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소설
어젯밤 드라마를 보다가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와 불 꺼진 자취방에서 혼자 울었던 게 기억이 났다. 돌이켜보니 그땐 뭐가 그렇게 슬펐던 건지... 남자와 여자가 눈이 맞아 연인이 되면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인데, 그땐 왜 그게 그렇게도 슬펐던 건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뭔가 되게 억울했었나 보다. 내가 먼저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게 아니었으니까. 근데 그녀가 나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 게 혹시 나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와 헤어지던 날을 기억한다. 자취방 근처 작은 카페였는데, 그녀는 평소에 즐겨 입는 흰색 바탕에 불규칙한 검정과 보라색 무늬가 들어있는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긴 생머리였고.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대략 2~3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그때는 그 짧은 시간이 되게 길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종업원이 커피를 놓고 간 이후로도 멍하니 커피잔만 바라보다가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해, 선배."
"..."
"이렇게 헤어질 생각은 아니었는데, 선배가 싫어져서 헤어지는 건 아니야."
"그럼 왜지?"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생겼어."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 버렸다. 깜짝 놀란 듯 종업원이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게 보였지만, 금방 고개를 숙이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냥, 두 사람을 동시에 계속 만날 수는 없으니까. 선배한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나 하나로는 부족한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나는 더는 그녀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몹시 불쾌했고,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고, 언제부터 만났는지, 나보다 뭐가 더 좋았던 건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그만 헤어졌으면 좋겠어."
"후회 안 해?"
"응. 후회해도 어쩔 수 없지 뭐, 다 내 잘못인데."
그날 내가 커피를 다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발라드였는지 재즈 음악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우리가 그날 카페에서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같이 나갔는지, 혼자 나갔는지, 그날 날씨는 어땠는지... 그 자리에서 그녀가 울었는지, 아니면 울지 않았는지, 이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한 마지막 말만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같은 거 빨리 잊고, 선배한테 더 어울리는 사람 꼭 만나길 진심으로 바랄게."
새벽 6시 30분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창밖은 이미 해가 떠오르려는 듯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최근 들어 몸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간밤에 있었던 뉴욕증시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부엌으로 갔다. 커피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지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아메리카노 향이 온 집안으로 퍼져나갔다. 고개를 돌려 베란다 밖을 바라봤다. 사물을 완벽하게 식별할 정도로 밝으려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하겠지만, 간밤에 내린 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렸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첫눈이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눈이라니..."
오늘은 거래처와의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라 평소보다 출근 준비를 서둘러야만 했다. 항상 막히는 출근길이지만, 오늘따라 정체는 더욱 심했다. 차들은 거의 제 속도를 내지 못한 채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루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간밤에 내린 기습적인 폭설로 도로의 제설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소식과 함께 운전자의 안전운행을 당부한다는 아나운서의 무미건조한 뉴스가 이어졌다. 갓길에서는 사고가 난 차들과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네,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어요."
"그러네요. 오늘 하루 종일 치우셔야 할 텐데 힘드시겠어요."
"뭐 괜찮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 그나저나 오늘 차가 엄청나게 막히네요."
"그러게요. 다들 제시간에 출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서두른 덕분에 나는 사무실에 정시에 도착했다. 팀원들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눈은 여전히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거래처 인원들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회의시간을 오후로 변경할까 생각해 봤지만, 그건 그쪽 문제지 우리 문제가 아니니까 괜히 나설 필요는 없겠단 생각을 하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건물 아래에선 꽉 막힌 도로 위의 차들과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듯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제 곧 연말인데 이번 주 인사이동에 지방으로 발령이 나진 않을까 걱정이 좀 되었지만, 내가 걱정한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 그냥 운에 맡기기로 했다.
'가라는 데로 가야지, 별수 있나.'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야 겨우 회의가 시작되었다. 거래처에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낮은 가격을 요구했고, 지금 우리 회사에서 제시한 가격이 우리나라에서 최저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동안 준비한 우리 제품의 우수성과 앞으로의 시장 추세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고, 오직 가격만 낮춰보겠다는 생각뿐인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을 야근하며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는데,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양쪽의 의견이 팽팽하게 이어지면서 회의시간은 1시간 반을 넘어가는 상황에서, 나는 잠시 휴식시간을 제안했다.
