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일의 휴가>를 보다가 한 대사에서 마음이 멈췄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우울증 때문에 신경 정신과에서 진료받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주인공 : 자다가 갑자기 깨요. 깨면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요. 감당이 안 될 만큼.
의사 : 기억이라는 게 어찌 보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연료 같은 겁니다. 좋은 기억들이 많이 쌓이면 아주 고급 휘발유를 채운 승용차처럼 잘 달리는 거고 나쁜 기억들은 불량 휘발유처럼 삶을 덜컹거리게 만들고요.
우리는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정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저와 제 동생은 어린 시절의 많은 기억을 공유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제 기억과 생생한 동생의 기억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기억은 제게 유리하게 왜곡되었고, 동생의 기억은 동생이 유리하도록 수정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편파적입니다.
그리고 기억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또 다른 점이 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도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의식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도 있지만, 무의식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도 있습니다. 몸에 각인된 과거의 흔적도 있고, 현재의 습관, 태도, 감정에 남겨진 흔적도 있습니다. 이 모든 과거의 흔적도 내가 직접 의식하지 못할 뿐, 모두 과거의 흔적이 남긴 기억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억들은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기억은 과거로 되돌아가서 머물게 하는 타임머신이 아니라, 영화 속 의사의 말처럼 내가 지금 여기에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결정하는 연료입니다. 물론 이 말을 거부하고 싶은 분들도 있겠죠. 기쁘고 즐거운 기억보다 슬프고 괴로운 기억이 많은 분들은 당황스럽고 억울할 수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일을 바꿀 수도 없는데, 안 좋은 기억이 많은 이들은 팔자려니 하고 덜컹거리는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있습니다.
기억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연료라는 비유를, 요리사가 요리해야 하는 식재료라고 바꿔 생각해 보겠습니다. 최근 엄청난 인기를 끈 흑백요리사에 한 가지 특이한 요리대결이 나왔습니다. 편의점 미션입니다. 편의점에 파는 재료만을 가지고 요리를 만드는 것이죠. 편의점에 있는 식재료는 맛있고 멋진 음식을 만들기에는 너무 부실하고 형편없습니다. 마치 삶을 덜컹거리게 만드는 불량 휘발유 같습니다. 그러나 실력 있는 요리사들은 편의점 식재료만을 가지고 맛있고 멋진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요리 실력만 있으면 편의점 식재료도 충분히 괜찮은 식재료가 됩니다. 좋은 차는 굳이 고급 휘발유 없이도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운전사가 운전만 안전하게 잘하면 그 어떤 차라도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기억들이 대부분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 기억들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우리가 실력 있는 요리사라면 충분히 맛있고 멋있는 인생의 요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이미 충분한 기억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맛있는 현재라는 음식을 만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