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된 황금의 땅 (3)

메아리

by 이샤라

"......네 눈. 그 푸른 눈을 볼 때마다... 자꾸 뭔가 떠올라.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처음 그런 기분이 든 건 언제였나요?"


오미누스는 시즈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감각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늘 희미하게, 아주 오래전부터 곁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부르고 있는 것처럼.


"......잘 모르겠어."


짧은 대답. 하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없는 메아리. 잡힐 듯하면서도 손에 닿지 않는 감각. 멀어졌다가도 다시 스며들 듯 찾아오고, 잊었다 싶으면 어느 순간 또다시 떠올랐다.


"딱히 선명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


"부른다니... 어떤 식으로 말인가요?"


오미누스는 뭔가를 떠올린 듯 허공을 바라보았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몰라.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 전해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느껴져. 마치 메아리가 울리는 것처럼."


"그럼, 그 감각이 지금 더 뚜렷해졌나요?"


그 대답에 오미누스는 시선을 돌려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을 보고 있을 때, 희미했던 감각이 조금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던 그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뚜렷해졌다기보다는, 너에게서도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


시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우로라에도 가보셨나요?"


말이 떨어지자, 오미누스는 미묘하게 시선을 내리깔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강물 위로 반사된 희미한 달빛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즈는 그 침묵에서 깨달았다. 잘못된 질문이었다.


오미누스는 아우로라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아니, 그보다도 그곳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조차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곳에 발을 디뎠던 적이 있었다는 것. 조금 전까지 오미누스가 시즈를 보며 떠올린 감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 역시 그곳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셨던 거군요."


"그곳에서도, 너에게서도 비슷한 기운을 느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동일하진 않아. 같은 결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야."


"그렇군요......"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동안 강물 위로 부서지는 달빛을 바라보던 시즈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성녀 베레타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오미누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시즈는 그의 반응에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드릴까요?"


오미누스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즈는 그것이 거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으니까.


"전해지는 이야기는 많아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건......"


시즈는 희미하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마치 오래된 전설을 읊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빛이 닿지 않는 밤에도, 그녀는 아이들의 곁을 지킨다.


한 손에는 상처를, 다른 손에는 생명의 숨결을 쥐고,


잿빛 길을 걸으며 무너진 땅에 꽃을 심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자는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자는 없다.


오직, 가슴에 남겨진 깊은 흉터만이 그녀의 흔적을 증명할 뿐.


바람이 스치듯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도, 사람들은 오직 그 흉터만을 떠올린다.”



시즈의 목소리가 잔잔한 물결처럼 낮게 퍼져나가자, 오미누스가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그렇죠? 사람들 사이에서 성녀 베레타에 대한 소문은 다양해요.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고도 하고, 길을 잃은 아이가 기적처럼 다시 부모를 만났을 때, 어디선가 그녀가 다녀갔을 거라고 말하기도 하죠."


시즈는 다시금,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갔다.



"언제부터인가, 방황하던 아이들의 곁에 따뜻한 기운이 머문다.


메마른 손이 닿은 자리에는 한 줄기 온기가 남아 있고,


어둠 속에서 흐느끼던 목소리는 부드러운 자장가에 잠긴다.


평온을 되찾은 작은 생명이 마침내 누군가의 품에 안기면,


그녀는 조용히 발길을 돌려 어딘가에서 또 다른 길을 찾는다.


누군가는 그녀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맨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발자국은 한 줄기 바람처럼 사라지리니,


흔적을 쫓는 자는 끝내 길을 잃을 것이다."



말을 마친 시즈는 살짝 숨을 고르며 오미누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가끔 생각하게 돼요. 정말로 존재하는 누군가일까, 아니면 희망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그제야 오미누스는 천천히 시즈를 돌아보았다. 달빛이 닿은 그의 왼쪽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하지만 만약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녀는 아마도, 오랫동안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거겠죠."


시즈의 조용한 목소리가 새벽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오미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 강물의 출렁임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깊은 어둠을 담고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서 아주 미묘한 흔들림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 감정을 끝내 내비치지 않은 채, 오미누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예상치 못한 답변에 시즈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오미누스는 이내 몸을 돌리면서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난 먼저 떠날 거야."


시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오미누스는 잠시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더니, 대답 대신 다른 말을 남겼다.


"...동굴 왼편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강이 하나 나올 거야.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룻배가 몇 척 남아 있어. 그 배를 타고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협곡을 통과한 뒤, 계곡에 다다르면... 카노라스로 향하는 동쪽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오미누스는 품에서 작은 가죽주머니 하나를 꺼내 시즈에게 건넸다. 주머니를 열자 빵의 빛깔을 닮은 동그랗고 바삭해 보이는 작은 열매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달고 향기로운 냄새가 새벽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이게... 뭔가요?"