"오늘 좀 심한 거 같은데 살살 좀 해."
"너도 잘 알잖아. 우리도 상황이 썩 좋지 않아."
"잘 알지. 그러니까 하는 말이잖아. 이런 식으로 계속 우기기만 하면 결론이 안 난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며 거래처 대표로 온 대학교 동창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냐?"
"나야 뭐 그날이 그날이지."
"제수씨 건강은 좀 어떠셔?"
"항암이랑 방사선치료까진 다 끝났는데, 경과가 좋지 않아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어."
"올해로 몇 년 째지?"
"이맘때 발견했으니까 만으로 4년쯤 됐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나. 고생이 많다."
"고생은 뭘. 집사람이 고생이지. 나는 괜찮아."
"그래도 긴 병에 장사 없다고, 너도 많이 야윈 거 같은데."
"그렇게 걱정되면 적당히 마무리하고 그만 좀 끝내자!"
"얘기가 왜 또 그렇게 가냐!"
거래처에서 제시한 가격에서 마진율을 고려해서 15% 증액된 가격으로 내년 1월부터 5년간 납품하기로 하고는 2시간 반 만에 회의가 끝났다. 거래처 인원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 팀원들과 늦은 점심을 사무실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다 식어버린 도시락을 급하게 먹어서 그런지, 명치 쪽이 꽉 막힌 듯 답답함이 밀려왔다. 요즘 부쩍 소화도 잘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한 것이 시간을 내서라도 조만간 건강검진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까지 쓰러진다면 정말 큰일이다.
아내는 밝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평소에 운동도 좋아했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식습관도 꽤 신경을 써왔었는데, 4년 전에 며칠 동안 계속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병원에 갔다가 위암 진단을 받았다. 긴급하게 위절제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는데, 1년도 채 되지 않아 암세포가 다시 발견되었고 주변 장기로 전이되었다. 최근에서야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끝마쳤는데, 경과가 더 나빠져서 주치의의 권유대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상태다. 퇴근 후 병원에 들러 아내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항상 눈물이 났다. 이제는 더는 나올 눈물도 없을 것만 같은데도 매번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도 나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어제처럼 새벽 6시 30분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창밖은 이미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고, 몸을 일으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습관처럼 간밤의 뉴욕증시를 확인했다.
'뭐야! 오늘도 떨어진 거야?'
침실에서 나와 부엌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커피메이커에 아메리카노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지이잉'하는 소음과 함께 커피 향이 온 집안으로 퍼져나갔다. 고개를 돌려 베란다 밖을 바라봤다. 아직은 조금 어두웠지만, 간밤에 눈이 내렸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늘도 눈이 내린 거야? 일기예보엔 눈 온다는 얘긴 없었는데..."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와, 차를 타고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꽉 막히는 도로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항상 막히는 출근길이지만, 오늘따라 정체는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차들은 속도를 내지 못한 채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기어가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의 무미건조한 뉴스가 이어졌다.
"어젯밤에 수도권에 기습적으로 폭설이 내렸습니다. 기상청에서는 이례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으며, 한국 도로교통 관리공단에서는 예상치 못한 폭설로 제설작업이 다소 지연되고 있으니 출근길 시민들의 주의를 당부한다고 밝혔습니다."
'어제 했던 멘트와 똑같잖아! 방송 사고인가?'
갓길에는 사고가 난 차들과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는데, 분명 어제 봤던 장면들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건?'
겨우겨우 출근 시간에 맞춰서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건물 1층 로비에 들어서며 사원증을 경비원에게 보여주고는 인사를 나눴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네,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어요."
"그러네요. 오늘도 하루 종일 치우셔야 할 텐데 힘드시겠어요."
"뭐 괜찮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 그나저나 오늘 차가 엄청나게 막히네요."
"그러게요."
