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나롤라
교황과 수도사
알렉산더 6세 교황은 적이 많았다. 그 중에서 그를 가장 직설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사보나롤라」라는 수도사였다. 1452년에 태어났고 할아버지는 페라라 궁정의 주치의로 신앙심이 대단히 깊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도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사보나롤라는 그 영향을 받았는지 신앙심이 두터웠던 중세를 사랑했고 1475년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도미니코회의 수도사가 되었다.
설교와 예언적중, 인기상승
1491년 성마르코 수도원장이 되어 설교를 시작했는데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일반 속인들 보다 정치인, 고위 성직자, 은행가 등 권력자들을 비판했으며, 사실상 군주인 로렌초 메디치에 대해서도 투표자들을 매수하고 구경거리와 축제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독재자라고 했다. 문학과 예술을 이단으로 봤고 성직자들의 세속화와 사치, 화려한 교회 의식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시대정신에 부합하였는지 많은 청중들이 몰려들었다. 로렌초는 선물 등으로 이 수도사를 회유하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사보나롤라의 예언이 적중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속도로 올라갔다. 그는 로렌초 메디치와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이 1492년에 죽을 것이라 말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1494년 이탈리아 전쟁과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승리를 예견했는데, 프랑스군에 의해 피렌체뿐만 아니라 로마, 나폴리까지 맥없이 함락되면서 예언자로서의 그의 권위가 한층 강화되었다. 샤를 8세를 찬양하면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로마 교황을 폐위하는 것이 신의 명령이며, 이를 추진하지 않으면 오히려 왕에게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것도 나중에 실현되었다.
정치지도자 사보나롤라
한편 사보나롤라가 샤를 8세에게 부탁하여 피렌체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일반 시민을 약탈하지 않도록 하자,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이끌어갈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다. 메디치 가문을 쫓아내어 귀족 정치를 종식하고 신정 정치를 가미한 공화제를 시행했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6세로 대표되는 로마 교항청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기 시작했다. 우선 시민들의 사치풍조를 제거했는데, 초창기에 시민들은 이러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여자들은 검소하고 정숙하게 차려입고 보석을 빼놓았으며, 거리에선 유행가가 아니라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헌금도 전에 없이 많이 걷혔다.
교황의 결혼 등 타락을 공격
사보나롤라는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어기고 있는 교황과 교회의 타락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로서는 자식과 마누라를 둔 교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보나롤라의 관점에서는 알렉산데르 6세를 선출한 추기경들도 문제 있는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계율을 어기면서 어떻게 전체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단 말인가?
사보나롤라는 교황을 공격했다. “…예전에는 네 죄로 부끄러움을 느끼더니 이제는 부끄러움조차 모른다. 예전에 기름 부어 임명된 사제들은 자신의 아들을 조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제는 내놓고 아들이라 부른다<문명이야기 5-1>.” 교황이 노골적으로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며 자녀들을 바티칸 궁으로 데려와 사는 것을 빗댄 것이다.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을 조카라 부르는 것을 위선이라 생각했고, 사보나롤라는 사제의 결혼을 타락이라고 봤다. 그는 르네상스 이전의 신앙심 깊은 중세 사람이었고, 반면 알렉산데르 교황은 신앙심을 잃어버린 현대인에 가까웠다.