"하나만 먹어도 허기가 채워질 거야."


시즈는 예상치 못한 선물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소중히 잘 먹겠습니다."


오미누스는 별말 없이 수면 위에 비친 달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이어지던 강물의 잔잔한 흐름처럼, 그의 표정도 덤덤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희미하게 스며 있었다.


"...행운을 빌어."


오미누스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다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점차 멀어지는 뒷모습을 따라, 새벽의 어둠이 서서히 그를 삼켜갔다.


시즈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강물 위에 희미하게 반사된 달빛이 잔잔한 물결을 따라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은 멀어진 발걸음을 좇는 듯하다가도, 다시금 강가로 향했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피부를 스쳤지만, 움직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즈의 귓가에 오미누스가 했던 말이 아른거렸다.


'그 푸른 눈을 볼 때마다... 자꾸 뭔가 떠올라.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 전해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느껴져.'


오미누스는 살아오면서 여태껏 확실치 않은 것에 끌려왔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 감각을 따라다녔다고 했다.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시즈는 오미누스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빛이 닿지 않는 밤에도, 그녀는 아이들의 곁을 지킨다.'


'어둠 속에서 흐느끼던 목소리는 부드러운 자장가에 잠긴다.'


'누군가는 그녀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맨다고 한다.'


성녀 베레타.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존재로 전해져 왔다. 길을 잃은 아이들이 기적처럼 다시 부모를 만날 때, 사람들은 베레타가 다녀갔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베레타가 찾아다닌 것은 정말 길 잃은 아이들이었을까? 아니면, 그녀 자신이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헤맨 것은 아니었을까?


그 가능성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잃어버린 것. 그것을 찾기 위해 헤매는 것. 오미누스도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끌린다'라고 했던 것은 단순한 본능이 아닐지도 몰랐다. 기억이란 때로 머리가 아닌 영혼에 새겨지는 법이니.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상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또한 지워진 기억 너머의 온기를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가 아닐까.


그렇게 시즈가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동굴 안쪽에서 미세한 기척이 들려왔다.


아로스가 시즈의 곁에 멈춰 섰다. 그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뒤 오미누스가 사라진 어둠 쪽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묻기라도 할 듯했으나, 대신 한 차례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떠났습니까?"


조용히 던진 물음에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전에 떠났어요."


아로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잠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오미누스가 원래부터 혼자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만 새벽녘에 말없이 떠난 것은 단순한 습관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시 동안 서늘한 바람 소리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오미누스가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던 시즈의 시선이 천천히 강물로 향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귀공보다 더 차갑고 냉소적인 존재가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저렇게 떠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그보다 더 외로운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처럼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아로스는 대답 대신 조용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람이겠죠. 애초에 믿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혼자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어요. 결국은 떠났지만, 오미누스가 왜 저희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외로움은 혼자 있다고 해서 오는 감정이 아닙니다."


아로스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담담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안에 희미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가 외로운 이유는... 오히려 혼자 있는 데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의 말에 시즈는 더 이상 되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동쪽 하늘을 옅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여명의 빛을 바라보았다.


"...저희도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겠네요."


시즈는 더 깊은 생각을 뒤로 미루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로스도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감돌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동굴로 향했다. 동굴로 돌아오자 희미한 불빛이 깊은 새벽의 정적 속에서 바위벽을 따라 출렁였다. 그 사이에 벨라미가 깨어 있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아이들 위로 이끼 이불을 다시 덮어준 뒤 불씨가 남아 있는 장작을 조용히 헤집으며 타다 남은 나뭇조각을 천천히 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에 벨라미가 고개를 들었다.


"...결국 갔나 보네."


벨라미는 오미누스의 부재를 눈치채고도 놀라거나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짧게 말했다.


"그 친구, 어딜 가든 결국 혼자겠더군."


아로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시즈도 그 말에 쉽게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본론을 꺼냈다.


"벨라미, 이제 어쩔 생각이에요?"


그 물음에 벨라미는 조용히 타닥이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다시 잠들어 있는 두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참이나 아이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요 녀석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야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시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쪽이요?"


벨라미는 시즈의 반응을 보더니 어이없는 듯 바라보았다.


"아니 무녀님, 설마 애들 데리고 카노라스 갈 생각을 한건 아니지? 거긴 지금 죽은 자들의 땅이야. 나 같은 놈이야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이 어린것들을 그런 끔찍한 곳으로 끌고 갈 수는 없잖아.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래도 아직은 사람 사는 마을이 몇 개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곳으로 가봐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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