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적 환대가 사라진 자리, 문해력은 권력이 되었다.
"선생님, 음탕은 어떤 음식이에요?"
학원가에서 고등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시절의 일이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분석하던 중, 한 학생이 진지하게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음탕은 어떤 음식이에요?”
순식간에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아는 학생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나를 골탕 먹이려 농담을 던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지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눈빛 같은 비언어적 표현들은 그것이 아주 순수한 질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찰나, 내 마음엔 파도 같은 걱정이 밀려왔다. 이 학생이 지금 이 웃음소리 때문에 또래들 사이에서 ‘무식한 학생’으로 낙인찍혀 놀림감이 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학생의 빨개진 얼굴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짧은 웃음소리가 사실 한 학생의 용기 있는 질문을 ‘무지’라는 죄목으로 처단한 사회적 배제(Ostracism)의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시의 중반부, 왕궁의 음탕함을 비판하기에 앞서 등장한 ‘설렁탕집’ 에피소드 때문이었을까. 학생의 뇌는 ‘왕궁의 음탕’ 또한 그 연장선에 있는 어떤 요리로 처리한 듯 보였다. 물론 이 장면은 내가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엉뚱하고도 소중한 질문들을 집약해 재구성한 것이지만, 당시 그 질문이 내게 준 충격과 성찰은 여전히 선명하다.
AI와 나눈 대화, 그리고 ‘심심한 사과’
강단을 떠나 예비 교사들을 양성하며 읽기 과학과 독서 교육을 연구하는 지금, 나는 그날의 교실을 다시 복기한다. 최근 대화형 AI인 제미나이(Gemini)와 문해력 위기 담론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며 새삼 확인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문해력 논란이 ‘어휘의 결핍’보다 ‘인지적 환대의 결핍’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비가 올 때를 뜻하는 ‘우천(雨天) 시’를 ‘우천이라는 도시’로 이해하거나, ‘심심(甚深)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오해하는 이들을 우리는 조롱하거나 비난한다.
조롱과 비난의 이면에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무기로 타인을 타자화하고 우월감을 만끽하려는 ‘언어적 스노비즘(Linguistic Snobbery)’이 도사리고 있다. 내가 아는 것을 상대가 모를 때 느끼는 조롱과 분노는 ‘지식의 저주’에서 기인한다. 이 지점에서 문해력은 더 이상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타인을 감별하고 배제하는 ‘권력’이 되고 있다.
왜 쟈니는 영원히 글을 잘 읽을 수 없는가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독서 교육(Literacy Education)을 공부하던 시절 접했던 브론윈 윌리엄스의 연구는 이러한 위기 담론이 시대마다 반복되는 ‘도덕적 공황’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윌리엄스는 "왜 쟈니는 영원히 글을 잘 읽을 수 없는가(Why Johnny can never, ever read)"라는 반어적인 제목의 연구를 통해, 기성세대의 잣대가 어떻게 학생들을 영원한 '문해력 낙제생'으로 가두고 그들의 정체성을 훼손하는지 폭로한다. 조병영 교수 역시 저서 『기울어진 문해력』을 통해 문해력이 결코 공평한 운동장이 아니며, 사회적 맥락에 의해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역설한다.
해방(Emancipation)으로서의 문해력을 향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하던 시절, 나의 지도교수였던 데이비드 라인킹(David Reinking)은 테크놀로지 통합 읽기 교육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그는 학문적 여정 내내 문해력 교육의 종착지가 결국 ‘해방(Emancipation)’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테크놀로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학습자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통제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힘을 갖는 것이 리터러시 교육의 본질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음탕’이 무슨 음식이냐 묻던 학생의 천진한 질문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모름의 당당함’이었고, 선생인 나는 그 질문을 비웃음이 아닌 ‘인지적 안식처’로 더 단단히 품어주었어야 했다. 문해력의 민주화는 모든 단어를 외우는 데 있지 않다. 내가 아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벽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겸손, 그리고 상대의 서툰 질문 속에서 그가 가닿고자 했던 세계를 함께 바라봐 주는 ‘환대’가 회복될 때, 비로소 우리의 언어는 폭력이 아닌 소통이 될 수 있다.
필자: 친절한 읽기교육 연구자 K
필자 소개: 대학에서 예비 초·중등 교사를 양성하며 독서 교육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테크놀로지 통합 읽기 교육의 권위자인 데이비드 라인킹(David Reinking) 교수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최근 인공지능과의 협업을 통해 미래 리터러시의 방향성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문해력이 권력이 아닌 해방의 도구가 되는 세상을 꿈꾸며 이 글을 씁니다. (본문의 사례는 제자 보호를 위해 일부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