조국장관이 자녀들의 대학입시에서 동료들끼리 편의를 봐준 것을 큰 죄의식 없이 받아들였듯이 알렉산데르 교황도 독신주의를 어긴데 대해 죄의식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교황으로 선출될 때 동료 추기경들이 자신의 가족관계를 훤히 알면서도 문제 삼지 않았고, 주변에서 가족을 둔 고위성직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전임교황 인노첸시오 8세도 자녀들을 바티칸에서 결혼 시켰고, 전전임 식스토 4세 때도 당시 교황군 사령관이 아들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알렉산데르 교황입장에서는 이제와 새삼 왜 이 문제를 거론하는지 불쾌했을 것이다. 또 성직자 독신주의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 400년전 카노사에서 황제를 굴욕시킨 그레고리우스 7세가 독신주의를 명문화 했고, 그 이전에는 성직자의 결혼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 조지아의 동방정교에서는 아직도 독신이 사제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서 결혼을 금지하지 않으므로 성직자가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개신교는 성직자의 결혼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권장하기도 한다. 그래도 기독교의 수장이 계율을 어긴 죄는 비난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도사의 직구와 교황의 변화구(인내와 유연한 반격)
알렉산데르 6세 교황과의 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사보나롤라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끝까지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얀 후스를 화형시켜 보헤미아 지역을 잃어버린 쓰라린 경험 때문이지 사보나롤라를 순교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쓴 것 같다. “그대가 주님의 포도밭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다고 들었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로마로 와서 내게도 들려주면 좋겠다.”고 편지를 썼다<시오노 나나미, 신의대리인>. 그렇지만 사보나롤라는 건강 등을 이유로 거부했다. 로마에 가면 체포되어 구금될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에 대한 비판 보다 피렌체의 외교정책이 더 문제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재침공 위협이 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렌체의 친 프랑스 정책이 이탈리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봤다. 그리고 사보나롤라를 그 배후로 의심했다.
교황은 피렌체에 대한 고립정책을 주도했다. 피렌체의 직물 산업이 영국 등 경쟁자의 대두로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반프랑스 동맹의 봉쇄로 침체가 가속화되었다. 식량을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피렌체는 항구도시 피사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으나 베네치아 등 반 프랑스동맹국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패배는 예언자의 능력에 의문을 가지게 했고 항구를 확보하지 못해 무역과 경제가 더욱 어려워졌다.
교황은 사보나롤라가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에는 설교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사순절에는 신앙심 고취를 위해 설교를 허용하자는 피렌체의 요청을 들어줬다<문명이야기 5-1>. 1497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3년을 기다린 끝에 사보나롤라를 파문하면서도 그가 로마소환에 응한다면 파문을 철회하겠다는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친사보나롤라 성향인 주교의 건의에 따라 추기경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단칼에 이 제안을 거부했다. 자신에 대한 회유전략이자, 일종의 매관매직으로 인식한 듯하다. 오히려 교황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알렉산데르는 교황이 아니고 교황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돈을 주고 교황직을 샀고, 성직을 팔고 있다. 교황은 기독교도가 아니며 신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다<문명이야기5-1, P274, 275>.
반사보나롤라파의 증가와 불의 심판
로마에서는 사보나롤라의 교황과 로마 교회에 대한 비판이 상궤를 벗어난 무례한 행위로 보기 시작했고, 참고 인내하는 교황에 대한 지지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반 사보나롤라파 수도사들과 권력을 되찾기 위한 메디치 파(派)가 활동을 개시했다. 또 과도한 신정 정치에 대한 불만도 표출되기 시작했다. 소년들로 구성된 도덕 경찰대가 홍위병처럼 피렌체의 많은 이교적인 책과 그림, 선정적인 옷과 예술품, 가면, 사치품들을 몰수해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나, 초창기와 같은 자발적인 호응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행사 때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생기고, 예술품 등을 태우지 말고 자신에게 팔라는 상인도 있었다. 피렌체 정부도 반 사보나롤라 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사보나롤라 몰락의 결정적 요인은 "불 속을 걸어서 진짜 예언자를 판정하자"는 반 사보나롤라파 수도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불의 심판은 많은 시민들의 기대를 모았다. 기적이나 피의 고통을 즐기는 인간본성 때문인지,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행사장에 몰려왔다. 그런데 불속을 걸어갈 때 십자가 소지를 허용할 것이냐 하는 사소한 규정 다툼으로 ‘불의 심판’이 연기 되자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후에 비가 오자 친 사보나롤라 수도사들이 신이 ‘불의 심판'을 원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리고 행사가 취소되었다. 소나기를 맞으며 기다린 사람들은 볼거리가 사라지자 분노했다. 사보나롤라가 겁이 나서 행사를 취소시켰고, 진정한 예언자가 아니라고 소리쳤다. 예언자의 인기가 급전직하했다.
