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카페로 들어온다. 열에 아홉은 늘 같은 자리다.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녀는 문쪽을 주시하며 아무 미동도 없다. 늘 긴장한 모습이다. 기다리던 이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 그녀는 벌떡 일어나 손을 뻗어 흔들며 상대를 반긴다. 조금 전까지 내내 굳어있던 얼굴에 함박미소를 지으며 보조개를 만든다. 상대가 자리에 다 앉지도 전에 차는 뭐가 좋으실까 묻는다.
명치쯤 높이의 주문대에서 그녀가 앉은자리까지는 2미터가 되지 않는다. 주문이 끊어진 사이 홀로 앉은 그녀의 깊은 한숨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녀는 모른다. 그녀가 주기적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다는 것을, 혹은 내가 그 소리를 들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녀가 상대를 맞이하는 인사 한두 마디에 바로 이어지는 "뭐가 좋으실까? 에 맞춰 그녀를 기다리는 자세로 서 있는다.
그녀가 내게로 온다.
주문은 늘 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다. 먼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말한 뒤 나의 뒤편 벽에 걸린 메뉴판을 훑는다. 그녀의 시선이 내 머리 위에 한참을 머문다. 그녀가 빠르게 이름과 금액을 확인하는 모습을 아무 표정 없이 지켜본다.
그녀가 다른 하나의 음료 이름을 천천히 말하고 지갑의 카드를 꺼낼 때 나는 자동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주문을 반복하여 소리 낸다. 대부분 그녀가 오는 시간은 저녁식사를 마친, 늦은 시간대라 한산하다.
그녀는 내게 관심이 없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일도 없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주문대 앞이 아니라 뒤편의 자신의 상대자에게 가 있다.
그녀의 눈에서 긴장과 허망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주문하신 따뜻한 아미리카노, 따뜻한 카푸치노!"경쾌한 소리로 읊어주고 카키색 트레이에 티슈와 스푼을 두 개 얹어준다. 그녀가 스푼을 찾은 적이 있기 때문에 요청하지 않아도 내어 놓지만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녀의 온 신경은 뒷 편의 손님에게 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리로 돌아간다.
그녀의 말아 올린 정수리의 고슬 머리를 바라본다. 오늘도 그녀는 머리를 정성껏 손보고 나온 모양이다. 구르프로 말아 올린 머리카락은 동그랗게 말려 정수리를 감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둘이요." 걸어오며 주문하는 젊은이가 내 시선을 빼앗는다. 밤 여덟 시가 넘은 시간에 그란데라! 젊은 남자를 바라보는 사이 내 의식은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그녀는 언제나 절반 이상의 커피를 남긴다. 맞은편 상대가 몇 마디 하지 않고 자리가 파한 날엔 그대로 남긴 적도 있다. 그녀는 진심으로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언젠가 그녀가 앞에 앉은 상대에게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아메리카노를 선택하는 것은 맨 첫 줄의 음료이자 가장 저렴한 금액의 음료이기 때문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두 잔을 내어준 후 나는 벽 메뉴판 밑에 놓인 스툴에 앉아 핸드폰을 꺼낸다.
조금 전 울려진 카톡진동을 확인한다. 며칠 소원했던 그녀다. 생각해 보았는데~로 시작되는 그녀의 메시지는 얼마 전 우리의 다툼에 관해 사과인 듯 아닌 듯 길고 모호하다. 사과를 하려던 도입부는 몇 줄 지나지 않아 다시 나를 원망하며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그녀는 일 년이 넘어가는 교제에도 사랑과 결혼에 확신이 없다고 말한다. 그녀의 친구 결혼식이 빌미가 되었다. 그녀의 친구가 신혼을 시작하는 집 이야기에 다다렀을 때 우리는 서로 침묵했고 마주 앉아 핸드폰만을 들여다보다 헤어졌다. 우리는 일 년 사이 헤어지고 만나기를 세 번째 해오는 중이다.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너와의 결혼은 힘들 것 같아. 이쯤에서 헤어지자.'
그녀가 보낸 긴 문장들은 하나의 의중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두서없는 글의 마지막은 '만나서 얘기해'이다.
