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
심연의 중심, 모든 소리와 빛이 질식하는 그 끝에서 모르티아는 여느 때처럼 거대한 뿌리 앞에 앉아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는 이제 자신의 기원조차 잊은 채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 찢어진 틈은 어느덧 심연의 정수인 검은 액체로 가득 차 넘실거렸고, 액체가 스며들 때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고통에 몸부림치듯 불길한 기운을 토해냈다.
그때, 지상에서 돌아온 울루니아 하나가 소리 없이 날개를 접으며 다가왔다. 여러 개의 관절을 가진 다리가 바닥에 내려앉으면서 곤충의 겹눈처럼 무수한 시선이 모르티아에게로 향했다. '페큘라'라 불리는 울루니아는 아직 심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르티아에게 있어 지상 곳곳을 염탐하는 충실한 눈과 귀였다.
"언제 봐도 변함이 없군."
페큘라의 목소리는 마치 여러 개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 기묘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그가 익숙한 광경을 바라보듯 무심하게 말하자 모르티아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여유롭게 응수했다.
"한결같은 자세가 좋은 거야. 갑자기 변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지."
모르티아는 찢어진 세계수의 뿌리를 어루만지듯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응집된 엘나의 기운이 부드럽게 퍼져 나갔고, 나무 조각들이 비명을 지르듯 빠그라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상처가 봉합되었다. 마침내 뿌리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자, 모르티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페큘라와 마주했다.
"그래서, 오늘은 뭐 좀 알아온 게 있어?"
"네가 말한 계획을 방해하는 자. 그놈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얻었지."
"그래? 어디 한번 들어볼까?"
모르티아는 오랜만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듯이 가면 아래에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형제들이 말한 칼날을 갖고 있는 걸로 봐서는 틀림없는 것 같더군. 그리고..."
"그리고 뭐. 뜸 들이지 말고 말해."
"검은 로브로 몸을 감추고 있어서 처음엔 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아주 작은 꼬맹이였다. 기껏해야 인간 기준으로 청소년 정도랄까."
"...뭐라고?"
순간, 모르티아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변을 감돌던 심연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방금... 꼬맹이라고 말했지?"
"그렇다."
"그럼, 여태껏 애새끼 하나한테 휘둘려 왔다는 거야?"
짧지만 강렬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모르티아가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자, 거대한 세계수의 뿌리가 그녀의 분노에 공명하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꿈틀거리며 뒤틀리는 뿌리가 주변의 대기를 울리면서 근처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심연의 생물들이 공포에 떨며 몸을 웅크렸다. 심연은 한순간에 숨을 죽인 듯, 불길한 적막에 휩싸였다.
페큘라는 잠시 뜸을 들이며 심연의 요동치는 기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곧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흥분하지 마라.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크흠......"
모르티아는 짧게 헛기침을 하며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래... 내가 약간 감정적이었네. 계속 말해 봐."
그녀는 감정을 다스렸지만, 가면 아래에선 여전히 용서받지 못할 모욕을 당한 듯 날카로운 시선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즈마와 함께 나갔던 형제들의 잔해가 인간들과 뒤섞여 령(靈)이 된 듯하더군. 뭐, 이건 너에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닐 테지만... 문제는 그 작은 인간이다."
페큘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놈은 령의 잔해에 닿았음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심연의 기운에 닿았는데도 멀쩡했다고?"
모르티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래. 나도 이유는 모르겠더군. 보통 인간이라면 그렇게 뒤집어쓰는 순간 진작에 녹아내렸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했지. 그리고, 놈의 칼날에서 네가 이곳으로 함께 떨어졌던 사자들이 지녔던 문양을 봤다."
"......!"
모르티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부러진 칼날이라 문양은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사자들에게서 봤던 문양이었다. 뭔가 짐작되는 게 있나?"
페큘라가 모르티아의 반응을 지켜보며 묻자, 그녀는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불의 심판.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던 그날. 보다 더 찬란한 자신의 문명을 세우려 했던 거대한 야망이 예상치 못한 규열로 무너져 내렸던 대재앙 속에서, 그녀와 함께 심연으로 추락했던 사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은 심연의 침식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거나 뒤틀린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자취를 감춘 루드레스. 몸을 숨기는 능력이 탁월했던 그는 심연에서도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던 암살자.
'그 꼬맹이가... 어떻게 루드레스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지?'
모르티아는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며 페큘라를 바라보았다.
"그 외에는, 뭔가 다른 것도 있나?"
"환시의 등불을 지닌 기사가 무녀와 함께하더군."
"......무녀?"
"그래. 그 무녀의 힘이 예사롭지 않아."
페큘라는 기억을 떠올리는 듯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15년 전에 봤던 아우로라의 고룡과 버금갈 정도더군. 어쩌면...... 지난번에 느껴진 벼락의 기운도 그 무녀의 힘일지도 모르지."
모르티아는 생각에 잠긴 채, 가면 아래로 가려진 검은 시선을 멀리 던졌다.
'용케 아직도 살아있었나.'
환시를 품은 자가 아직 죽지 않고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모르티아는 안도 했다. 그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는 한 세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연결고리는 유지될 것이다. 흐트러진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필연적인 흐름은 결국 원점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렇기에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는 쓰러져서는 안 된다. 그가 나아가는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모르티아였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불필요한 혼선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듯 침묵을 유지하더니, 이내 페큘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나중에 생각하지."
