너머로도 서로의 심장 박동이 전해지는 듯했다.


"...제가,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죄송합니다."


아로스는 낮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걱정을 끼쳐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여전한 말투. 생사가 오가는 악몽 같은 시간을 함께 건너왔음에도 그 변함없는 덤덤함과 고지식한 사과에 시즈는 울컥 치솟는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야속함을 느꼈다. 속으로는 누구보다 걱정했을 사람인 걸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조금 더 요란하게 반겨주길 바랐던 것일까.


시즈는 아로스의 품에서 몸을 떼어내며 눈가의 물기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붉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걱정했던 시간만큼의 무게를 담은 뾰루퉁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약속해 주세요."


"...예?"


"약속하시라구요. 다시는... 다시는 제 눈앞에서 그렇게 사라지지 않겠다고요. 아시겠어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안에는 원망이 아닌 간절한 애원이 담겨 있었다. 아로스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그 우직한 대답을 들은 시즈는 입술을 꾹 깨물며, 짐짓 엄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번 한 번뿐이에요.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정말 재미없을 줄 아세요...!"


으름장이라기엔 울음 섞인 목소리였으나, 그 서툰 투정마저 아로스에게는 더없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의 올곧은 시선을 마주한 시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고,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애써 냉정을 되찾으려 했다.


그렇게 둘 사이에 흐르는 애틋하고도 어색한 공기를 깨뜨린 것은 어이없다는 듯한 벨라미의 목소리였다.


"아니, 잠깐만. 뭐야 이 분위기?"


벨라미가 옆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손을 휘적였다.


"나도 목숨 걸고 같이 도망쳤는데, 둘이서만 감동적인 재회하는 거야?"


시즈는 벨라미의 말에 자신들이 잠시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망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아로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고 나서야 그의 한쪽 팔에 단단히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작은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는...?"


아로스는 품에 안긴 소녀를 한번 내려다본 뒤, 짧게 대답했다.


"감옥에서 구출한 소녀입니다."


그 짧은 대답에 시즈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렸다. 이전의 아로스였다면 타인의 안위를 이토록 진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터였으나, 생명의 숲에서 무언가 채워졌다고 했던 그의 말이 이제야 선명한 현실이 되어 가슴에 와닿았다.


바로 그때, 아로스의 품에 안겨 있던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칠흑 같은 감옥의 어둠 속에서만 세상을 봐왔던 소녀의 눈동자는 눈앞의 괴물도, 주변의 비명도 담지 않았다. 오로지, 난생처음 마주하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구름과 연기가 뒤섞인 끔찍한 하늘이었지만 소녀에게는 그저 경이로운 빛의 장막일 뿐이었는지 소녀는 울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그저 신기한 것을 본 듯 작은 손가락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슴 시리도록 안쓰러워, 시즈는 조심스레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름이 뭐니?"


하늘에 꽂혀 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시즈에게로 향했다.


"......미에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여렸지만, 그 안에는 어둠 너머 처음으로 세상을 마주한 작은 새싹 같은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 기묘하고도 서글픈 평화를 깨뜨린 것은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었다.


쿠우우우웅———


"...야단 났네."


벨라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산의 암벽에 몸을 박아 넣고 생명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던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괴물은 끔찍한 몸을 돌려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듯 아로스와 시즈,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 사이, 오미누스는 다른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괴물을 맹렬히 공격하던 불꽃의 사제들은 더 이상 괴물을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불꽃을 거두고, 무너지는 산의 반대편으로 그림자처럼 사라져 갔다.


'...어째서 물러나는 거지?'


오미누스가 의문을 품고 그들을 주시하던 중, 시즈를 몰아붙였던 사제가 잠시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까마귀 가면 너머의 붉은 안광이 의미심장하게 시즈 일행을 훑고 지나가더니, 이내 그 역시 산 반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사제들이 사라지는 동시에, 괴물은 분노를 터뜨리듯 끔찍한 괴성을 질렀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


거대한 살덩어리 몸뚱이를 질질 끌며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미친! 저놈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벨라미가 산 뒤편을 향해 곧바로 줄행랑을 치는 사이, 오미누스는 번개 같은 속도로 튀어 나가 질척이는 괴물의 몸을 그대로 타고 올랐다. 순식간에 머리로 보이는 부분까지 도달한 그는 등허리의 칼날을 집어서 들어 올리며 있는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칼날이 닿은 부위마다 청록빛으로 타들어감에도 괴물의 살점을 깊이 파고들지 못했으며, 오히려 끈적한 살덩이가 날을 붙들 듯 감겨 들어 쉽사리 베이지 않았다.


'...젠장, 덩치가 너무 커서 한 번에 베이질 않잖아!'


오미누스가 속으로 뇌까리는 순간, 괴물은 끔찍한 포효와 함께 거대한 팔들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팔은 거대한 풍차처럼 공기를 갈랐고, 그 바람만으로도 주변의 바위 조각들이 튕겨나갔다. 오미누스는 순간적으로 몸을 낮춰 스쳐 지나가는 팔들을 피했지만 시야의 사각지대인 오른쪽 뒤편에서 날아온 공격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이런...! 실수를......!'


직격 당하기 직전의 찰나, 하늘에서 푸른 벼락 한 줄기가 떨어져 괴물의 팔을 강타했다.


콰앙———


"괜찮으신가요?"


시즈의 다급한 물음에 오미누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괴물의 몸 곳곳에서 끔찍한 변화가 일어났다. 살덩이가 부풀어 오르더니 그 안에서 눈동자가 사라져 안구가 움푹 팬, 반은 썩어 문드러지고 반은 부패로 뒤덮인 망자들이 마치 종양처럼 비집고 쏟아져 나왔다.


"몸... 몸을 내놔......"


"...내놔... 그 몸을... 내놔!"


그들이 어기적거리며 다가오자, 아로스와 시즈는 말없이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썩어 문드러진 손이 허공을 더듬으며 살아있는 몸을 원하는 듯 울부짖자, 아로스가 그들 앞을 막아섰다. 손에 들린 것은 간수가 들고 다니던 이가 나간 네모난 대형 식칼처럼 생긴 커다란 날붙이뿐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칼날을 휘둘러 다가오는 망자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시즈는 자신의 옷자락을 쥔 채 핏빛 하늘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미에르에게 말했다.


"언니 옆에 꽉 붙어 있어야 돼. 알았지?"


망자들이 떼를 지어 다가오자, 시즈는 자신의 손에 용뢰를 감았다. 푸른 용뢰가 감긴 양손을 바닥에 닿는 순간, 용뢰가 퍼져나가며 망자들이 벼락에 튀겨지듯이 터져나가기 시작했지만 망자들은 그 공격으로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각난 몸뚱이들이 일그러지면서, 여러 개체로 분열되면서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즈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망자들의 몸과 뒤편으로 보이는 거대한 괴물의 몸을 덮고 있는 새까만 점액, 흘러내리고 있지만 마치 숨을 쉬듯이 고동치는 그 모습.


그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본체가 살아 있는 한... 이 망자들은 사라지지 않겠어.'


시즈는 곧바로 오미누스를 향해 외쳤다.


"저 거대한 괴물이 이 망자들의 본체입니다! 서둘러서 쓰러뜨리지 않으면 엄청난 숫자로 늘어날 거예요!"


"나도 노력하고 있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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