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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출내기 May 19. 2023

새벽에 만난 알프레도

특별히 운동과 관련된 취미를 가져본적이 없었다. 건강관리를 위한 헬스클럽이야 정기적으로 다녔고, 체육시간이나 운동회 같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시간을 피해본적은 없지만, 굳이 뭔가 취미로 운동을 찾아서 해 본적은 없었다.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형이 주말마다 새벽에 일어나 채비를 챙겨서 나가는걸 잠결이 보며, 저렇게 좋을까.. 했는데, 요새는 내가 휴일이나 토요일 새벽 4시반에 일어나서 주섬 주섬 옷을 챙겨 입고 있다. 푸르른 초원에 깃발이 하나 나부끼는 곳, 골프장으로. 독일에 와서 배우고 시작해서 한국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의 라운딩은 가까운 동네 동산에 새벽 산행을 가는 그 정도로 부담없이 가볍다. 


휴일이었던 어제도, 다른 가족들이 본격적인 아침을 시작하기에도 다소 이른 8시 30분 이전까지 집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아직 잠이 덜 깬 팔 다리를 휘적 휘적 아침 체조 겸 뻗어가며 한 홀 한 홀 돌기 시작했는데, 뒤에 따라오시던 나이 지긋하신 독일 할아버지와 어찌 어찌 동반 라운딩이 되어 버렸다. (캐디가 같이 있고, 사전에 철저하게 예약이 되고, 순서 관리가 되는 한국과 달리 이곳은 우선 사람이 별로 없고, 혼자 오시는 분들이 많아 가끔 이렇게 섞여서 같이 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아직 남들 보기에는 부끄러운 실력이라 혼자서 운동겸 돌고 싶었는데.. 인자하신 얼굴로 함께 하자고 하시는 그 얼굴에 차마 No 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계획에 없던 2인조가 되어 잔디밭을 걷게 되었다. 


라운딩을 함께 하면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투욱 한번 공을 치고, 트롤리를 끌고 다음 샷을 위해 걸어가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고, 푸른 잔디밭과 파란 하늘 아래서 그 어느때보다 상쾌하고 기분좋은 대화의 분위기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65세이고, 손자가 있고, 아들은 27살이고, 은퇴 하셨고 등등.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고, 영어로 스스럼 없이 대화를 하시는 모습을 보니 소싯적에 왕성하게 활동하셨을 모습이 떠올랐다. 초보자인 나는 초반에 잘 따라가다가 어김없이 라운딩 중반이 되자 좌우로 날아 다니는 샷이 생겼지만, 싱글 플레이어인 그분은 연세가 무색하게 한결같이 평온하고 안정적인 샷을 유지 하셨다. 잘 치는 동반자를 무의식적으로 의식? 하다보니 점점 실수가 더 늘어갔다. 나를 보며 조심스레 혹시 조언을 해줘도 되겠는지 물어보신다.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 골프이고, 인생인것 같다. 충분히 시간을 가져라.

꼭 베트맨 영화에 나오는 집사 알프레도를 닮으신 그 분이, 영화에서와 비슷하게 넌지시 던지시는 그 분의 철학적인 조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라 몇마디 설명을 덧 붙여 주신다.



1. 뒤쪽에서 전체적인 앞으로 가야 하는 방향을 충분히 바라보고 가상의 선을 그려볼 수 있는 정도로 구체적으로 결정한다.  가까이에서 보다 보면 방향을 잃기 쉽다. 시작이 틀어지면 끝은 더 바뀐다. 

2. 충분히 마음의 여유를 찾은 다음, 공 앞에 서서 바로 쳐라. 실행을 망설일 수록 더더욱 긴장되고 몸이 굳어진다. 뻣뻣해진 몸으로는 결코 좋은 샷을 할 수 없다.

3. 반드시 내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강한 자기 확신을 가져라. 내가 나를 믿어 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믿어줄 수 있을까? 확신속에 행운도 따라 온다. 

4. 동반자를 의식하며 바쁘게 공을 치려고 하지 말고, 충분하게 자기의 시간을 가져라. 같이 치는 사람의 마음을 바쁘게 만드는것 만큼 나쁜 동반자는 없다. 당신이 내가 편안하게 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 처럼, 나도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다. 언제라도 나만의 시간을 지켜라.

5. 이미 떠나간 공은 잊어 버리고, 다음 샷을 준비해라. 프로 선수도 실수를 한다. 바람도, 땅도, 공의 상태도  모두 샷에 영향을 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주변환경과 이미 지나간것은 털어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하라.


그 분의 조언에 따르다 보니 확실히 실수가 줄어든다. 당장 오늘의 스코어는 어제와 비슷하지만, 이렇게 계속 해 나가면 더 잘 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든다. 이른 아침에 해가 막 떠올라 이슬이 반짝이는 푸르른 풍경이 더 할나위 없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앞으로 더 나아갈 그 시간들이 결코 도달 할 수 없는 경지에 다가가고자 발버둥치는 고행자의 여정이 아닌 아침 산책과도 같은 평온하고 즐거운 길이 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수백만 달러짜리 상금이 걸려 있는 대회에 참석한 선수인양 긴장했던 마음이 아침의 상쾌함을 찾아 기분좋게 나섰던 그 새벽으로 다시 돌아 간다. 우연히 만난 휴일 아침의 시간을 함께한 그분이 마지막 홀을 마치고 예의바르게 먼저 나서서 모자를 벗고 악수를 청하신다. 언제 또 만날지 알 수 없지만, 아침에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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