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가서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되도록 많은 것을 탐색하고 싶었다.
항상 눈을 뜨고 있으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뭐든지 유익할 수 있고, 내가 미처 몰랐던 것을
가르쳐 주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가 좀 고리타분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젊은 작가.
좋든, 나쁘든, 다른 방식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원기 왕성했고, 머리는 착상으로 가득 차서
터질 것만 같았고, 발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근질거렸다. 세상이 얼마나 넒은가를 생각하면, 안전한 곳에 편안히 들어앉아 있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폴 오스터 < 빵 굽는 타자기> 열린 책들.
많은 작가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일과 병행하는 생활을 가진다.
빵 굽는 타자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작가들은 대부분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생계에 필요한 돈은 본업으로 벌고, 남는 시간을
최대한 쪼개어 글을 쓴다.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 주말이나 휴가 때.
윌리엄 칼러스 윌리엄스와 루이 페르디낭 셀린은 의사였다. 윌리스 스티븐스는 보험회사에 다녔다.
T.S. 엘리엇은 한 때 은행원이었고, 나중에는 출판업에 종사했다.
나무 또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두 가지 마음이 거의 매일같이 전쟁을 벌인다. 내가 선택한 이 일을 오래 지속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그 하나였고, 반대편 마음에는
이제는 나의 글, 내가 생각하는 예술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언제나 저울질 위에 올려져 있다.
주말이나 퇴근 후 노트북 앞에 앉아 몇 시간씩 두 마음을 타협해 보려는 시도도 수 차례 했었지만 꽂히면
한 가지에 전력을 다하는 성격 탓에 분분히 실패로 돌아간다. 얼마 안 남은 20대 끝자락 끝에 고민에 고민을 하며 머릿속으로 동경과 상상만 해왔을 뿐 제대로 발을 담가본 적은 없는 그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후회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결실이 되어 생각만 가지고 있던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끝끝내 외면할 수 없어 결국 난 저울 위에 올라가 있는 그 마음에 손을 잡기로 한다. 한번 마음을 먹으니
생각에 바퀴가 달린 것 마냥 멈출 생각이 없다.
경숙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족은 나무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들이다.
특히 그중에서 경숙은 유독 자주 등장한다.
나의 웃음, 나의 눈물버튼, 나의 사랑이 되는 경숙은
나의 영원한 앙숙이다. 우린 서로를 사랑하지만
때때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상처 주고 미워한다.
어쩌면 그래서 나무가 경숙에 관해 글을 쓰는 이유 일 것이다.
더 절 이해하기 위해. 나무가 써야만 하는 이유.
그렇게 나무는 책상 위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간다.
30살 경숙은 엄마가 되는 선택을 했고
30살의 나무는 작가가 되는 선택을 했다.
경숙의 선택에 지금의 나무가 작가라는 꿈을 꾸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기에 깊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나무는 글을 쓰는 순간에 경숙을 가장 많이 생각한다. 나무는 가지 못할 길을 경숙은 잘도 걷고 있어 경숙은 나무에게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경숙은 불경기로 어려워진 현시대에 어렵게 붙은 시험에 합격해서 잘하고 있는 일을 자꾸만 그만두려는 자신의 딸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에게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하지만
나무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이미 한번 정한 마음을 번복하고 싶지 않은 나무다.
나무 나름대로 어렵게 고민해 보고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일을 대책 없게만 여기는 경숙의 태도에 나무 또한 야속하게 느껴진다.
나무 또한 그런 경숙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무는 경숙의 그런 불안과 걱정이 답답하다.
“ 나 진짜 잘 해낼 수 있는데…“
“ 나 진짜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 나 진짜 고민 많이 하고 내린 결정인데…“
나무의 노력을 경숙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경숙이 아직 잘 모르는 것이 있다.
자신의 딸이 얼마나 용감한지…
자산의 딸이 얼마나 모험적인지…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 딸을 가두는 게 얼마나
딸에게 곤욕인지… 얼마나 딸을 우울하게 하는지…
자신의 딸이 얼마나 야망이 넘치는지…
루이제 린저의 < 삶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를 묘사한 부분이 나무와 닮았다.
“그녀는 집시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삶은 잠정적이었다.
