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의 빌딩 숲이 떠올랐다. 나는 어째서 맨해튼 섬의 중간 지역에만 고층 건물이 모여 있고, 낮은 건물들은 죄다 가장자리에 가 있는지 늘 궁금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간 지역의 기반암이 지표면 가까이 올라와 있어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튼튼한 토대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하워드는 이것을 아래처럼 정리해 준다.
“가장 단단한 땅 위에 경력의 토대를 쌓아야 해.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잘하는 일에 집중하지. 대신 자신의 취약한 영역에는 뛰어난 사람들을 두어 최대한 보완해 가면서.”
선임팀원이던 시절 대출을 실행한 기업이 있었다.
대출금액도 100억이었으니, 지방지점 규모에선 꽤나 큰 금액에 속했다.
이 회사와는 대출취급하기 전 재밌는 일화가 있었다.
지점 입장에선 신용등급이 뛰어나면서도 업종이 국가적으로 육성되어야 될 소재·부품 산업이라 자금수요만 있다면 바로 작업 들어가고 싶었다.
더구나 시장규모가 끊임없이 확대 중이라 더욱 탐이 나는 업체였다.
우리와는 공장을 담보로 이미 대출된 금액이 있는 상태였으나, 회사 규모대비 거래금액이 크지는 않았다.
어느 날, 회사 실무자와 통화를 하게 됐다.
“부장님, 필요한 금액 이야기 해보시게요”
“음, 은행에서 먼저 제안해 보시겠어요? 지금 제시해 준 금리로 얼마만큼 가능하신지?”
그때, 내 머릿속에는 처음 논의한 100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은행 특성상 우량등급의 우량자산 확보는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이번 참에 한 건, 통 크게 하고 싶었다.
빠르게 금리 등의 대출 조건을 검토하고서 전화기를 들었다.
약간 흥분됐으나, 전화상 차분한 척 말했다.
“500억 어떠세요? 같은 금리로 저희 쪽에선 500억까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 그렇게 많이요? 그게 가능해요? 저는 그 정도를 생각지도 못했는데..”
회사는 결국 나의 제안을 수용하진 못했다.
그만큼 자금수요가 크지도 않았을뿐더러 최대한 보수적인 자금관리 등으로
이번에는 100억만 차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며칠을 작업해 대출은 실행되었다.
실행되는 날 다시 실무자와 통화했다.
“대표님이 늘 미국에 계시잖아요. 제가 회사 담당한 지 2년이 넘었는데 얼굴 한번 못 뵈었어요. 기회가 되면 한번 뵙고 싶습니다.”
부장님은 마침 대표님이 한국에 와있다 했고 운이 좋게도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약속날. 생각보다 연세가 있었고 얼굴은 인자해 보이는, 동네에서 흔하게 마주칠 마음 좋은 어르신 같으셨다. 그런데 이야기를 풀어내시는 게 그간 보아온 여러 경영진과는 사뭇 달랐다.
상대방을 배려하며 화제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어느새 나를 대화 속에 몰입하게끔 했다.
간간히 비치는 미소와 상대방에게 던지는 질문은 실제로 공감하며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런데 놀라웠던 건 그다음의 질문이었다.
제가 상상하는 거 하나 말씀 드려도 될까요?
그 자리에는 지점장님과 팀장도 함께 했었다.
방금 전 대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상상하는 거’에
우리 셋은 도대체 어떤 말씀을 하시려고 저런 말씀을 하시나 했다.
호기심 가득 대표의 입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보기엔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될 것 같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요새 드는 고민 하나가 있는데요. 최근 직원 수가 10명 채 안 되는 대만 업체 하나를 인수하려고 했었습니다. 제가 엔지니어 출신이다 보니 인수 검토하는데 꼼꼼히 따지다가 그만 중국기업이 먼저 채 가버리더군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땐 좀 더 과감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일본 소재 회사 중 흔하게 듣는 회사들 몇 개가 있습니다. 이런 회사들은 설립된 지가 기본이 100년이 넘는 회사들이에요. 이들로부터 저희는 소재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재사업은 그 회사 매출액의 10%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사업부입니다. 거대한 그들에겐 중요도가 떨어질지 모르겠으나 저희 회사와는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사업부지요. 요새 이 사업부를 인수하면 어떨지 하고 고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수 금액이 1,000억 정도 될 것 같은데, 은행에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꿈틀거렸다.
곧바로 지점장님의 고객맞춤형 의견을 비롯해 팀장님의 분석적 의견을 대표 앞 전달했다.
결론적으로 회사가 원한다면 우리가 답을 찾아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나도 거들었다.
“사실, 제가 대표님 뵙고 싶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요.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씀 주신 요청은 은행 내 협업할 수 있는 부서가 있으니 충분히 검토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광주라는 지방도시에서 OO 회사처럼 세계시장을 무대로 뛰겠다는 회사를 돕는다는 건 은행의 설립목적과도 일치합니다. 말씀 주신 요청사항을 은행 본점만이 꼭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지점에서도 대응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며 가끔은 진지했던 미팅은 끝이 났다.
재미있었다.
일이긴 하나 이런 미팅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왜 그랬던 걸까?
여기에 다 담지 못했으나, 회의에 참석한 누구 하나 기계처럼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나를 포함해 각자의 스타일대로 이야기를 나눴기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향기를 품는 것 같다.
선문답처럼 대화를 이끌다,
갑작스럽지만 강렬한 한방으로 좌중을 몰입하게 한 대표의 모습이 오랜 시간 인상 깊다.
회사 측 관계자들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깜짝 발표였기에 참석했던 다른 임원분이 수위를 조절하긴 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의견차를 조율하는 모습도 어쩌면 권위적이지 않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