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건넨 불씨
시즈의 벼락과 달리, 망자들은 오미누스의 칼날에 베이는 순간 분열 없이 쓰러지면서 속절없이 터져나갔다. 하지만 그 숫자는 너무나도 많았다.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괴물의 벌어진 몸의 틈에서 쏟아져 나오는 망자들로 인해 이대로라면 오미누스는 본체에 일격을 가하기도 전에 망자들에게 둘러싸일 판이었다.
오미누스의 상황을 파악한 시즈는 다시 한번 망자들을 무력화시킨 뒤, 이능을 한 곳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왼쪽 눈이 푸른 이능으로 타오르듯이 반짝이자 용뢰를 감은 오른손에 더욱 커다란 기운이 모여들었다.
"괴물에게서 떨어지세요!"
아로스는 시즈가 또다시 아텐시아의 힘을 쓰려는 것을 보고 놀라 외쳤다.
"무녀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아로스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럴 틈도 없었다. 시즈의 의도를 즉각 파악한 오미누스는 괴물의 머리와 가까운 관문의 잔해로 피하는 동시에 커다란 벼락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콰르릉—— 콰과과광————
파괴적인 뇌격이 괴물의 온몸을 타고 흐르면서 망자들을 터뜨리는 동시에 괴물의 몸이 크게 휘청였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오미누스가 괴물의 머리로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로스는 다급히 시즈를 돌아보았다. 살짝 지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외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무언가 다른 힘이 시즈를 지키고 있다고 판단한 그는 우선 눈앞에 남은 망자들을 향해 다시 칼날을 휘둘렀다.
그 사이, 오미누스는 괴물의 정수리에 칼날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칼날이 박힌 괴물이 고통으로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미친 듯이 날뛰자, 그 난폭한 몸부림으로 근처의 모든 지형이 깎여나가고 박살이 나면서 바닥을 거닐던 망자마저 휩쓸려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찢겨나갔다. 이어서 칼날을 주둥이까지 당겨 쭉 찢어버리자 괴물은 정수리부터 윗턱까지 완전히 반으로 갈라진 채 검은 뇌수를 사방으로 뿌리면서 발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쓰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난폭하게 돌변했다. 오미누스가 괴물의 머리에서 뛰어내리며 물러나자, 쓰러지지 않는 괴물의 모습에 당황한 시즈가 다급하게 물었다.
"머리가 저렇게 갈라졌는데, 대체 왜 쓰러지지 않는 거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칼날, 저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무기가 아니었나요?"
"나도 몰라.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만나왔던 놈들은 이 칼날에 머리를 베인 이상 살아남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 머리가 다시 붙지 않는 걸 보면 분명 타격을 줬다는 말인데... 약점이 따로 있는 건가?"
두 사람이 고뇌하고 있는 사이,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망자들이 쏟아졌다. 아로스가 끝없이 밀려드는 망자들을 베어냈지만, 베일 때마다 그들은 둘로, 셋으로 늘어날 뿐이었다.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이대로는 끝이 없습니다!"
아로스의 외침에 오미누스는 다시 괴물의 머리로 뛰어올라 사정없이 칼날을 내리쳤다. 하지만 갈라진 머리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고, 그의 공격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한계에 부딪히리라 생각하며 시즈가 고뇌에 빠진 바로 그 순간, 옷자락을 붙들고 있던 미에르가 다급하게 그녀를 잡아끌며 보챘다.
"잠깐만, 지금은 안돼! 가만히—"
자신을 방해하는 손길에 미간을 찌푸린 시즈의 손에, 미에르가 무언가를 억지로 쥐여주었다.
'이건......!'
시즈가 당황스럽게 받아 든 것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불꽃의 사제가 허릿춤에 지니고 있던 바로 그 유리병. 하지만 그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사제들이 사용하던 검붉은 불길과는 달랐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의 피처럼 진한 진홍빛 홍염(紅炎)이 고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부패는 불에 약했다. 그리고 이 불꽃은, 자신이 마주했던 그 어떤 불길보다도 순수하고 강렬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고, 이것이라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즈는 망설임 없이 괴물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유리병을 던진 뒤, 왼눈의 이능을 쏘아 허공에서 병을 깨뜨렸다.
