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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출내기 Jan 18. 2024

급할 수록 돌아가자

 당장 숨넘어 갈 듯 급하다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이제 바로 그곳으로 가서 시작하지 않으면 큰 기회를 놓칠것 같다고 설레발을 치더니, 이제와서는 언제 그랬나는 듯 여유만만이다. 임원 인사가 결정되는 연말을 무사히 보내고 신년이 찾아왔기 때문인지, 잡은 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 다는 어장관리의 원칙인지 모르겠지만, 막상 개인적인 큰 희생과 결심을 하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업무를 진심으로 준비 하던 터에 힘이 쭉 빠진다. 새로운 곳에서 펼쳐질 그 수많은 Chaos 가 상상되며 굳이 그 고생길을 내 발로 스스로 걸어갈 필요는 없구나라는 직장 생활의 원리를 다시 한번 절감한다. 경영학의 Guru 피터 드러커가 역설했던 지식근로자의 자격조건 - Self motivation - 은 필시 사장님의 관점에서 나온것이 틀림이 없다. 회사가 아무런 동기 부여를 위한 의사결정과 Risk Taking 을 하지 않아도, 지식근로자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회사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도록 세뇌시키는건 경영자의 꿈일지도.


생각을 해 보면, 오해가 있었던 것도 같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그 일이 궁금했고, 흥미로웠고, 현재 커리어 경로에서 적합했기 때문에 회사의 시그널에 나도 모르게 번쩍 손을 들고 저요 저요 했을 수도 있다. 아내와 회사 업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늘 묻곤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건데? 늘 나의 답변은 비슷하다. 상황을 더 봐야 할 것 같아. 한길 사람 속도 모르는데, 수십명이, 수천명이, 수만명이 모인 회사의 생각을 이해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구성원의 노골적인 욕심과 바램들이 종이 한장으로 만들어진 법적 인간의 세포가 되어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 회사인데, 어찌보면 그것이 어딘가 머리카락 한 올 중간에 자리한 일개 직원의 소망을 이해하고 그대로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기대는 망상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독감에 걸려서 며칠을 꼬박 누워있었던 적이 있었다. 열이 올랐다 내렸다 반복하는 몽롱한 하루에 일본 에니메이션 에반게리온 TV 시리즈를 봤다. 에니메이션을 보는 취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한번은 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누워서 펼친 테블릿에 딱 하고 등장한것이다. 수많은 덕후를 양산해내고 다양한 철학적 해석이 존재하는 그 시리즈를 보고 나서 느껴진 한가지는 자아와 타인의 구분과 경계에 대한 구분이다. 원래 하나로 존재해야 할 인간의 영혼이 지구에서 불완전한 잉태로 인해 파편화되어 각각의 생명이 되었고, 그 분리의 결핍에 의해 고통이 생겨난다. 분리되고 결핍된 인간성을 지키려는 자들과 각 개별은 멸망하되 완전한 하나를 추구하는 이들의 투쟁이다.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그 장벽을 찢어 내기 위해 그들은 무던히도 애를 쓴다. AT 필드. 그 장벽이 찢어지면 적은 파괴되고, 나는 사라진다. 일본 에니메이션에서 주로 등장하는 흥미로운 철학이다.


인간은 완벽히 섬과 같은 존재이다. 좀더 가깝고 친숙한 것들이 나를 중심으로 한 여기와 저기에 있지만, 결국 그 어떤것도 내가 될 수는 없다. 나 스스로 조차도 내 생각과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더욱이 다른 사람은 나를 희미하게 볼 수 있을뿐이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어렴풋이 밖에 알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의 관심은 나를 향해 있다. 타인을 향한 나의 이해력과 관심이 고작 이만큼이라는건, 그들도 역시 나를 이정도 밖에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바램을 포기 하는것이, 거대한 타인의 생각을 거스르지 않고 적당하게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단단히 그 키 하나만 꼭 붙잡고, 너무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말고. 멀리 보면 보이지 않던 바람도 보이고, 조류의 흐름도 보이고, 다른 섬도 보이고, 혹시 내가 바라보던 그 곳이 신기루 였던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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