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1

by 할미꽃

막내 오빠는 아버지 오른쪽에, 나는 왼쪽에 누워 아버지 팔을 끌어다 베고 눕는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에…”

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면 언제나 이렇게 시작하셨다.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하실 때면, 오빠와 나는 아버지 얼굴을 서로 차지하려고 애썼다

아버지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는 아버지 볼에 손을 얹어 내 쪽으로 돌린다.

그러면 오빠는 금세 자기 쪽으로 다시 돌려놓는다.

우리 남매 등쌀에 아버지는 오른쪽, 왼쪽 도리질을 하시느라 이야기를 잇지 못하시곤 했다.


우리 아버지가 벌을 내리시는 방법은 독특했다.

물이 가득 담긴 물대접을 두 손으로 들고 꼼짝없이 앉아 있게 하셨다.

오빠들이 그 벌을 받을 때면 늘 나를 파수꾼으로 세워 놓고,

아버지 눈길이 멀어지면 물대접을 내려놓고 있다가,

내가 손짓을 하면 다시 살그머니 들어 올리곤 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벌을 받은 일이 없다.


오빠들은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늘 나를 앞세웠다.

아버지가 내 부탁은 언제나 잘 들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부탁이 거절당한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내가 자란 곳인 용두동에 경춘선 시발역(始發驛)이었던 성동역이 있었다,

그 건너편에 나지막한 상점들이 조르르 줄지어 있었고 그 가운데 ‘성동백화점’ 이 있었다.

이름은 백화점이지만 규모는 조금 큰 상점 같았다.

다른 가게에는 없는 큰 유리창이 있었고 안이 환히 드려다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조그만 빨간색 꽃들이 옹기종기 달려있고 챙이 넓은 까만색 모자가 창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여러 날 그 앞에서 서성거렸다.

벼르다가 아버지 손을 끌고 그 앞에 가서 손가락으로 그 모자를 가리키며 사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내 손을 잡고 햇볕이 따가운 양지에 앉으셨다.

그리고 두꺼운 돋보기 아래에 까만 종이를 놓았다.

햇빛이 모이자 종이에 불이 붙었다.

구멍 난 까만 종이를 접으시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보았지, 까만색은 빛을 빨아들이거든, 그래서 여름에 까만색 모자는 안돼. 다음에 하얀색 모자 나오면 사주마”

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여섯 살 어린아이였지만,

나는 아버지 마음을 알아들었다.

그래도 그 까만색 넓은 챙 모자가 내 삶의 길 어디엔가 숨어있었던 것일까.

그 대여섯 어린아이가 할머니가 되어서,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

모자를 사러 나갔다가 그 모자를 다시 보았다.

나는 서슴지 않고 그 모자를 샀다.

잊고 살아온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찾았다.

6·25라는 조국의 시련 탓에,

뒷모습을 한 장의 그림처럼 남기고

열다섯 소녀의 곁을 떠나가신 내 아버지!



오늘도 빌딩 샤이 좁은 틈새에 끼어앉아 머무는 발걸음 앞에 공짜 차 한 잔에 비싼 감사를 얹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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