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청백리 손숙오 2
제7회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청백리 손숙오(孫叔敖) 2
손숙오의 등장
기록에 따르면 손숙오는 기사(期思, 지금의 하남성 신양시信陽市 회빈현淮濱縣 기사진期思鎭)라는 지방 출신이다. 촌놈이었다. 손숙오는 촌놈에 물과 제방 따위를 다루는 수리(水利) 기술자이기도 했다. 초나라는 평지와 물이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수리시설만 잘 갖추면 농지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과거 초나라 땅이었던 지금의 형주(荊州)에서 무한(武漢)에 이르는 수백 km가 모두 논이다. 이름 하여 강한(江漢) 평원이다. 손숙오는 수리 기술자로 곡창지대를 만드는 일로 중앙 무대에 데뷔했다.
외모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순자(荀子)》에 보면 “대머리에다 왼쪽 다리가 긴 짝다리라서 선 키가 수레에도 못 미쳤다.”고 되어 있다. 키 작고 머리 벗겨진 핸디캡이 상당한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손숙오를 재상 우구자(虞丘子)가 한사코 추천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고사가 전한다. 《열녀전(列女傳)》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번 보자.(《열녀전》은 한나라 때 사람 유향劉向이 편찬한 고대 부녀들의 다양한 행적을 기록한 귀중한 책이다.)
장왕에게 번희(樊姬)라는 왕비가 있었다. 번희는 총명했다. 나라의 큰일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탁월한 견해를 제기하여 장왕이 보물처럼 아꼈다.
어느 날 조정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장왕의 얼굴이 영 좋질 않았다. 번희가 걱정이 되어 “대왕, 오늘 무슨 속상하는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퇴정이 많이 늦으셨습니다.”라고 물었다.
“지금은 나라에 일이 많은 가을인데다 처리해야 될 일들이 산더미 같아서 재상과 이것저것 상의하느라 늦었소.”
“재상이라면 누굴 말씀하시는지요?”
“우구자(虞丘子)이지요.”
“달빛이 밝으면 별들이 에워싸지요. 우구자가 유능하긴 하지만 혼자인데다가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주 유능한 재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왕는 번희의 이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왕비께서 보시기에 어떤 사람이 유능한 재상입니까?”
“열 걸음 이내에 풀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넓은 초나라에 뛰어난 인재가 없겠습니까? 우구자가 대왕께 이런저런 인재들을 추천하여 나랏일을 돕게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튿날 조회 때 장왕은 번희의 말을 우구자에게 전했다. 순간 우구자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즉각 장왕에게 손숙오를 재상으로 추천하며 자신은 물러나겠다고 했다.
도면. 손숙오 등장에 극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장왕의 왕비 번희
재상 손숙오의 공사분별
손숙오가 재상으로 임명된 지 얼마 뒤 골치 아픈 사건 하나가 터졌다. 자신을 추천한 우구자 집안의 한 사람이 국법을 어겨서 엄벌을 받게 된 것이다. 담당관은 나라의 재상을 지낸 우구자의 공을 생각하여 판결을 미루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손숙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왕자가 법을 어겨도 서민들과 같은 처벌을 받는다. 우구자가 나라에 공이 있다고 해서 법을 어긴 그 가족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겠는가?”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체포하여 머뭇거렸던 그 담당관에게 처리하도록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초나라 백성들은 모두 감탄했고, 순식간에 전국에 상벌이 분명하고 정치가 투명해지는 상황이 나타났다. 장왕는 바로 우구자를 불러 “그대가 좋은 인재를 추천한 덕분이요. 공적부에 그대의 공을 맨 위에 올리겠소.”라며 고마워했다.
우구자는 황망히 무릎을 꿇으며 “대왕, 손숙오는 원래부터 사적인 정에 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권세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인재입니다. 지난 날 제가 그를 제 때 추천하지 않은 저의 잘못이 큽니다!”라고 했다.
장왕도 황급히 몸을 일으켜 우구자를 부축하며 “그건 그대의 겸손입니다. 그래도 결국 유능한 재상을 추천하지 않았습니까?”라며 위로했다. 우구자는 “대왕, 진짜 인재를 추천한 사람은 제가 아니가 번희 왕후이시지요!”라고 했다. 장왕은 “그렇지요! 내 어찌 속 깊은 부인의 공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크게 웃었다.
당나라 때 시인 장열(張說, 667~730)은 이 고사를 두고 “초나라가 패주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번희의 힘이었다.”라고 논평했다. 번희의 지혜와 식견에 대해서는 이 이상의 말이 필요 없겠다. 다만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번희도, 장왕도, 우구자도 나라를 반듯하게 서고 강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좋은 인재가 필수라는 사실을 바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청백리의 모범 손숙오는 이렇게 초나라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손숙오의 정책 건의법
말을 좋아했던 초나라 장왕은 수레도 높은 것을 타고 싶어 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배기량이 큰 고급 승용차를 타고 싶었던 것이다. 바퀴가 작고 낮은 ‘비거(畀車)’라는 수레는 위엄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규격화되어 있는 수레의 바퀴를 다시 바꾸면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되고 여러 가지 귀찮은 일들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높에 은 수레를 타고 싶어 하는 왕의 생각에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고, 또 당장 수레바퀴를 크게 만들자니 백성들 불편이 만만치 않으니 손숙오의 고민이 적지 않았다. 고민 끝에 손숙오가 내놓은 해결책은 이랬다.
손숙오는 장왕에게 성문이나 관청 등의 문지방 턱을 높이라고 건의했다. 이 정도라면 백성들에게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지방의 턱을 높이면 결국은 작은 바퀴를 가진 수레는 수레 밑이 긁히거나 수레가 크게 흔들리는 등 턱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들은 알아서 수레바퀴가 큰 수레로 바꾸었다.