눈이 내린 탓인지 어제처럼 사무실에는 아직 아무도 출근한 사람이 없었다. 평소처럼 오늘 해야 할 일을 적어놓은 업무용 다이어리를 확인하고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눈은 여전히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건물 아래에선 꽉 막힌 도로 위의 차들과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듯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어제와 똑같이 연출했다.
"팀장님, 오늘 오기로 한 거래처에서 한 시간 정도 늦을 거 같다고 방금 연락 왔습니다."
"거래처? 무슨 거래처?"
"오늘 9시 반에 있는 거래처 회의 말입니다."
"그건 어제 했잖아."
"예? 어제요? 오늘인데요, 팀장님."
"뭐? 무슨 소리야! 어제 우리랑 내년 1월부터 5년간 납품하기로 하고는 2시간 반 만에 끝났잖아!"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어제는 월요일이었는데요."
"오늘 수요일 아니야?"
"화요일입니다, 팀장님."
처음엔 팀원들이 나를 놀리려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던 몰래카메라 같은. 근데 팀원들의 표정은 평소처럼 진지했다. 전혀 농담 같은 걸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럼 정말 내가 착각한 걸까? 회의시간이 거의 다 되어 팀원들은 회의 준비를 위해 모두 회의실로 들어갔고, 나는 잠시 생각할 게 있으니 먼저 들어가라고 말을 하고는 책상 의자에 앉아서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혼란스러웠다. 정말 오늘이 화요일이야?
10시 반쯤 되어 거래처 인원들이 도착했고, 눈이 내리는 바람에 오는 길에 접촉사고가 나서 늦었다며 죄송하게 되었다는 거래처 대표의 사과와 함께 회의가 시작되었다. 거래처에서는 어제처럼 낮은 가격을 요구했고, 우리 회사에서 제시한 가격이 최저가라고 또다시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 제품의 우수성과 앞으로의 시장 추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오직 가격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회의시간은 1시간 반을 넘겼고, 나는 휴식시간을 제안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냐?"
"그날이 그날이지."
"제수씨 건강은 좀 어떠셔?"
"항암이랑 방사선치료까진 다 끝났는데, 경과가 나빠서 주치의 말대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어."
"올해로 몇 년 째지?"
"만으로 4년."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나. 고생이 많다."
"고생은 뭘. 나는 괜찮아."
"그래도 긴 병에 장사 없다고, 너도 많이 야윈 거 같은데."
"근데 말이야. 어제 우리 여기서 똑같은 얘길 하지 않았어?"
"어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지? 우린 오늘 처음 만난 거지? 미안해! 요즘 내가 건망증이 심해져서 깜빡깜빡하는 거 같네. 신경 쓰지 마!"
"뭐야? 이것도 무슨 협상 전략 같은 거야?"
거래처에서 제시한 가격에서 15% 증액된 가격으로 5년간 납품하기로 하고는 회의가 끝이 났다. 거래처 인원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 팀원들과 늦은 점심을 사무실에서 해결했다. 도시락이 체했는지, 명치 쪽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뭐지, 이건?'
오늘도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밖은 새벽 여명(黎明)으로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고,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오늘따라 목과 어깨가 상당히 뻐근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밤새 나쁜 꿈을 꾼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한쪽으로 누워 새우잠을 잤는지 왼쪽 옆구리와 허리 쪽이 결렸다. 오른쪽 어깨를 돌리자 관절 주변의 근육들을 가늘게 찢어 내는 듯한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다.
'오십견인가?'
습관처럼 커피메이커의 버튼을 눌렀다.
'지이잉'
밤새 우울하게 가라앉아버린 집안 분위기를 한꺼번에 바꿔버리려는 듯한 기세로 진한 원두커피 향이 구석구석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밖은 아까보다 조금 더 밝아졌다. 오늘은 하루 연차를 써서 아내가 있는 병실에서 저녁때까지 같이 지내기로 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네 차례의 항암치료와 지겨웠던 서른세 번의 방사선치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몸속에 자리 잡은 암세포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주위의 장기들로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자꾸만 야위어만 가는 아내를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주치의의 권유대로 일주일 전 호스피스(hospice) 병동으로 옮겼다.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종합병원은 큰딸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줄곧 우리 식구에겐 꽤 많은 추억이 있었던 곳인데, 어쩌면 이곳에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 입구를 들어서는 내내 기분이 몹시 우울했다. 하지만 아내 앞에서만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떠들었다. 마치 피에로(pierrot), 어릿광대가 된 것처럼.