화르륵————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유리 조각과 함께 터져 나온 진홍빛 불꽃이 괴물의 어깨와 팔에 옮겨 붙자 괴물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수백의 원념이 뒤섞인 듯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타오르는 상흔은 단순한 화상이 아니었다. 불길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살점을 파고들며 그 존재 자체를 안쪽에서부터 태워버리는 듯했다. 마치 마른 장작을 태우듯 맹렬한 기세로 온몸을 타고 흘렀고, 순식간에 거대한 살덩어리를 집어삼켰다.
"물러서!"
아로스의 외침과 동시에, 불길에 놀란 오미누스가 괴물에게서 뛰어내렸고 아로스 또한 망자들을 베어내며 멀찍이 물러섰다. 타오르는 괴물의 불길과 연결된 망자들 또한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함께 불타 쓰러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쓰러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무가 녹아내리듯 질척하게 퍼져나간 몸뚱아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화염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에드바르가 눈 깜짝할 사이에 튀어나왔다. 그는 손에 쥔 청록빛 불빛을 머금은 창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괴물의 벌어진 아가리 속으로 힘껏 집어던졌다. 창을 그대로 집어삼킨 괴물의 거대한 몸이 잠시 후 거대한 심장처럼 고동치기 시작하더니,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는 몸의 표면 위로 혈관처럼 보이는 청록빛 선들이 선명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그 모든 빛이 응집된 몸의 중심부로, 거대하고 청록빛으로 빛나는 심장과도 같은 부위가 드러났다.
"저곳이 놈의 약점이다! 저길 공격해!"
외침과 함께 에드바르는 날카롭고 긴 직검 하나를 아로스를 향해 던졌다. 낡은 칼자루와 달리 그 예리한 날에서는 서늘한 엘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로스는 검을 단단히 쥐며 에드바르와 함께 요동치는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괴물이 그들을 향해 먼저 달려들려 하자, 어느새 오미누스가 턱 아래로 순식간에 파고들어 거대한 칼날로 육중한 아랫목을 강타해 놈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둔화시켰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아로스와 에드바르는 동시에 청록빛으로 요동치는 검은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칼날이 박히자 청록빛 혈관들이 순식간에 빛을 잃고 사라졌고, 심장은 터질 듯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괴물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 관문의 폐허를 모조리 쓸어버릴 기세로 광란하듯 몸부림쳤으나 그 몸부림도 잠시, 이내 검은 심장이 안쪽에서부터 폭발하듯 터져버렸다.
거대한 몸뚱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그 위로 다시 불길이 타오르더니, 서서히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갔다. 괴물의 마지막 잔해가 완전히 스러지는 것을 확인한 시즈는 곁에 있던 미에르를 품속으로 단단히 끌어안으며 긴장이 풀린 듯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로스와 오미누스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들 뒤로, 어디선가 벨라미가 튀어나와 양팔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호우! 드디어 끝장났구만! 그 못생긴 괴물을 저렇게 쓰러뜨리다니, 이거야말로 통쾌한 일이지. 암, 그렇고 말고!"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오미누스와 아로스가 동시에 눈꼴 시렵다는 듯 쳐다보자 벨라미는 순간 어깨를 움츠리며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왜들 그래? 나도 나름대로 목숨 걸고 도망쳤다고."
벨라미는 능청스럽게 말을 넘기며 두 사람의 시선을 피했다. 그 사이, 시즈는 품 안의 미에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그 유리병... 어디서 났니?"
미에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벨라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벨라미의 표정이 익살스럽게 일그러졌다. 눈썹을 찡긋하고 입꼬리를 비틀며, 마치 '쉿, 그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라고 속삭이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그 무언의 신호를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에르는 별말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멀뚱멀뚱 시즈를 쳐다볼 뿐이었다.