차분한 목소리 속에는 이미 정해졌다는 듯한 결론이 담겨 있었다. 아텐시아의 힘을 지닌 무녀가 끼어드는 것은 모르티아의 계획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대신, 그 꼬맹이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봐."
모르티아는 가면 아래에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조각 하나가 예상 밖의 움직임을 보일 때는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놈이 어떻게 사자들의 문양이 새겨진 칼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행동반경이 어떻게 되는지, 목적이 뭔지...... 사소한 것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을 가리지 말고 확인해 봐."
"명심하지."
페큘라는 짧게 대답한 뒤, 몸을 돌려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날개를 펼치면서 모르티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르티아는 검게 물든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끈적한 검은 액체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며 뒤틀린 뿌리의 결을 따라 스며들었다. 액체가 지나간 자리마다 어둠이 들러붙듯 스며들었고, 그녀의 시선도 그 깊이를 따라 천천히 가라앉았다.
오래전에 사라졌던 루드레스. 갑작스럽게 세상에 드러난 그의 부러진 칼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단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조각난 것들은 결국 하나로 모이기 마련이라는 것. 흐트러진 퍼즐도 맞춰지는 순간 형태를 드러내듯, 모든 움직임에는 흐름이 있었다.
모르티아는 천천히 손을 쥐었다. 검은 액체가 손가락 틈으로 스며들며, 묵직한 압박감이 손바닥을 타고 퍼졌다. 과거,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들은 모두 너무도 당연한 듯이 힘을 가졌고, 그 힘을 지닌 자들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아주 서서히.
그리고 이제는 무너질 틈이 완전히 벌어졌다. 균형을 지키려는 시도란, 결국 사라질 운명을 붙잡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여전히 과거를 쫓는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 하고, 흐려진 길을 돼 밟아 가려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필연적이었다. 그 과정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도 없었다. 균열을 틀어쥐고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그 균열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지켜봐야 했다. 모든 것은 반드시 거쳐야 할 길 위에 놓여 있으며, 결국 그 끝에서야 비로소 다음이 시작될 것이었다.
모르티아는 가면 아래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차갑고 눅눅한 심연의 공기가 폐를 채웠으나, 더 이상 이 공기는 그녀를 삼키지 못할 것이다
.
두 개의 심장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균형은 깨지고 새로운 질서가 태어나리라.
타다닥, 하고 마지막 불씨가 희미하게 사그라드는 소리.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동굴 안은 잿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새벽의 공기로 가득했다. 그 속에서, 시즈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일어나셨습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아로스임을 알 수 있었다.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던가. 그가 세웠던 보이지 않는 벽, 그 서늘했던 거리감이 떠올라 시즈는 저도 모르게 아주 잠시 숨을 멈췄다.
"...네."
짧게 대답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바위벽에 기댔던 등이 저릿하게 결렸다. 밤새 웅크렸던 탓인지 어깨와 등이 뻐근하게 뭉쳐 있었다.
맞은편에서는 벨라미가 깊은 숨소리를 내며 이끼 위에 파묻혀 있었다. 그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없이 푹 잠들어 있었으며, 그 옆에 잠든 아이들의 평온한 얼굴만이 이 동굴 안의 유일한 온기처럼 느껴졌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문득 느껴지는 낯선 허전함에, 시즈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미누스는요?"
"잠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 새벽에요?"
"예. 본래 혼자 움직이는 것이 더 익숙할 테니까요."
그의 대답은 건조했다. 정말 그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늘 혼자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그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낯선 땅에서, 그것도 새벽에 말없이 사라졌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 시즈는 짧은 고민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아직 어두우니, 조심하십시오."
그 한마디를 남긴 채, 아로스는 다시 시선을 모닥불의 남은 온기로 돌렸다. 더 이상의 관심은 없다는 듯한 그의 모습을 뒤로, 시즈는 차갑게 식은 옷깃을 여미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 밖의 새벽 공기가 칼날처럼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바다로 이어지는 강줄기 위로 옅은 안개가 유령처럼 깔려 있었고, 물결이 잔잔하게 출렁였다. 그믐달이 강물 위에 희미한 윤곽을 드리운 채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정말로 오미누스가 서 있었다. 시즈는 말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가볍게 인사를 건넸으나 그는 여느 때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오미누스는 원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침묵을 지키자 시즈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두 손을 모았다.
새벽은 언제나 기도의 시간이었다. 잔잔한 강물 소리,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바다의 숨결. 그 속에서 평온하게,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푸른 눈."
오미누스가 갑자기 입을 열자, 시즈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한 달빛이 오미누스의 옅은 흉터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랑 나, 둘 다 같은 벽안을 가졌어."
그 말에 시즈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오미누스는 여전히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벽안.
시즈에게는 익숙한 단어였다. 하지만 그 단어를 오미누스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푸른 눈을 가진 대부분의 인간은 태생이 아우로라였다. 그것은 오래전, 아우로라가 세워질 때 고룡 아텐시아와 아틸리엔이 선택한 자들에게 나타난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시즈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푸른빛을 띤 눈동자.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오미누스도 자신과 같은 아우로라와 연관된 인물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가운데, 오미누스가 시즈에게 질문을 던졌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가요?"
강물 위로 반사된 달빛에 비친 오미누스의 모습은 그동안 봐왔던 차가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모습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