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41분, 99번째 일기를 썼다. 그 방금 전에 6월부터 매달려왔던 작업을 막 끝낸 참이었다. 수업하러 나가는 거 외에는 거의 날마다 집에서 작업만 했다. 샤워를 생략한 날이 많았고 흘러내리는 앞머리는 핀 두 개로 단단히 고정한 채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겼다. 나날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 와중에 호시노 미치오의 책 <긴 여행의 도중>과 크리스티안 펫졸리의 영화 <피닉스>를 봤다. 선물 같은 만남이었다.
호시노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내가 아는 그이가 자기는 단추 성애자라고 말했다기에 그럼 나는 얼음 성애자라고 말하자 앞에 있는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럼 호시노 미치노를 좋아하겠어요."
호시노 미치노는 야생동물 사진가이자 글을 쓰는 작가다. 그는 알래스카 시슈머레프에서 22년간 살다가 취재차 간 캄차카 반도에서 불곰의 습격을 받고 유명을 달리했다. <긴 여행의 도중>에서'도중'이라는 표현은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인생이 긴 여행이다. 이표현은 인생길을 걷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책은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고정돼 있던 얼음에 대한 나의 동경을 일상적인 감정으로 바꿔주었다. 알래스카. 얼음마저 푸르른 극단의 자연. 깊은 고독 속 거친 야생과 야성의 땅에호시노는 매료되었다. 그는 결국 고독을 이해한 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거기서 죽는다. 총을 소지하지 않고 탐험에 나섬으로써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굶주린 동물에게 자기 몸을 바친 것이다.
작업하는 내내 마음이 자주 그를 향했다. 그러다 보면 질문이 생겼다. 나의 불곰은 언제 만날까? 불곰을 만나기 전까지 나의 일상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먹고 자고 쉬는 몸의 일상을 내 위주로 살았다. 지난 두 달은 특히 더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침대에 들어조각조각 파편화된 잠을 이어 붙였다. 오늘이 며칠인지 날짜를 자주 잊었다. 이제 잠시 머리를 리셋해둘 필요가 있다. 테이블에 쌓여 있는 책들이 허기를 부추긴다. 며칠간만이라도 책과 영화에 푹 빠져 지내려 한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에는 <피닉스> 엔딩씬에 나왔던 speak low가 무한 반복으로 흐를 것이다. 이 유명한 노래의 보컬로 <피닉스>의 그녀는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