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마음들이 머물다 간 자리

by 할미꽃

몇 년 전 방영된 것이라도 좋다.

일 주일에 한 두번씩 연재되는 연속극을 하루 이틀 만에 다 몰아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오늘도 하루종일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다.

70대 노인이 발레를 배워가는 이야기 속에, 삶의 아픔과 희망,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용기, 그리고 때늦은 사랑의 발견 등 여러 가지 마음들이 그물처럼 짜여 있었다.


노인이 어렸을 때, 우연히 발레 연습실 창살 안을 들여다 보게 된다. 공중을 날아오르는 발레리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꿈이 싹 텄다. 하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밥벌이가 안 될 거라는 이유로 그 꿈은 싹트자마자 멈춰버리고 만다.


정년 퇴임을 한 노인의 나날은 무료하기만 하다. 그나마 술 한잔 기울이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던 친한 친구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무료함은 더해간다.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늘을 보며 서성이던 발걸음이 어느 발레 연습장 앞에 멈춘다. 창 너머로 한 마리 커다란 새가 공중으로 날아 오르는듯한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의 꿈이 꿈틀대며 다시 고개를 든다.

어렵게 허가를 받아 연습장에 오르지만, 칠십 노인의 장작개비처럼 굳어진 팔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동작 하나하나를 수첩에 꼼꼼히 그려놓고, 거울 앞에서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거듭한다. 멍든 자리에 파스를 붙여가며 숨가쁜 노력을 하건만, 정작 연습장에 나와서 내뻗는 두 팔은 여전히 어설프고, 발끝은 균형을 잡지 못해 바들바들 떨린다.


노인이 파스를 붙이는 거울 속에 내 모습도 있었다.

글 한 줄 붙잡고, 사전을 수없이 들춰보며 썼다가는 지우고, 붙였다 떼었다 하며 씨름 끝에 내놓는 글 한 조각.

보이려는 진심은 잘 보이지 않고 억지와 어설픔만 도드라져 보일 때가 많다.


백발의 노인이 발레를 배우겠다고 나설 때,

가족들과 스승으로부터 멸시 섞인 시선을 받는다.

“그 나이에 왜 발레를 배우려고 해요?”

노인은 대답한다.

“나도 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어서.”

그 짧은 한마디에 고되었던 지난 삶과 노후의 허허로운 마음이 짙게 묻어났다.


나도 그랬다.

세상에 글을 올려 보겠다고 했을 때, 내 주위의 시선도 달갑지만은 않았다.

펼쳐져 있는 책도 덮어야 할 나이에, 이제 새삼 무슨 책장을 여느냐는 눈빛이었다.

눈앞에 할 일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길 위의 기억들을 되새김질 하면서 살다가, 문득 그 마음들을 하나둘 주워 몸 밖으로 내보이고 싶어졌다.


주인공과 나는 ‘노인’이라는 공감대에 서서 같이 애타하고 같이 울었다.


노인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젊은 청년의 말씨가 늘 거칠고 투박하다. 그런데 나는 그 말씨 속에서 이상하게도 연민을 느꼈다. 아버지의 무정함이 원망스럽고, 세상에 없는 엄마가 보고 싶고, 친구의 질시가 두려워 아무에게나 대고 투정 부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내 딸이 내게 하는 말투도 늘 상냥하지 않다.

자식들마다 성격이 다르니 그러려니 하며 탓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그 말투가 성격이 아니라 ‘마음’인 것을 알았다.


“엄마는 늘 오빠만 알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에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똑같은 자식인데 그럴 리가 있었겠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니었더라도 딸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이 딸에게는 사실일테니까.

가장 가까운 부모 자식 사이라지만, 마음이 온전히 건너가기엔 그리 가깝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드라마 속 청년은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비로소 아버지 마음을 알게 되었고, 말씨에도 온기가 서렸다.


내 딸도 어느 날 문득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오늘은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서 타인의 아픈 마음만 졸졸 따라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