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둘 있는 유부남 교사가 스토킹 문자를 보낸 건에 대하여
일본의 재외 한국 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했을 때의 일이다. 그날은 운동회 날이었다. 온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에 절어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울타리조차 없는 조립식 다세대 주택이었지만,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는 나만의 아늑한 공간이었다. 티셔츠 안에서 번데기처럼 몸을 옴직거리며 답답한 브래지어부터 벗어던졌다. 시원한 물을 꺼내 들이키는데 “웅웅” 핸드폰 진동 소리가 났다.
운동회 고생 많았어요 ^^
문자 메시지를 보는 순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편안해야 할 내 집에서까지 Y 선생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가슴께를 여미고 방에 몰래 설치된 카메라가 없는지 살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더운 날씨였는데 등골이 서늘해졌다.
Y 선생은 내가 이전에 근무했던 학교의 수학 교사였다. 과목도 다르고 나이도 거의 아버지뻘이라 별로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머리가 조금씩 벗겨진,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아저씨.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하는 사이였는데, 내가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되자 갑자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거절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알려줬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다년간 축적된 빅데이터에서 나온 나의 쎄한 촉을 믿었어야 했는데,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고 싶었던 마음에 거절을 못 한 것이 두고두고 나를 괴롭게 했다.
Y 선생은 나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둘이 밥을 먹자고 했다. 하지만 영 꺼림칙해서 다음에 다른 선생님들과 여럿이 보자고 둘러댔다. 그는 그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중고생 딸이 둘이나 있다는 50대 유부남이 20대 동료 여교사에게 보내기엔 너무나도 부적절한 내용이었다.
주말에 둘이 영화 보러 가요.
밤에 외롭지 않아요?
황당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그와 조금도 얽히고 싶지 않아서 일절 답장하지 않았다. 계속 무시하면 제풀에 지쳐 그만하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Y 선생은 끈질긴 스토커였다. 이번엔 내가 옮긴 학교의 학사 일정까지 파악하여 운동회 고생했다고 문자를 보내온 것이다. 내 이름, 나이, 전화번호, 학교 그리고 학교 일정까지 아는데 집 주소를 아는 건 시간문제로 느껴졌다. 그때부터 현관문을 열 때 주변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문자일 뿐인데 뭐가 무섭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리타국에서 가족도 없이 허술한 집에 혼자 살고 있는 20대 중반 여자에게는 크나큰 공포였다. 문자 한 통으로도 내 머릿속에선 성폭행, 납치, 살인 등등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인터넷에 스토킹 대처 관련 글을 찾아봤지만, 재산상의 손해나 신체에 상해를 입지 않는 한 경찰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주변의 모든 게 수상해 보였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택배 아저씨도, 그저 같은 방향을 걷고 있을 뿐인 죄 없는 남자도 다 Y 선생처럼 보였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Y 선생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Y 선생이 있는 학교와 우리 학교의 합동 교사 연수가 잡힌 것이었다. 문자만으로도 소름 끼치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얼굴을 봐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교장, 교감 선생님께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나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공감해 주셨다. 교사 연수 때는 Y 선생이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다른 선생님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경계했다. Y 선생도 뭔가 느낀 바가 있었는지 그 후로 더 이상 불쾌한 문자는 오지 않았다.
남자 친구가 생기고, 결혼을 하고 제대로 된 주거 환경에 살면서 더 이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이따금 스토킹으로 인한 폭행, 살인에 대한 뉴스를 들으면 Y 선생과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다. 주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도 불행한 뉴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 몸서리치곤 한다. 실제로 혼자 사는 여자들은 배달 음식 하나 맘 편히 주문할 수가 없다. 택배 주소에 일부러 본명이 아닌 ‘곽두팔’ ‘조덕배’ 같은 우락부락한 남자 이름을 쓴다는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도 들린다. 건장한 남성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라도 여성에게는 무섭고 큰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