호스피스 병동은 병원 본관을 지나서 조금 더 안쪽에 위치해서 그런지 도심 속에 있는 건물치고는 한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병동 주변으로 빽빽한 소나무숲이 둘러싸고 있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들이 심겨 있어서 그런지 작은 숲 속에 와 있는 느낌도 들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주차장엔 차가 별로 없었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도 울지 말고, 잘해보자!'
아내의 병실은 3층 307호실이다. 형형색색의 링거를 주렁주렁 매단 채 휠체어를 타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 몇 명이 승강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같이 기다렸다 탈까 하다가 그냥 비상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3층이었지만 운동 부족인지 숨이 조금 차올랐다. 복도를 지나서 307호실 출입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명패에 아내의 이름이 없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도 잠시, 출입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나타난 건 텅 빈 침대뿐이었다.
'어디 갔지?'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와 1층 데스크로 내려갔다. 호스피스 병동이라 그런지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본관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말하고는 왜 307호에 없는지 물었다. 간호사는 입원한 환자 목록을 보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원한 환자 중에 OOO님은 없는데요. 잘못 알고 오신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분명히 일주일 전에 일반병실에서 여기로 옮겼다고요!"
"잠시만요."
간호사는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와 통화했다. 아마도 아내를 찾는 거 같았다.
"응. 알았어. 수고해요, 언니."
전화를 끊고는 나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OOO님은 지금 일반병실에 입원 중이시네요. 저희 병동으로는 내일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고요."
"네? 혹시 오늘이 며칠이죠?"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잠깐 짓더니 다시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9일인데요. 화요일요."
아내가 입원해 있다는 원래의 일반병실로 찾아갔다. 다행히 아내는 그곳에 있었다. 아내는 내가 옆에 온지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바짝 말라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과 퀭한 두 눈, 어둡게 변해버린 피부와 오랜 투병으로 하얗게 새치가 내려앉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애처로워 보였다. 아내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부디 행복한 꿈이었으면 좋겠다.
암 환자들만 모여있는 병동이긴 하지만 여러 명이 입원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방금 다녀온 호스피스 병동보다는 생기가 느껴졌다. 아내가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암에 걸린 사람들은 웃지도 않고, 죽는 날만 기다리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만을 상상하곤 했었는데, 치료를 위해 4년 동안 병원에 드나들면서 보게 된 건 그냥 여느 사람들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여보, 왔어요?"
잠에서 깨어난 듯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일어났어?"
"회사는요?"
"오늘 하루 휴가 냈어. 당신이랑 하루 종일 있으려고."
"어차피 내일 올 건데 굳이..."
"내일은 내일인 거고. 우리한텐 오늘이 중요한 거잖아."
아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프기 전 아내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겹쳐지면서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울컥했지만, 간신히 잘 참아냈다.
"오늘 기분은 좀 어때?"
"괜찮아요. 아이들은 다들 잘 지내죠?"
"그럼! 누구 자식들인데! 하하하"
아내의 일상은 매우 단조로웠다. 거의 하루를 꼬박 누워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음식물은 전혀 목으로 넘길 수 없는 상태여서 코에 연결된 튜브를 이용해서 하루 세 번 액체로 된 영양식을 간호사가 주입해 주었고, 24시간 손등에 꽂힌 바늘을 통해 진통제와 수액 링거를 맞았다. 어쩌다 가끔 갈증을 호소해 빨대가 달린 물통에 담긴 보리차를 조금씩 마시기는 했지만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서 그런지 화장실을 전혀 가지 않았다.
"어제 거래처 김 과장과 회의가 있었는데 당신 안부를 묻더군."
"..."
"그 친구도 이제 많이 늙었더라고. 기억나지? 대학교 동창. 몇 년 전에 같이 해외여행도 갔다 왔었잖아. 그쪽 회사도 요즘 많이 어려운가 봐. 요즘 경기가 안 좋으니 안 그런 데가 없긴 하지만."
