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않으신 부장님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길게 마음에 남았다. 담담하게 꺼내신 이야기 속에는 지난 세월의 무게와, 그 무게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잔한 후회가 스며 있었다. 자녀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시켜주지 못한 것, 학원을 보내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도록 두었던 선택, 그리고 IMF라는 시대의 벽 앞에서 해외 경험조차 쉽게 허락할 수 없었던 현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변명도, 자책도 아닌 그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부장님의 선택은 분명 최선이었을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흔들리는 경제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간. 누군가에게는 당연해 보이는 선택들이 누군가에게는 감히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듯 살아낸 시간들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을 텐데, 막상 뒤돌아보니 남는 것은 ‘조금만 더 해줄 걸’이라는 마음이라니.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늘 그 순간의 최선을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최선은 언제든 부족했던 선택으로 바뀔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 부모의 마음,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직장인의 아쉬움, 혹은 그때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후회는 결국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이란 존재할까. 아마도 완전히 후회 없는 선택은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의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는 일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기준이 아닌, 내 삶의 조건과 가치 안에서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만들어낼 미래를 온전히 책임지겠다는 태도. 그것이 후회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부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삶을 떠올렸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최선이라 여기며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최선이 몇 년 뒤의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아이들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늘 불완전한 상태에서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후회는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또 하나의 흔적일 것이다.
차가 식어갈 즈음, 부장님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누군가의 지난 시간이 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 나는 그 거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완벽한 최선은 없더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을 지나치지 않는 선택을 해야겠다고. 언젠가 돌아봤을 때, 그때의 나는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