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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쏭 Jun 07. 2023

어쩌다 보니 전업주부


우리 딸도 나중에 ㅇㅇ이 엄마처럼 집에서 놀면 좋겠어”

“집에서 노니까 낮에 이런데도 오고 얼마나 좋아”


악의라곤 전혀 없었다. 누군가를 폄하하거나 상처를 주기 위해 꾸며댄 말도 아닐 것이다. 지금의 순간에 주어지는 여유와 감상을 이렇게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학부모 봉사활동을 통해 형성된 소규모 모임에서 처음으로 인근 미술관으로 나들이를 다녀오던 날, 미술관 입구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서던 K언니가 나를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워킹맘으로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평일에 짬을 내어 미술관 관람이라니, 이런 삶을 전업주부들은 매일 같이 누리며 사는 건가 싶은 생각에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이었다.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집에서 노니 좋겠다 “라는 그녀의 말이 마음 한구석에 불편하게 박혔다. 억울하기도 했다. 나 또한 평일에 아이를 대동하지 않고 미술관에 온다는 것은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 내 삶이 집에서 편하게 노는 삶인가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0대 중반 전업주부, 경력단절 여성, 아무개 엄마, 내 타이틀은 대략 이렇다. 직업란을 쓸 일이 있을 때면 예외 없이 주부라고 적는다. 20대까지만 해도 상상도 해보지 않은 직업 ‘전업주부’, 이것이 내 직업이 되었다. 단 한 번도 미래의 희망직업으로 꿈꾸었던 적이 없고, 관심조차 가져본 일이 없는.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봐온 어느 여성도 선택하지 않은 직업이었다. 엄마는 밭과 축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낮 시간대 집은 늘 비어있었다. 우리의 양육은 할머니가 맡아했아서 했고, 집안 살림은 여자 형제들이 각자의 나이에 맞춰 나눠서 했기에, 엄마의 직업은 농부라 함이 더 적절했다. 그러니 적어도 농부는 되지 않을 거야라고 떠들고는 다녔을지언정 전업주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일은 없었던 것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경영대학원에 진학했고, 결혼을 앞두고 석사 논문과 이직을 준비했다. 결혼을 하고 자연스레 아이가 생겼고,  두 달 후에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내 대학원 졸업식은 시댁 큰아버지 생신과 겹쳐 그대로 잊혀졌다. 나 또한 잊었다. 무대가 완전히 바뀐 이 상황에서 학위를 받은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잊으라고 스스로를 압박했다. 당시의 내 과제는 태교를 잘해서 건강한 아이를 낳고 근처에 사는 시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결혼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시어머니의 선언 같은 말을 반복해 들으며, 그렇게 1년, 2년, 10년이 지났다.


함께 공부한 동기들은 석사에 이어 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고, 업그레이드 한 스펙을 기반으로 더 나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되어 이직하기도 했다. 물론 남자 동기들에 한해서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한 여자 동기들은 몇 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버티다 퇴사를 하거나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느라 버둥거리며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나마 직장과 병행할 수 있었던 건 그 친구들 모두 육아와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해주는 ’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어쩌다 보니 전업주부‘가 됐다. 작정하고 선택한 일은 아니지만 내게 주어진 일이니 이 일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내고 싶은 열망에 뭐든 열심히 하려 했다. 먹거리, 위생, 환경, 교육, 집안 경제 등등 신경 쓰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데 하나같이 티가 나지 않은 일들이었다. 음식은 먹어 치우면 끝이고, 잘 치워놓은 집안은 아이들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아이들과 놀아줘야 하고, 나이차가 나는 두 아이에게 번갈아가며 다른 수준의 책을 몇 시간씩 읽어주다 보면 하루는 끝이 났다. 내 하루는 전쟁통인데 이상하게도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 집에서 노니 좋지 않냐 ‘ ’만날 집에서 놀면서 그거 하나 못하냐 ‘ ’ 집에서 뭐 하는데’등등의 말로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 취급을 했다.


‘집에서 노는 엄마’라는 수식어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더 강하게 따라붙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에게 의뢰하는 몇 가지 봉사활동에 집에 있는 엄마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기를 원했고, 녹색어머니회 교통봉사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해야 되는 봉사 활동에 직장 다니는 엄마들만 제외시켜 준 담임 선생님도 있었다. 전업주부인 엄마가 학교 봉사에 참여하지 않는 건 비난받을 일이 되고, 직장에 다니는 엄마가 참여하면 칭찬받을 일이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거듭됐다. 직장 생활을 하는 엄마들은 그들 자신의 커리어를 유지하거나 가족 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그 일을 해오고 있을 터인데, 실제로 그들이 나와 같은 전업 주부들에게 주는 도움은 사실상 전무했다, 집 밖 사람들은 전업주부인 여성들이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종용하는 분위기였다.


남편의 경제력이 충분하거나 육아와 가사가 적성에 잘 맞아서 전업 주부를 선택한 여성들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상황에 떠밀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고, 아이를 맡길 금전적 여유가 없어서 이 길로 들어섰을 것이고, 그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재취업은 점점 더 어려워져 그대로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일일이 설명하려니 구차하기까지 한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10여 년 넘게 자신의 젊음을 바쳐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았지만 노동력으로서 인정받아 본 적도 없고, 급여 한 푼 받지 못하는 특수직군이 전업주부다. 나라에서는 소득이 없어야 마땅한 직군이라 하며 재산 증식도 인정하지 않는다. 일의 특성상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경력이 되지도 않고 경력을 증빙할 서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사회 안팎에서는 여전히 ’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이런 분위기에 어떤 전업주부 엄마가 배울 만큼 배운 딸에게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권할 수 있을까.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 입장에서 전업주부가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아이를 직접 키우며 성장과정의 희로애락을 경험한다는 것이 부럽다면 그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전업주부인 엄마라면 안 했을 거라고 느끼는 많은 것들을 전업주부이기에 못해주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러니 서로의 처지를 비교할 필요도, 부러워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차라리 여자가 아이를 낳아 키우며 직장 경력을 유지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 여전히 아이를 낳아라, 여성의 커리어도 살려라 말하는 이 부조리한 사회를 탓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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