"..."
"어쩌면 이번에 나 지방으로 발령이 날 수도 있어. 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만약 지방으로 가라고 하면 회사를 그만둘까도 생각 중이야. 당신 두고 내가 어떻게 지방으로 내려가.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우리 회사가 그래도 정은 있는 곳이라 그렇게 매정한 인사를 하진 않을 거라 믿고 있긴 하지만."
"..."
아내는 몇 번 나와 눈을 마주치며 대화에 집중하는 듯하다가 금방 또 초점이 흐려지더니 스르륵 눈꺼풀이 감겨버렸다. 계속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아침부터 계속 자다 깨기를 반복하는 아내와 침대 옆에서 꼼짝 않고 있다 보니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픈 아내와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기도 힘든 상황이라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잠시 담배를 피우러 병원 밖으로 나왔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정말 오늘이 9일 화요일이라고? 어제는 수요일을 다들 화요일이라고 해서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이 9일이라면, 나는 지금 일주일 전 과거에 와 있는 게 되는 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내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생겼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을뿐더러 누구에게 말해본들 믿어줄 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렇지만 너무 황당하고 또 황당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이 되면 나는 또 어떤 과거를 살 게 될지, 이러다가 영영 현재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내일은 또 어떤 과거를 살게 되는 거지?'
아침에 병원에 오느라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해놨더니 그동안 부재중 전화 몇 통과 문자 몇 개가 와 있었다. 모두 회사에서 온 전화였고, 문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2월 9일 화요일
팀장님. 출근을 안 하셔서 계속 전화드렸는데 안 받으셔서 문자 남깁니다. 문자 확인하시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오전 09:00
12월 9일 화요일
팀장님. 내일 휴가 올리셨던데 혹시 오늘로 착각하신 거 같아 오늘도 휴가로 처리해 뒀습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이 돼서 그러니 꼭 연락 주십시오. 오전 10:00
오늘도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베란다 밖은 평소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부엌으로 가서 커피메이커의 버튼을 눌렀다. 원두커피 향을 맡으며 그다음으로 내가 한 것은 오늘 날짜를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과거에 와 있었다. 오늘은 한 달 전인 11월 9일 일요일이었다. 왜 자꾸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건 지금으로선 의미가 없는 일이고, 어차피 원인을 알아낼 수도 없을 게 뻔했으니까. 다만, 오늘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해야 할 일이나 중요한 약속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행히 매일 해야 할 일들을 블로그에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블로그를 확인해 봤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그냥 평범한 일요일이고, 저녁에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다녀오는 게 오늘 계획의 전부였다. 혹시나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기억해 내보려 했지만, 한 달 전 일이라 기억나는 게 전혀 없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일요일이었을 테니까.
저녁 무렵에 아내가 입원한 병원에 다녀왔지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의 후유증으로 상태가 많이 안 좋았지만,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내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더욱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오늘도 꾹 참고 아내 앞에서만큼은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엄청 서럽게 울었다. 어쩌면 내년 봄을 못 넘길지도 모를 아내가 너무나 가엽고, 엄마를 더는 볼 수 없는 두 아이를 생각하니 애처로워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신(神)이 원망스러웠다. 인간은 어차피 태어나면 죽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오랜만에 해외에 유학을 나가 있는 큰딸아이와 군 복무 중인 둘째 아들과 차례로 전화통화를 했다. 다들 엄마 건강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 옆에는 항상 아빠가 지키고 있다고 웃으면서 위로해 봤지만, 결국엔 딸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둘째는 남자라 그런지 통화하면서 내내 울지는 않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혼자 숨어서 울었을 것 같다. 둘 다 엄마보단 날 더 닮아서 마음이 여리고 강하질 못하다. 거기에 비하면 아내는 정말 강한 사람이다. 절대로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일 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달력에 빨갛게 동그라미를 쳐 놓은 게 분명 아내의 검사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그동안 계속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오후 1시 반에 예약이 되어있었지만, 진료 2시간 전 피검사를 위해 1층 채혈실을 방문해야 하고 영상의학과 일반촬영 접수실에 들러 엑스레이를 찍어야 해서 오전에 집을 나섰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다. 집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종합병원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아내의 표정은 평소보다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았다.
