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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돋움 Jun 07. 2024

시그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는 알림을 보고 노트를 들고 부랴부랴 회의실로 달려갔다. 팀원이 모두 모인 후 느지막이 회의실로 등장한 팀장은 눈으로 팀원들을 쓱 훑고는, 본사에서 내려온 서류 한 장을 펼쳐 들었다. 

불법적인 돈은 주지도 받지도 말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지극히 통상적이고 의례적인 서류를 보며 팀장은 침 튀기는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평소 사리분별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 왔지만, 퇴직을 앞둘수록 이젠 좀 내려놓아도 될 만한 일들까지 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때아닌 근로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그 정도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이끌고 있는 부하직원들이 누군가의 뒷돈으로 뭔가를 이루고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는 권력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는 건가? 주위를 쓱 둘러보니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인 듯 팀장의 열정적인 연설에도 하나같이 볼펜을 돌리며 시선은 창문 너머 어딘가 둔다던가, 손톱 옆에 걸리는 거스러미를 열정적으로 뜯는 다던가, 빈 노트를 집중적으로 응시하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직원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수 있게 일단 승진부터 시켜줘 보던가! 누군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면 열열한 박수를 받는 호응이 뒤따랐겠지만. 겨우 서명이나 받아놓으라고 본사에서 보낸 서류에 목숨 걸고 핏대를 세우고 있는 팀장을 보고 있노라니. 꼭 누가 봐도 비호감인 신랑이 바람피울까 전전긍긍하는 의부증 아내같았다.


아침부터 정신이 탈탈 털린 회의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이유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다. 

물론, 그것이 나의 원인으로 기인된 일은 아니겠지만.

-고객안내실이죠?

-예?

-어... 고객안내실 아닌가요?

혹시 외계인이세요? 정도의 물음이 있었을 때 나올법한 어이없음을 강조한 높이의 대답이자 물음이 깊숙이 밴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튀어 오르자 고객안내실에 계시는 직원분들의 목소리를 더듬으며 이런 목소리가 있었나? 회전시키는 동시에 사무실 내선전화의 액정을 확인했다. 분명 내선번호 230이었다.

-아닙니다.

수화기 너머 남자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럼 거긴 어딘가요? 같은 다른 어떤 질문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대답이었다. 귀찮고, 어쩐지 화도 좀 나있는 것 같은 목소리.

-네~~

질문을 틀어막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바로 수화기를 내렸다. 그리고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경비실이란 단어가 익숙한 새로 들어온 직원이 고객안내실이란 단어와 혼란이 생겨 일어난 일일 것이다. 혹은. 혹은... 전화가 이상하다거나. 나는 분명 내가 누른 번호가 230 임을 확인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의 전화기를 울리게 했으니 말이다.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내선번호 230을 눌렀다.

-여보세요?

분명 좀 전의 그 신원미상의 남자 목소리다. 

-여보세요? 경비실 아닌가요?

수화기 너머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역시 고객안내실이나 경비실 같은 단어의 오용문제가 아니었다. 

-저는 회사 경비실로 전화를 걸었는데, 계속 그쪽으로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혹시 그곳이 어딘가요?

-여기는 강원도 원주의 병원입니다. 

-그럼 혹시 내선번호가 230은 맞나요?

-네.

내선전화를 걸었을 뿐인데 회사와 전혀 연관도 없고, 태어난 이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원주라니. 180여 km가 떨어진 병원으로 내선이 연결된 이 상황은 곧 나에게 tv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시그널. 과거와 현재를 뛰어넘는 무전기 속 대화.

상대방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나는 혹시 그곳은 몇 년도인가요?라고 물어볼뻔했다.

-저희가 인터넷 전화라서 회선이 잘못 연결된 것 같은데. 한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아. 네 저희도 인터넷 전화 맞아요.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장애신고센터에 전화를 하고 방문한 AS기사님이 MAC 번호를 확인해 가며 30여 분 만에 사무실 전화는 정상화되었다. 통신 회선연결작업을 하면서 오류가 좀 있었다고 한다. 그래 무슨 시그널. TV를 너무 많이 봤다.

그래도, 잠시나마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이랄까? 전능감을 가질 듯한 예감이랄까? 현실에서는 따분한 회의실조차 박차고 나올 수 없을 만큼 모든 상황에 순응하며 살고 있지만, 퇴근하고 나선 전 지구를 구해내는 중차대한 업무가 기다리고 있는 비밀 영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던 이번 경험은 나름 흥미로웠다. 

혹시 알아? 수화기 너머 그 남자가 내 전생에 전생을 거쳐 영겁의 인연이 있어 이번생에도 한 번은 스쳐가야 했을 중요한 인연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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