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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Nov 03. 2023

살아남은 우체통처럼 쓸모 있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는

 동네마다 하나씩 있어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빨간 우체통은 이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많이 철거되었고, 작년 기준으로 전국에 8619개 남았습니다. 철거된 우체통에게 미안하지만, 여전히 8619개가 남아 있다는 점이 신기합니다. 요즘 누가 손으로 직접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다고 8619개 우체통을 남겨 두었을까요? 집에 우표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우편 발송을 해야 한다고 해도 우체통이 아니라 우체국을 이용할 텐데, 왜 다 철거하지 않고 8619개를 남겨 두었을까요?

 

 여전히 길에 있는 빨간 우체통에 무언가를 넣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잃어버린 지갑,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카드 등을 다른 사람이 길에서 주워서 우체통에 넣어줍니다. 그러면 우체국에서 주인을 확인해서 분실물을 돌려줍니다. 지난 한 해 신용카드 49만 장, 지갑 9만 3551개를 비롯해서 총 75만 6600개의 분실물이 우체통에 넣어졌고, 안전하게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정도면 8619개 우체통이 남아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요?


 그런데 우체통의 변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지난 7월부터 폐의약품 회수를 시작했습니다. 폐의약품은 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토양과 식수를 통해 인체 재유입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분리배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폐의약품 수거함 많지 않아서 정확한 분리배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우정사업본부가 우체통을 통해서 폐의약품 회수를 시작했고, 지금은 전체 회수 된 폐의약품 중 82%가 우체통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8619개를 남겨 둘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체통을 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득 교회 근처에 우체통이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군인공제회관 앞 길가에 하나 있었습니다. 가서  빨간 우체통 사진을 찍고 돌아오면서 그 우체통이 저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코로나와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교회와 목사의 영향력이 줄고 있다고 하소연만 하고 있는데, 우체통은 쓸모가 없어서 철거될 상황에서도 자신의 새로운 쓸모를 찾아서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했기 때문이죠. 이 멋진 우체통에게 우리가 배워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철거되는 우체통처럼, 4차 산업혁명과 AI시대에 한 사람의 기능과 역할도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체통처럼 변신해야 합니다. 우체통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하겠습니까?


 그러면 우체통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쓸모 있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빨간 우체통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먼저 우체통이 우편물 발송이라는 기존 역할만 고집하지 않고, 분실물과 폐의약품 회수라는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도 기존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열린 자세로 새로운 방식을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은 익숙한 시선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처한 상황을 볼 때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익숙한 기존의 태도와 방식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는 않겠지만, 조금만 용기내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문을 열고 새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봅시다.   


 다음으로 우리가 우체통에게 배워야 할 점은 사회적 요구에 대한 고민과 응답입니다. 우체통이 우편발송이라는 본연의 업무 밖에 있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오히려 업무의 폭이 확대되고 새로운 쓸모를 얻은 것처럼, 우리도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와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할 때, 새로운 역할과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문제에 갇혀 있지 말고 고개를 들어서 조금만 더 넓게 바라봅시다. 그래서 더 쓸모 있고 보람된 하루를 오늘도 살아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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