순수한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한 시즈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미에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제야 벨라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전과 달라진 시선은 의심스럽다기보다는 신중하게 다시 확인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분은 누구시죠?"
아로스가 대신 대답하려던 찰나, 벨라미가 먼저 능청스럽게 끼어들었다.
"에이, 무녀님. 너무하시네. 난 무녀님을 처음 본 순간이 쉽사리 잊혀지지가 않는데?"
벨라미는 가볍게 웃으며 시즈를 향해 다가갔다. 시즈는 조금 전 아로스의 품에 와락 안겼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얼굴이 달아오르려 했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별 의미는 없습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을 뿐이에요."
"흠흠, 그러니까... 소개를 다시 하자면, 내 이름은 벨라미."
벨라미는 한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한 뒤,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태연하게 아로스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저 형씨랑 같이 이 꼬마 아가씨를 구해서 나왔지."
그러나 시즈는 여전히 따가운 시선으로 벨라미를 쳐다봤다.
"그보다, 아까 보니까 무녀님이랑 형씨...... 꽤 뜻깊은 재회를 하는 것 같던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니, 그냥. 보통 그런 눈빛으로 서로 마주 보는 사이는 흔치 않거든."
벨라미는 장난스레 턱을 쓰다듬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뭔가 깊은 인연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가......?"
"......!"
시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반사적으로 무어라 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 아로스의 품에 안겨 울었던 기억이 스치며 말문이 턱 막혔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저희는... 그저 여정을 함께하는 동료일 뿐이에요!"
짐짓 목소리에 힘을 주어 부정해 보려 해도,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귓가와 갈 곳 잃은 눈동자는 그녀의 말을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그런 시즈의 모습에 벨라미는 한층 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짓궂게 웃었다.
"에이, 무녀님.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더 수상한데? 아까는 아주 세상 무너질 것처럼 안기시더니만."
"그건... 너무 놀라서......!"
"그래? 이미 형씨가 어떤 사람인지 다 말해줬는데?"
당황한 시즈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아로스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지만, 야속하게도 아로스는 짐짓 딴청을 피우듯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무심한 태도에 오히려 더 민망해진 건 시즈였다.
결국 시즈가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획 고개를 돌리자, 그 모습에 벨라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풉―. 알았어, 알았다구. 더 이상 캐묻진 않을게."
벨라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아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로스의 시선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지난 보름간 많은 것을 도움 받긴 했지만, 난 아직 널 완전히 믿을 수 없어."
"아니, 형씨, 그건 좀 섭섭한데? 내가 뭘 어쨌다고?"
"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마치 대부분의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움직였지. 저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물론이고 너 또한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 그 태도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거 아닌가?"
아로스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공기가 달라지자, 벨라미는 짧은 침묵 끝에 피식 웃었다. 그는 폐허 구석 한편에 있던 부서진 상자에 등을 기대며 앉았다.
"하긴, 처음 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좀 그렇긴 해. 그런데 말이야, 형씨. 난 그저 살아남는 데 도가 텄을 뿐이야. 당신들이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난 그저 어떻게 하면 저놈 눈에 띄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만 생각했거든. 그리고, 내가 따로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보인 것도 없잖아?"
능청스러운 반문에 아로스가 무언가 더 말을 이으려던 순간, 기척을 숨기고 있던 에드바르가 갑자기 나섰다. 벨라미는 그의 등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듯, '아, 저 양반 또 나왔네.' 하는 표정으로 노골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벨라미와 달리, 싸늘하고 불길한 기운이 주변을 맴도는 것을 감지한 시즈는 본능적으로 미에르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오미누스 역시 부러진 칼날의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며 에드바르의 모든 움직임을 날카롭게 주시했지만, 에드바르는 그들의 경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곧장 아로스를 향해 턱짓하며 낮게 말했다.
"너, 잠깐 따라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