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출내기 Jul 14. 2023

어제와 내일 사이의 오늘

  이 땅에 모든 것들은 적당히 필요한 만큼 육체에 생명력과 지혜를 담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은 생각이 넘쳐난다. 살아 있는것은 지금 이 순간인데, 생각은 어제로 부터 흘러오고, 오늘을 지나서, 내일을 향해 간다. 사실들은 상상을 더해, 하늘로 땅으로 우주로 날아가고, 그 안에서 세계가 만들어 지고 또 허물어 진다. 처음 생겨난 모습 그대로 그저 반복되는 이 세상에서 인간만이 달라진다. 조물주가 불어넣은 생명의 숨결은 이것을 일컫는 것일까. 차고 넘치는 생각과 상상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의 원천이다. 하지만 동시에 허무와 불안의 씨앗이 된다. 시간과 공간에 묶인 육체안에 깃든 마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 할 수록 허무의 심연은 커져만 간다. 영겁의 시간과 공간속에 떠다니는 내 삶이라는 티끌. 바람 한번 더 분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신없이 바쁘게 달려가다가도 문득 문득 먹먹해진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정작 시작은 내 뜻이 아니고, 마지막도 내 선택이 아니다. 백지 대본을 들고 무대에 갑자기 눈부신 조명아래 서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건과 인물들이 이미 가득하다. 대충 보면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고는 있는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이 더 많다. 그냥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알 수 있는 가능성 조차 없었더라면 그냥 살아갔을 것을 넘치는 생각은 끝끝내 덩그라니 놓여진 우리 삶의 모습 발견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허무의 공간에 천착하기에는 너무 바쁘다.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맡겨진 여러 일을 온 힘과 마음을 다해서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스트레스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짜증도 있고, 한숨도 있고, 설레임도 있고, 기대도 있고, 피곤도 있다. 살아내고 나면 어느덧 하루가 간다. 어디로 언제까지 가야 할지 알 수 없지만, 하루를 살아낸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다. 하루 만큼 더 늙었고, 더 느꼈고, 더 배웠고, 더 살았다.



 

 지난주에는 가족들과 스위스의 캠핑장에 다녀왔다. 먼길이었고, 분주했지만, 즐거웠다. 독일에 있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지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작년 봄과 달리 여름에 접어든 그 산은 선명한 꽃들로 가득했다. 쨍하고 울리는 것 같은 선명한 그 색색깔의 들꽃들.


비탈길에 친 텐트가 기울어 자고 일어나 보니 식구들이 한쪽 구석에 켜켜히 몰려 있다. 같이 데려간 반려견이 킁킁 대며 끌고 가는 터에 허리가 아프다. 6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왔는데, 또 내일이면 돌아가야 한다. 한낮의 텐트는 그야 말로 찜통이라 안에 들어가 있을 수가 없다. 열심히 끓이던 비빔면은 결국 한번 엎어져 속속들이 박힌 풀을 골라내며 먹는다. 오고 가는 길에 눈 부셨던 풍경을 보며, 아이들에게 창 밖을 한번 보라고 이야기를 하면 뒷좌석 창문에 내린 차광 커튼을 치우지도 않고 와~ 하고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던 두 아이는 뭘 보긴 본 걸까?  더디기만 한 여름밤에 텐트 앞 풀밭에 누워 한참동안 별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기대했던 은하수는 결국 못 봤지만, 어쩜 저리도 많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는지. 산 아래 마트에서 큰 세일 스티커가 붙은 고기를 사서 지글 지글 버터를 두른 후라이펜에 굽는다. 상추도 쌈장도 무쌈도 없지만 슥슥 굽는 족족 사라진다. 산 위 아직 하얀 눈이 담긴 꼭대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콸콸 계곡으로 쏟아져 내린다.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다행이다. 먼 옛날 고대 왕국의 어떤 지혜로운 왕이 다 해봤는데 결국 아무것도 없더라는 그 결론을 내리기에는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순간들이 얼마 안되어서 다행이다.  넘치는 생각 속에서 의미 없는 의미를 찾다가 때로는 허무함에 멍 하더라도, 오늘 하루 더 살아내고 나면 무언가 티 안나는 흔적이 남는다. 끝없이 날아가던 생각들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오늘 살아 낸 만큼, 그 아주 조금씩만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 진다. 나도 만들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그들도 만들어 진다. 마지막을 향해 사라지는 속도 보다, 만들어 지는 속도가 조금만 더 빠르기를 바란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그들이 더 빨리 새롭게 만들어 지기를 바란다. 내가 사라져도 나는 그렇게 내가 만든 그 어느 창조물 속에 작은 흔적으로 남아 있겠지. 그렇게 우리는 허무의 시간과 공간을 지금까지 채워 왔던가 보다. 그래서 결국 오늘이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이다. 어제는 어쩔 수 없고, 내일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오늘이다.  



  


작가의 이전글 새벽에 만난 알프레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