이렇게 손숙오는 백성들이 스스로 불편함을 느껴서 생활을 바꾸고 정책에 따르게 하는, 즉 순리(順理)의 정치를 할 줄 알았던 공직자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기 않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최고 통치자의 눈치만 보는 사람과 백성들의 입장에 서서 정책을 내는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만약에 손숙오가 최고 통치자의 기분만 맞추려고 덜컥 높은 수레를 만드는 정책을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백성들의 원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지방은 큰 일이 아니고,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럽게 적응하려면 수레바퀴를 높이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당장 수레바퀴를 바꾸는 것과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였지만 일의 순서와 우선 순위를 누구에게 두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손숙오는 문지방 턱을 높이는 것이 먼저이고, 그래서 높은 수레를 만든데 시간은 걸릴지라도 백성들이 그 정책을 편안하게 따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직자로서 자신의 원칙을 보여준 것이다.
도면. 손숙오를 믿고 국내 모든 정책을 위임한 초 장왕
여운: 손숙오의 유언이 던지는 메시지
평생 장왕을 보필하여 초나라를 일약 강국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 손숙오가 깊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죽음을 예감한 손숙오는 아들의 손을 잡고 “내가 죽으면 왕께서 땅을 내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절대 좋은 땅은 받지 마라. 초와 월의 경계에 있는 침구(寢丘)라는 땅을 받겠다고 해라.”는 유언을 남긴다. 평생 나라에 봉사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상을 내린다. 훈장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받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손숙오는 아들에게 받긴 받되 침구라는 땅을 주십사 청하라고 했다. 침구라는 땅은 거의 쓸모가 없는 황무지 같아서 힘들여 개간을 해야 근근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럼 손숙오는 왜 이 땅을 받으라고 했을까? 우선 아들은 백성과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좋은 땅을 받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들이 좋은 땅을 받으면 그것을 유지하기 힘들다. 사람들의 이목이 아들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땅을 빼앗기고 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럼 집안 전체가 화를 입는다. 손숙오는 이런 점까지 내다보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그런 땅을 받으라고 한 것이다. 부모만큼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나.
앞에서 말했던 손숙오의 기본 철학이 뭐였던가? 시기, 질투, 원한 이 세 가지를 피하고 살아온 사람 아닌가. 아무튼 아들도 손숙오의 유언을 따랐고, 기록에 “아직도 그 땅을 잃지 않고 있다.”고 했다.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근근이 집안의 생계를 유지할 정도이긴 했지만 누가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도 없었다. 자식의 자질과 능력을 잘 알았던 손숙오였기에 이렇게 집안의 뒷날까지 대비했던 것이다. 자질도 안 되고, 능력도 없으며 인간도 덜 된 자식에게 분에 넘치는 재산을 어떻게든 물려주려는 우리 기득권 계급의 행태와 얼마나 대비되는가?
청백리 손숙오에 대한 평가
손숙오는 법가의 대표적인 책인 《한비자(韓非子)》에도 출연한다. 해당 대목은 이렇다.
“허술한 수레를 타고 암말을 끌게 했다. 현미밥에 나물죽, 물고기 반찬을 먹으며 겨울에는 염소가죽, 여름에는 갈포를 입었는데 쳐다보면 꼭 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훌륭한 대부였지만 검소함이 지나쳐 아랫사람이 부담스러워했다.”
2천 수백 년 후의 사람인 제갈량도 “3년을 타고 다닌 수레를 모는 말이 암컷인지 수컷인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두 말이 필요 없는 사람이 바로 손숙오였다.
사마천은 <순리열전>에서 손숙오의 정치와 정책을 이렇게 간결하게 논평했다.
“손숙오는 초나라의 처사(處士)였다. 재상 우구(虞丘)가 장왕에게 자신의 후임자로 그를 추천했다. 그는 석 달 만에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정책을 실행하고 백성을 선도했다. (그 결과) 관료들이 평화로이 단합하고, 풍습은 아주 훌륭하게 유지되었다. 정치가 느슨해도 단속하는 대로 지켜졌고, 사사로이 갈취하는 하급 관리가 없었으며, 도적떼도 생기지 않았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에게 산의 벌목을 권장했고, 봄과 여름에는 강물을 이용해 운반하게 했다. ‘사람마다 각자의 편익을 얻게 되면서 백성들이 모두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위 ‘사람마다 각자의 편익을 얻게 되면서 백성들이 모두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다는 대목은 ‘각득기소편(各得其所便), 민개락기생(民皆樂其生)’이란 명언으로 남아 전하고 있다. 그 결과 백성들은 당연히 즐거운 생활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명언은 재상으로서 손숙오의 정치와 정책을 칭찬하는 말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고대 백성들이 바라던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사마천은 손숙오의 정치와 그 인품을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이렇게 평가했다.
가르치지 않아도 백성이 그 교화에 따르는 바,
불교이민종기화(不敎而民從其化),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 모습을 보며 본받으며,
근자시이효지(近者視而效之),
멀리 있는 사람은 사방에서 그를 바라보며 따른다.
원자사면망이법지(遠者四面望而法之).”
손숙오는 청백리였을 뿐만 아니라 초지일관 백성들을 위하는 정책 실행자, 권력과 진퇴에 초연한 담담함, 확고부동한 공사분별의 자세를 평생 지킨 유능한 관리이기도 했다. 손숙오는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청백리임은 물론 모든 면에서 ‘청백리의 모범’ 그 자체였다. 이런 점에서 손숙오의 존재는 권력자 장왕과 초나라의 큰 축복이었고, 또한 중국 역사의 빛나는 한 장면이었다.
도면. 호북성 형주시 중산(中山) 공원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청백리 손숙오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