한 군데에 천막을 치고 한 동안 살면서 정성을 쏟다가
그곳에 대해 알 듯하면 망설임 없이 천막을 거두고
그곳을 떠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야생적 자유에 대한
행복감과 고향 없는 사람의 슬픔이 함께 있었다. “
나무의 인생에 중요하고 표현하고 있다고
느끼는 건 글과 여행뿐이다.
글과 여행은 그녀의 정체성이다.
글과 종이로 안전하게 묶어둔 마음을
여행으로 풀어헤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했다. 나무가 그것들 속에 얼마나 반짝이며 빛을 내는지 경숙은 모른다. 나무가 경숙을 다 알지 못하듯
경숙도 자신이 배 아파 낳은 나무지만 잘 알지 못한다.
우린 서로 잘 모르기에 많이 싸우고, 배우며, 성장하고, 사랑할 수 있다. 나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
경숙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딸을 낳았는지
경숙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꼭 성공하고 싶다.
경숙의 자랑이 되고 싶으니까.
경숙의 희망이 되고 싶으니까.
그리고 그녀에게는 딸이 둘이라는 걸.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오노 요코.
그러니 혼자만의 꿈이 아닌 모두의 현실이 될 것.
하지만 현실은 마음과 반대로 걷는다.
글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늘 굶주린다는 의미다.
많은 돈을 벌기에는 꽝인 직업이 바로 작가다.
가난과 굶주림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녀야 하는
예술의 길에 끈기와 용기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직업. 그 험난한 길을 자발적인 의지로
걸으려는 딸을 반대하는 건 부모로서 당연지사다.
나무는 어릴 때 슬플 때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자주 울었다. 지금도 혼자 자주 울지만 이제는 글을 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베개 대신 책상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형태로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
우는 소리는 오직 글 속에서만 울려 퍼진다.
취미로 글을 쓸 때는 별 어려움 없이 그저 재미있게
쓰였는데 생계에 적용하려고 하니 잘 쓰고 싶은
욕심에 조바심이 생겨 오히려 잘 안 써진다.
나무는 매번 책상 앞에 앉아 좌절하며 마른세수를 반복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이런 글을 찾아 읽는다.
이를테면…
친애하는 예술가들이여,
우울의 반대는 기쁨이 아니라
‘ 표현‘ 임을 기억하세요.
그러니 창조하고, 창조하고, 또 창조하세요.
그것이야말로 영혼을 위한 약이니까요.
-앤디 워홀.
또 이런 글.
완벽주의를 이겨내는 법:
- 형편없는 작품을 만들어라.
- 그것을 매일 반복하라.
그래. 못써도 꾸준히, 계속 써 내려가자.
부끄러워도 세상에 발표해 보자.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 적나라하게 평가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열심히 꾸준히 쓰다 보면
글이 쌓이고, 쌓여 훌륭한 작품이 되어 있겠지…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처럼
나도 언젠간 그런 글을 쓰는 날이 오겠지…
영화 < 꿈의 제인>에 이런 대사가 있다.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 월드에서.
나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르게 해석한다.
자, 포기하지 말고 힘겹게 계속 계속 써봐.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여기, 책상 앞에서
나무는 그렇게 꿈에 날개를 달아준다.
자신이 결코 상상해 보지 못한 세계로
멀리, 높게 날아가라고.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게.
날개 달린 글이 노트북이 아닌 근사한 책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날 수 있게.
가수가 자신의 노래 안에 깊이 잠식되듯
나무도 자신의 글 속에 깊이 빠져든다.
책상에 앉아 자신을 쏟아낸다.
글 속에서 황홀하게 무너진다.
상상의 파도에 휩쓸린 채 힘 없이 떠내려간다.
절망은 뜯기고, 희망의 새 살이 돋아난다.
용감한 자아가 글이 되는 아름다운 시간에
나무는 비로소 행복해진다.
어둠 속에서 삶이 비범하게 반짝거린다.
자신의 노트에 적은 메모.
삶을 아름답게 포착하는 법.
어둠이 무너질 때
책상에 앉아 있기
내게 가장 먼 여행이자 산책
미지의 세계는 숭고하다.
그래서 독서는 비밀스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