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 웬만큼 살아 보니 맞는 말이다.
2. 하지만 나는 앞으로 바람직하게 변할 것이다 - 웬만큼 살아 보니 틀린 말이다.
이 두 가지 깨달음이면 최소 아무 생각없이 살진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길고, 너무나 많은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두 문장으로 압축되는 깨달음 하나 얻었다고 세상이 단순해지는 건 아니다.
유명한 사람의 좌우명이든 내가 손수 만든 인생관이든 괜찮은 원칙들은 사실 일상에 잘 적용되지 않는다. 그 원칙이란 이성의 산물이고, 이성의 반대쪽에 있는 본능은 이성을 압도하는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의 리듬은 이렇다. 본능만으로 태어나서 성장과 함께 자아가 생기고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보다 멋지고 보기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고민 끝에 뭔가 자체 불문법을 만들어 (때로는 성문법을 만들어)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말했듯이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마음이 여유로울 땐 원칙이 잘 지켜지나 엄밀히 말해 그건 원칙 자체가 필요없는 상황이다) 원칙은 곧잘 무너지고 초기화의 참담함을 안고 다시 한번 자신을 추슬러 도전을 하다가 두 번째 세 번째로 원칙이 본능에 굴복할 때마다 자신에 대해 점점 관대해지며 결국 대폭 수정된 불문법을 새로 만든다. <그냥 생긴대로 살되 상처받지 말자. 남에게도 상처를 안준다면 더 좋겠지> 이 정도.
이런 절차를 밟으며 사람은 안 바뀐다.
하지만 사람은 바뀌고 싶어한다. 지루하고도 비루한 오늘까지의 삶을 버리고 내일부턴 신선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걸 다룬 책들이 넘쳐난다. 수요가 많다는 걸 공급자들이 아는 거다. 그럼 공급자들은 삶을 바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그저 자신의 삶을 습관대로 살았을 뿐인데 몇 가지 트렌디한 요소에 있어 타인의 질투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요즘엔 제법 겸손하게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도 많아서 자기고백과 꼰대질의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공급자들이 쓴 책에는 가격이 매겨진다는 것과 공급자들은 자신의 삶을 간절히 바꾸고 싶은 수요자들만큼 간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결론이 나야 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다.
말해놓고 보니 헛헛하다. 냉소적인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런 말을 굳이 또 할 필요는 없었다.
또한 돌이켜보면 인생을 바꾸고자 무모하고 쓸모없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진짜로 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새로운 결론을 내린다.
어마어마한 자아성찰 뒤의 각성이 아니라면 사람은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변하고 싶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엄청난 성찰과 인내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많은 이들이 변화를 위해 소위 롤모델을 설정한다. 주변에 부모든 선생이든 선배든 친구든 이성친구든 배우자든 본인이 생각할 때 ‘괜찮은’ 사람을 기준점으로 삼아 놓고 베낀다. 주변인을 넘어 셀럽이나 역사속의 인물들도 포함된다. 그게 잘 되지 않아도 노력하는 과정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잘 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남을 베끼지만 정말 성공적으로 베껴서 롤모델의 시즌2가 되려면 최소한으로 남아있는 자기마저 다 버리고 신들린 듯 베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안된다. 아무리 자신을 세상의 엑스트라로 여기는 사람도 마지막 남은 최소한의 자기마저 버릴 순 없기 때문이다. 아니 버릴래도 버려지지 않는다. 100문항짜리 객관식 시험에서 0점을 맞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롤모델 설정은 이렇듯 무의미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 사람이므로 사람에 대한 관심 자체를 끊을 순 없다. 만약 롤모델을 설정하되 개념을 반대로 잡으면 어떨까. 주변에 멋지고 훌륭한 사람 말고 그 반대의 경우를 나열해 보자. 염치없는 사람,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 자기애가 너무 강한 사람, 자기객관화가 안되는 사람, 분위기파악 못하는 사람, 가식적인 사람, 예의없는 사람, 예의를 강요하는 사람, 남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인자한 사람, 싸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등.
이들은 분명 혐오스런 사람들이지만 문제는 판정 기준이다. 나의 시선이 그 척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들이 다른 곳에 가서도 똑같은 혐오를 일으킨다는 보장이 없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들을 혐오하는 나도 또다른 누군가에겐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위에 나열된 혐오의 형용사들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요소로서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같은 사람이 존경과 혐오를 동시에 야기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간단하다.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본다. 가족 친구 연인 배우자 직장동료 단순 지인 등을 되는대로 적는다.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나 관계가 없는 유명인이라도 상관없다. 이름을 적었으면 그 다음엔 내 기준에서 그들의 참을 수 없는 점 하나씩을 찾아 적는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점일수도 있고, 대충 견딜만은 한데 성가신 점일수도 있다. 한 사람당 하나씩적다 보면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런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난 저러지만 말자.
내가 혐오했던 추한 모습을 내가 보인다? 용납할 수 없다. 이런 절실함이 동기가 되면 실천이 쉽다. 무엇보다 ‘난 저 사람처럼 매력적인 사람이 될거야’ 이런 식의 뜬구름 잡는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좁을수록 달성이 쉬운 법, 가족 중 누군가가 운전할 때 경적을 너무 많이 울려서 그게 싫었다면 나는 어지간해선 경적을 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 약속시간을 지독히도 안 지키는 친구에게 질려 난 시간에 철저한 사람이 된다. 술을 타인에게 너무 권하는 친구가 거슬렸던 나는 누군가에게 술을 권하고 싶을 때 그 친구를 떠올리며 참는다. 사과문을 올릴 때 꼭 변명으로 끝내는 셀럽들을 보며 나는 사과를 할 땐 사과만 하기로 작정한다. 이건 좀 어렵지만 조금씩 실천해 나간다.
이런 식으로 작은 것들이 모인다. 나의 단점일 수 있었던 요소들이 제거되거나 방지된다. 물론 보편성에 부합해야겠지만 꼴불견이라고 인식했던 요소 수십 개가 내게서 멀어진다면 그건 내가 발전했다는 뜻이고 발전은 변화의 부분집합이므로 결국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분무기에 옷이 젖듯 아주 천천히, 오랜 시간 소요가 전제 조건이다.
단기간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루려면 인생을 뒤흔드는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무용담을 위해 일부러 죽을 고비를 찾아가는 사람은 없으므로, 이것이 결국 사람의 의지로 도전해볼만한 나름 분명한 방법이고 그 동력이 되는 오브제, 그 롤모델을 나는 <안티멘토>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