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살 금쪽이
강남이라는 곳은 변화무쌍하고 화려하지만 결국은 거울에 비친 환상에 불과한 만화경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욕망의 연료를 공급받아야 활력이 생기는 그곳의 공기는 세련된 성취와 매끄러운 소유로 가득 차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밀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내 안의 숨구멍은 좁아져만 갔다.
인간이 현대 사회를 유영하며 마주하는 결핍은 대개 ‘비교’라는 거울에서 시작된다.
남들보다 늦은 속도, 가지지 못한 명품브랜드, 도달하지 못한 사회적 층위들.
특히 나이가 든다는 것은 신체적 기능의 퇴화라는 생물학적 결핍이 지나온 세월 동안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생애적 결핍과도 겹쳐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쉰이라는 숫자는 자칫 그 결핍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의 허리가 굽어지기 쉬운 지점이기에 자주 위축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곳,
하노이의 강한 햇살 아래서 나는 결핍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했다.
이곳은 강남의 그것과는 다르게 빈틈도 있고 매끄럽지도 않으며 정리되지 않고 거칠기만 하지만 그것들이 의외로 숨을 쉬게 했다.
덜컹거리는 길 위에서 때로는 예고 없는 정전 속에서 원하는 것이 즉각 손에 쥐어지지 않는 불편함이 도처에 산재해 있지만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이곳의 부족함은 나를 할퀴지 않고 오히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너그러운 수용이 부려졌다.
왜냐하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결핍을 인정하고 담담히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며 비로소 결핍과 화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풍요 속의 빈곤'이 화려한 식탁 위에서 느끼는 원인 모를 허기였다면 이곳에서 배우는 '비움의 안정감'은 소박한 찻잔 하나로도 충분히 배부른 충만함이라 할 수 있다.
가끔 길가 목욕탕 의자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연유 커피 한 잔을 나누는 베트남 사람들의 미소를 본다. 그들의 웃음은 소유의 넉넉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벼움에서 피어난다.
내일의 걱정을 오늘로 미리 끌어오지 않는 그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해 왔는지 깨달았다.
가진 것이 적어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낫다는 이 자명한 진리를 쉰 살이 되어서야 낯선 타국 땅에서 온몸으로 배우고 있다.
부족함은 메워야 할 구멍이 아니라 비로소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였음을.
비워내고 덜어낼수록 마음의 면적은 오히려 넓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나는 나의 결핍을 냉소해하지 않는다.
그 틈새로 감사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으니까.
이방인의 시선으로 마주한 하노이의 느린 시간 속에서 ‘오십 살 금쪽이’는 비로소 투정을 멈추고 평온함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