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가 필요한 조금 나이 많은 "어린 왕자"들에게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by 세미한 소리

지난 3월 독서 모임에서 <어린 왕자>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읽은 책이었지만, 마치 처음인 것처럼 새롭게 발견한 내용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책의 머리말이었습니다.


레옹 베르트에게

이 책을 어른에게 바친 데 대해 어린 독자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그 어른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무엇이든 이해하는 사람, 어린이를 위한 책까지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도 있다. 그는 지금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 그에겐 위로가 절실하다. 이런 이유로도 충분치 않다면 이 책을 어린 시절의 그에게 바치고 싶다. 어른도 한때는 어린이였다. (어른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내 헌사를 이렇게 수정하련다.

어린 소년이던 레옹 베르트에게
(어린 왕자, p7)


생텍쥐페리는 비평가이자 자신의 친구인 레옹 베르트에게 이 책을 바쳤는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생텍쥐페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바로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출신이었던 레옹 베르트는 프랑스를 벗어나지 못했고,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 숨어 살며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친구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써서 헌사했습니다. 이 사연을 알고 <어린 왕자>를 읽으니까, 더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친구 레옹 베르트를 응원하는 목적이었다면, 왜 굳이 동화로 썼을까? 동화 대신 소설이나 에세이가 더 좋지 않았을까? 생텍쥐페리는 머리말에서 친구 레옹 베르트도 한때는 어린이였기 때문에, 어린 소년이던 친구에게 동화를 바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조금 풀어서 이해하면, 어른이 된 친구에게 어린이처럼 살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 어른이 왜 굳이 어린이처럼 살아야 할까요?


실제로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어른들의 삶의 태도를 풍자합니다. 책은 화자가 자신이 어렸을 적에 그린 그림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는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을 그리는데, 완성된 그림은 그저 모자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그 그림을 보고 모두 모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그 그림이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립니다. 어린 왕자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면을 볼 수 있는 마음과 상상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상상력은 전혀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면만을 보면서 살기 때문에 그림의 참 의미를 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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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눈에 보이는 장면도 생생하게 보지 못하고, 숫자로 보려고 합니다.


어른들에게 "아름다운 장미색 벽돌집을 봤어요. 창문에는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앉아 있고요..." 하고 말해보라. 그들은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결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효과가 있다. "10만 프랑짜리 저택을 봤어요." 그러면 그들은 "정말 멋지겠구나!" 하고 소리 칠 것이다.
(어린 왕자, p28)

<어린 왕자> 속 어른들은 늘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으며,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이 하는 일의 참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누구도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장면을 숫자로만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가 어른을 너무 이상하게 설정한 걸까요? 책이 아닌 실제 세상의 어른은 다릅니까? 그러면 어른이 된 우리는 책 속 어른과 다르게 살고 있습니까? 속상하지만, 동화 속 어른과 우리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생텍쥐페리가 충고하는 것처럼, 어린 왕자와 같이 어린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상상력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장면을 보고, 숫자가 아닌 생명을 봅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을 한다면서 정작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는 어른의 태도를 버리고, 어린 왕자처럼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충실하고 생생하게 살아갑시다.


물론 전쟁 속 레옹 베르트처럼, 고통스러운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어린이처럼 살라는 동화가 어울릴까요?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하기는 합니다. 어린 왕자는 철새를 타고 소행성들을 여행하고, 장미, 여우와 대화를 나눕니다. 이처럼 동화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때로는 현실에서도 동화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요. 어쩌면 어린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자주 동화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불가능한 했던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한 때 어린이였던 여러분에게도 동화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길 바라며 부족한 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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