"여보, 긴장돼?"
"조금요."
"긴장할 거 없어.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까 결과가 좋을 거야. 걱정하지 마."
"네."
"진료 끝나고 오랜만에 우리 영화나 보러 갈까?"
"최근에 개봉한 영화 중에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응. <4월이 되면 그녀는>이란 일본 영화인데, 당신이 좋아할 만한 사랑 얘기야. '사토 타케루', '나가사와 마사미', 그리고 '모리 나나'가 주연으로 나오고."
"오! 재밌겠네! 좋아요. 영화 다 보고 나서 저녁도 먹고 들어가요."
"그래. 당신 좋아하는 초밥 먹을까?"
"익힌 게 아닌데 그래도 돼요?"
"위생적이기만 하면 문제없데. 유명한 곳을 알고 있으니까 특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하면 돼. 아니면 살짝 데쳐달라고 하든지."
"살짝 데친 초밥이라... 그럼 '유비끼(ゆびき)'네요. 호호호"
일 년 만에 아내가 활짝 웃는 모습을 봤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먼 곳을 바라보며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나는 검사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아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보! 얼른 일어나요! 이러다 늦겠어요!"
침대 머리맡 탁상시계를 보니 8시가 훨씬 넘었다. 늦잠을 잔 모양이다.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곧바로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면서 양치를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오늘이 며칠이지? 세수를 다 하고 나서 화장실에서 나와 화장대 위에 올려진 달력을 확인했다. 2015년 11월이었다. 나는 지금 십 년 전 과거에 와 있었다. 거실에 켜진 TV에선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 다발적 자살 폭탄 테러와 총격 사건이 발생해 130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연이어 보도되고 있었다. 화면 한쪽 구석에는 오늘이 11월 14일 토요일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토요일인데 늦었다니, 오늘 무슨 약속이 있었지?'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서 방송되는 뉴스를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까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여보! 왜 그러고 있어요? 오늘 부장님이랑 골프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아! 맞다! 오늘 회사 임원들과 골프를 치기로 약속한 날이었구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연말 승진심사를 앞두고 회사의 임원들과 어렵게 자리를 마련한 모임이었는데, 프랑스 파리 테러로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해서 회사의 이미지를 고려해 모임을 취소했었던 기억이 났다. (원래 임원들은 이런 사건 사고에 민감하다.)
"알았어. 준비할게."
소파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모임을 취소하자는 부장님의 전화였다. 나는 상황을 아내에게 설명하고는 다시 소파에 앉아서 뉴스를 계속 시청했다. 십 년 전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중요한 모임이 갑자기 취소된 터라 그런 생각까지는 못 했었는데, 사람이 살고 죽는 게 본인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함께 축구장에서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응원하다가, 음식점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혹은 극장에서 감동적인 공연을 관람하다가 자살 폭탄 테러와 총격으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기분이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다음 주엔 휴가를 며칠 내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을 다녀와야겠다고.
2005년 11월 14일 월요일, 이날은 둘째가 태어난 날이었다. 네 살 먹은 딸아이를 근처에 맡길만한 곳이 없어서 새벽에 양수가 터진 아내와 딸아이를 태우고 차를 몰아 병원에 도착했다. 두 번째 출산이라 그런지 아내는 나보다 느긋해 보였다. 병원에 가져갈 짐과 입원해서 읽을 책도 몇 권 골라 미리 가방에 챙겨두었다. 초초해하는 나와 칭얼대는 딸아이를 달래며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OO야. 이제 곧 예쁜 동생을 만나게 될 텐데 이렇게 아빠를 힘들게 하면 안 되지."
"이제 누나 되는 거야?"
"그럼. 누나가 되려면 아빠 말씀 잘 들어야지 떼쓰고 그러면 안 돼."
"알겠어."
"여보."
"응?"