나의 무응답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하다. 며칠 내로 우리는 만날 것이고 술자리를 빌어 그녀는 눈물을 보일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샘 스미스의 '아임 낫 디 온리 원'이 나지막하게 흐른다.
스툴에 앉은 나의 시야엔 구르프로 말아 올린 그녀의 정수리 머리카락과 상대편에 앉은 짧은 헤어스타일 여자의 두상만이 보인다. 샘 스미스의 노랫말과 그녀의 애교 섞인 말소리가 분절되어 의미 없이 뒤섞인다.
한 번만 더 써보고 그다음에 결정해도 되잖아요?라고 그녀가 짧은 머리의 여자를 설득한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은 그녀가 기분이 상하지 않기를! 미소와 보조개가 사라지지 않기를!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니가 뭐라도 준비가 되어야 여자도 사귀는 거야. 준비없이 여자 만날 생각은 아예 마"
그 말은 아무런 관련 상황도, 전후 맥락도 없이 불쑥, 큰 소리로 내뱉어지며 집은 순식간에 정적 속에 가둬지곤 한다. 더러는 걸레가 던져지거나 설거지 소리가 소란스러워진다.
"준비도 안 된 채 결혼해서 어느 집 귀한 딸을 데려다 고생시키려구." 십 년이 넘게 같은 소리를 하는 엄마를 떠올린다.
어느 집 귀한 딸은 본인이다. 엄마는 아버지에 비해 학력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지역에선 유지라는 소리를 듣는 집 딸이었다. 아버지의 대졸 학력은 외가 어른들에겐 대단한 자산으로 여겨졌다. 중매를 했던 친척은 기세가 등등했고 중학교만 마친 엄마는 서울에 방 두 칸짜리, 대지 37평 집을 지참금으로 가지고 신혼을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의 푸념을 잠재우는 것은 구르프를 풀어내며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다. 형태를 잘 살리며 그루프를 빼는 엄마의 손길은 놀랍다. 달라진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단장의 끝에 가서야 푸념은 지나간 노래가 된다. 미용보조를 경험한 엄마는 머리 만지는 손재주가 있다는 이웃의 평을 들었으며 일주일에 사나흘은 아는 이의 미용실에 가 식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엄마의 정수리가 떠오른다.
머리숱이 적어진 건 순전히 아빠의 무능 탓임을 자식들에게 주입시킨 엄마가 외출을 앞두고 가장 공들이는 건 머리였다. 외출 전 구르프를 빼곡하게 머리에 올린 엄마가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만드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사회생활은 40대 중반, 일찍 정리되었는데 그 자세한 경위는 가족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엄마의 추측에 아버지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으니 엄마의 속이 어땠을까 짐작이 된다. 핸드폰을 다시 꺼내다 만다.
뭐라도 말을 해봐 오빠! 술기운에 불콰해진 그녀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소리 지르던 모습이 떠오른다.
핸드폰을 꺼내 계산대 옆으로 내놓는다.
침묵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넘겨준 것은 사천 만원의 예금과 목에 풀칠이나 간신히 할 100여만 원의 연금 지급내역서였다. 연금을 타기 전까지는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야 했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앉아 책을 보거나 동네를 산책하는 일 외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말수조차 적었다.
십 년이 지나는 동안 조용했던 엄마의 입은 쉼 없이 중얼거리고 자기 연민에 빠진 탄성에 누나와 나는 귀를 틀어막기가 바빴다. 누나는 아버지의 등에 엄마보다 더한 눈빛을 꽂고 아버지만큼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식구들은 침묵 속에서 지나쳤으며 하숙에 기거하는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아니, 그게 아니고" 습관처럼 말머리에 붙이는 말이 오늘은 유난히 여러 번 반복해서 들려온다.
아니,...... 아니,...... 아냐 아냐.
상대는 여지를 두지 않고 자신의 말을 계속한다.
그녀가 상대에게 늘 저자세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변명하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도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
그녀의 추임새 '아니'가 오늘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정수리를 본다, 아직 건재하게 말려 있는 커어브 완만한 퍼머머리가 가라앉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녀가 마주한 상대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어 의아하다. 대부분 그녀의 상대자들은 뭔가에 화가 나있거나 웃음을 띠고 있어도 말은 거칠었다.
그들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그녀의 미소는 억지스럽다.
그녀의 억지 미소는 늘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