사보나롤라의 죽음
폭도들이 사보나롤라가 거주하는 성마르코 수도원을 공격했다. 수도사들이 무기를 들고 방어했으나 적대적인 대중이 너무 많이 몰려왔다. 반 사보나롤라파가 장악한 피렌체 정부가 이를 방조했는지 모른다. 사보나롤라는 유혈사태가 확대 되지 않도록 수도사들이 무기를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체포되었다. 알렉산데르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보내라고 했지만, 피렌체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시오노 나나미, 신의대리인>. 그를 로마로 보내면 종신 감금시키겠지만, 지금 교황이 죽고 나면 피렌체로 돌아와 권력을 되찾고 피의 보복을 할지 모른다. 그가 죽어야만 보복의 악순환과 분열이 종식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보나롤라는 국가 반역 등 세속법을 위반하지 않아 교회법에 따라 재판했다. 피렌체 단독으로 재판하면 모든 부담을 도시가 져야하므로 책임을 분산하기 위해 교황특사를 파견 받았다<시오노 나나미, 신의대리인 P202>. 사보나롤라와 그를 따르던 2명의 수도사는 공개 재판에서 고문을 당했다. 사보나롤라는 고문을 이기지 못했다. 범죄사실을 거부하다가도 손을 묶어 천장까지 들어 올리는 고문에 금방 자백을 했다. 3번이나 고문과 자백을 되풀이 했다. 결국 신의 계시는 거짓이었고, 외국 세력과 결탁해서 세계공의회와 교황폐위음모를 꾸민 죄로 제자 2명과 함께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 다음날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숨이 끊어지자 추종자들에게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화형을 병행했다.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돌을 던졌다. 사보나롤라가 자신에 대해 예언한 끔직한 죽음이었다.
그리스도의 적자(嫡子) 사보나롤라
현대 문명국에서는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은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형사소송법309조>, 사보나롤라는 고문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죽임을 당했고, 명백한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었다. 기독교에는 어쩐지 피 냄새가 난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이 타락한 세상을 씻어내고 진리와 정의가 퍼뜨려 진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당대에 그리스도의 적자(嫡子)는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아니라 사보나롤라 라는 생각이 든다.
알렉산데르 6세는 정치적으로 노회했고 이탈리아 방어 등 외교적 성과를 거뒀지만 교회의 물질적, 외형적인 자산을 유지하고 키우는 데 힘을 쏟았을 뿐이다. 유태인 보호 등 인도적인 역할도 일부 있었지만 목자로서 신자들의 올바른 신앙심을 고양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교황국가 건설 등 물질은 영원하지 못했고 그가 죽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성직자의 결혼문제도 제도화하지 못하고 계율을 어김으로써 신자들의 성직자에 대한 불신만 증폭시켰다.
물질의 힘으로 정신혁명을 시도
반면 사보나롤라는 중세인의 광신적 열정으로 신앙심과 도덕이 붕괴하는 시대와 싸웠다. 그의 위대함은 도덕혁명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다만 인간 본능의 힘과 싸우는 일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다. 더욱이 정치지도자로 올라서자 조급해졌고, 정신혁명을 정치권력의 힘으로 달성하려 했다. 즉 물질의 힘으로 정신혁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실수는 공산주의자들도 했고 그들의 실험은 실패로 판명되었다. 사치품을 불사르는 허영태우기 행사 등 보여주기식 행사에 치중했고 프랑스의 힘으로 교황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친프랑스 정책을 바꿀 수 없었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국제정세가 변화하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 세상에 정신혁명만큼 힘든 게 없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맑아진다지만 교황 한 사람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알렉산데르 이후 교황들도 사치와 타락 면에서 별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정신을 바로잡기 위한 희생양
인간이 악해 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선해지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더디게 진행된다. 그러나 정치인이 된 그는 조급한 성취를 바랐다. 옷이나 놀이, 사치품 등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교황의 비리, 교회의 부유함을 비판하는데 몰두했다. 사보나롤라는 루터와 같은 신학적 깊이를 더하지 못했고, 그의 시도는 예수그리스도가 보잘 것 없는 제자들과 조용히 이뤄낸 혁명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신은 타락한 인간의 정신을 바로 잡기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처럼 죄 없는 사보나롤라를 비참하게 죽임으로써 당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분투했던 사보나롤라에 대한 기억은 이후 종교개혁의 자양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