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오십 살 금쪽이

by heyokeum

포옹:
사람을 또는 사람끼리 품에 껴안음

연휴를 끝내고 돌아온 하노이의 집은 텅 빈 고요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한국에서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마주한 적막은 물에 젖은 옷처럼 온몸을 척척하게 감쌌다. 이별의 슬픔이 체내에 스며들어 우울이 극에 달할 때면 며칠 몸과 마음은 갈 길을 잃고 엉망이 되곤 한다. 설상가상으로 하노이의 창밖엔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기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번 한국행은 내겐 단순한 방문이 아닌 마음 한구석에 쇳덩이처럼 얹혀있던 커다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나는 '그녀'들을 만나러 갔다.

​첫 번째 그녀, 나의 시어머니.
하노이를 오기 몇 해전 파킨슨 병을 진단받으시고 치료를 받으시는 중이셨는데 갈수록 점점 병세가 악화가 되어 이젠 혼자서 걷지 못하시고 보조기나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거동을 하신다고 전해 들었던 날. ​어머니의 무너지는 시간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고 붙잡을 곳 없는 막막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고부(姑婦)라는 단어 뒤에 으레 따라붙는 불만과 갈등은 우리에겐 의미 없는 말이었다. 결혼 초부터 어머니는 '시집살이' 대신 '곁'을 내어주시며 말해서 바뀌지 않는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맞다는 걸 몸소 보여주신 분이셨고 본인이 읽으신 책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아들과 며느리와 허심탄회하게 논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셨다. 어리숙하고 철없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인품을 동네방네 떠들며 편한 시집살이가 그저 내가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당연히 여기며 살았었다.
하노이로 오기 전에도 어머니는 나의 선택을 지지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며 잘 다녀오라는 말씀 외엔 별말씀이 없으셨던 터라 병색이 짙어진 어머니의 소식에 저항 없이 터져 나오는 서러움과 슬픔은 내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깊이 애틋해하고 좋아하고 있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마주한 순간 언어는 힘을 잃었다.

우리는 그저 몇 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껴안았고 그것은 원망 섞인 삶의 고통을 온전한 수용으로 전환하는 침묵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그녀, 나의 시누이.
결혼 초 시어머니보다 더 시집살이를 시키며 나를 단련시켰던 그녀.
그런 그녀와는 이젠 미운 정 고운 정이 켜켜이 쌓여 안 보면 궁금한 사이가 되었건만 하노이로 오던 무렵 생긴 사소한 오해로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이번 연휴 그녀가 온다는 소식에 며칠을 뒤척이고 심란해하며 대면의 순간을 고민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마주한 순간 모든 번민은 안개처럼 흩어졌고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포옹은 그 어떤 유려한 문장보다 강력한 화해의 언어였다. 맺혀있던 감정의 응어리는 서로의 체온에 녹아내렸고
더 이상의 말은 사족에 불과했다.

​난 포옹을 좋아한다.
반가운 이를 만나면 습관처럼 덥석 품에 안는다. 누군가는 이를 가벼운 인사라 여길지 모르나 내게 포옹은 관계의 연결성이다. 타인의 심장 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듣는 이 짧은 접촉은 개인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체온을 나누어 갖는 행위이며 나에겐 평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나는 포옹을 하러 한국에 간다.
포옹은 갈등의 매듭을 푸는 것이 아니라 그 매듭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감싸 안는 침묵의 승화이며 이는 타인의 아픔과 나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껴안는 시선으로 옮겨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아픔은 결국 누군가의 품 안에서 비로소 고요해진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누군가를 기꺼이 안아주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따스하게 품어주기 위해 마음의 팔을 벌린다.

"말이 필요 없을 때, 포옹은 세상의 모든 언어를 대신한다. 그것은 심장이 심장에게 건네는 안부 인사다."
— 파울로 코엘료 (Paulo Coelho)

작가의 이전글2026.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