"너무 초초해하지 말아요. 어젯밤에 예쁜 아이가 달려와 내 품속으로 쏙 안기는 꿈을 꿨어요. 별일 없을 테니까 OO 잘 부탁해요."
"알았어. 이따가 봐."
"네."
멀어져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아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만약 자신이 암으로 이른 나이에 죽을 수도 있을 거란 걸 미리 말해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있는 이해할 수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말해준다면 진심으로 믿어줄까? 만감이 교차했다.
삼십 년 전 아내를 만나기 전 잠시 사귀었던 대학교 후배와 헤어지던 날로 되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알려준 자취방 근처 작은 카페로 나갔다. 그녀는 먼저 도착해 창가 맨 끝자리에 앉아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긴 생머리에 평소에 즐겨 입는 흰색 바탕에 불규칙한 검정과 보라색 무늬가 들어있는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종업원이 커피를 놓고 간 이후로도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해, 선배."
"..."
"이렇게 헤어질 생각은 아니었는데, 선배가 싫어져서 헤어지는 건 절대 아니야. 그냥 선배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러는 거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두 사람을 동시에 계속 만날 수는 없으니까. 선배한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
"그래서 말인데, 우리 그만 헤어졌으면 좋겠어."
"후회 안 해?"
"응. 후회해도 어쩔 수 없지 뭐, 다 내 잘못인데."
카페에서는 오래되고 느린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Waltz for Debby)'란 앨범의 곡들이 차례로 나왔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 다가올 겨울을 미리 알리는 늦은 가을비였다. 내가 커피를 절반쯤 마셨을 때 그녀가 다시 침묵을 깨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선배는 나와 사귀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
"글쎄..."
"만약에 지나온 과거 중에 단 하루만 반복해서 살아가야 한다면 선배는 언제를 선택할 거야?"
"단 하루만 반복해야 한다면?"
"난 선배와 함께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 중에 스위스 인터라켄 근처의 융프라우 캠프에서의 첫째 날이 제일 기억에 남아. 만약에 그 첫째 날을 매일 반복하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어."
"단 하루만..."
"선배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 있어?"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울음을 멈추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진정이 되었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으로 눈물을 닦고는 내게 말했다.
"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같은 거 빨리 잊고, 선배한테 더 어울리는 사람 꼭 만나길 진심으로 바랄게."
'만약에 지나온 과거 중에 단 하루만 반복해서 살아가야 한다면?'
십 년 전 11월 어느 날, 2박 3일간 휴가를 내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강원도에 있는 숲 속 캠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11월 중순이라 밤엔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숲 속 새벽공기는 상쾌했고, 한낮의 계곡물은 얼음처럼 맑고 투명했다. 둘째 날이었는데, 그날은 아침부터 잠이 들 때까지 모든 게 완벽한 하루였다. 아내가 만들어준 음식은 정말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서 최고의 맛이었고, 아이들도 자연 속에서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숲 속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그동안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업무에 대한 고민거리와 앞으로 닥쳐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그날만큼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오로지 현재의 아내와 아이들만 생각했다. 숲 속에서 마음껏 웃고, 떠들고, 소리 질렀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1분 1초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뛰어놀던 아이들은 지쳐서 텐트에 들어가 일찍 잠이 들고, 아내와 단둘이서 사그라져 가는 모닥불 앞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며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날 밤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유난히 밝게 빛났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분은 아내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만약에 내일 세상이 끝나버린다고 해도 전혀 슬프지 않을 것 같은 행복감이 충만한 하루였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다. 나는 캠핑용 에어매트 위에 누워 있었고, 아내는 내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여긴 우리가 십 년 전 2박 3일간 갔었던 강원도의 숲 속 캠프다. 몸을 일으키면 금방이라도 아내가 잠에서 깰 것 같아서 깨어날 때까지 그대로 누워서 텐트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너무 벅차올라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내는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다 큰 어른이 왜 이렇게 우냐며 걱정하는 눈빛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냥, 너무 행복해서 그래."
나는 강원도에 있는 숲 속 캠프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십 년 전 그 하루를 무한 반복하며 살기로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히 늙지도 않고, 병들어 죽지도 않는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은 지금 너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