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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Oct 07. 2023

돈문제에서 불거진 종교개혁

레오10세 교황의 방만한 재정운영

레오10세 교황과 종교개혁     

1517년 레오10세는 너무나 바빴다. 1월에 우르비노 전쟁이 일어났다. 우르비노 공작에 임명된 조카 로렌초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쫓겨났는데, 레오교황이 쫓아낸 전임 로베레 공작이 배후에서 선동한 것 같았다. 공작에 다시 복귀하려는 로베레를 저지하기 위해 교황이 군대를 보내야했다. 1월부터 시작된 전쟁은 9월말에야 끝났다. 로베레를 다시 쫓아내고 로렌초를 공작에 복귀시켰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전쟁은 레오교황을 빚더미에 앉게 만들었다. 

4월에는 페트루치 추기경의 교황암살사건이 드러났다. 교황의 주치의와 여러 추기경까지 관련된 이 사건은 7월에야 페트루치 추기경과 주치의를 사형에 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배신감과 주위에 대한 불신이 레오교황을 짓눌렀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10월31일에 독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마르틴 루터란 수도사가 95개조 면죄부 반박문을 비르텐부르크 성의 교회문에 내걸었다. 레오 교황은 이 소식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토론회를 열기 전에 미리 토론 주제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교회 문에 게시하는 관행이 있었다. 또 도미니크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는 면죄부를 두고 종종 반목하기도 했다<피터마셜, 종교개혁>. 면죄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나름 긍정적인 요소가 많았다. 면죄부를 구입한 사람은 구원이라는 만족을 얻고, 속죄금은 십자군과 사회복지 등 유용한 목적에 쓰여졌다. 450년의 전통이 그 유용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물며 성베드로 성당을 건립하기 위한 면죄부는 1천년의 교회역사를 이어간다는 명분도 있었다. 요즘에도 우리 불교사찰에서는 기와불사 등으로 사찰건립 비용을 조달한다. 기와를 한 장 사는 만큼 공덕을 쌓는다는 것이다. 베드로 성당을 위해 기부금을 받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교황은 생각했을 것이다. 면죄부 문제가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루터가 연옥을 부정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옥은 기독교인으로 성사를 받고 죽었기 때문에 구원을 보장받았으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정화를 거치는 과정이다. 유대교나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기도하는 관습이 연옥개념으로 정립된 것 같다. 살아있는 유족들은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위령기도, 자선과 대사와 보속 등을 통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관습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며, 불교도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 49제를 지낸다. 힌두교에서는 1000제를 지내기도 한다. 성경에 직접적인 근거는 없지만, 마태 복음, 고린도 전서 등에 간접적인 근거는 있다. 이런 내용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에 교황청은 충격을 받았다. 이 반항하는 수도사가 대단히 무지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화려한 성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성당은 일종의 공공재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그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기도 한다. 대중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분위기가 중요하고 이를 위해 성화와 성물이 필요하다. 이러한 수단을 깡그리 부정하고 어떻게 양떼들을 인도한단 말인가.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부정하고 자기들 유리한대로 결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타락한 수도사다.     

  루터의 공격을 돈 문제로만 인식 

  교황은 루터의 공격을 돈 문제로 이해했다. “구원은 신앙만으로 충분하고, 연옥은 성경에 근거가 없으므로 연옥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면제부도 불필요하다. 그리스도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으므로 교회에 십일조를 바칠 필요가 없다. 호화로운 성당과 갖가지 성물, 성인숭배는 신과 직접 소통하는데 장애가 된다.” 이러한 발언은 돈 내기 싫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에둘러 포장한 것으로 보였다. 

 돈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사태를 가볍게 봤고 루터가 가진 생각의 위험성을 꿰뚫어 보지 못했던 게 아닐까. 루터라는 수도사가 카톨릭의 신학체계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 있는 핵무기를 가졌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독일 사람들이 루터를 지지하는 현상을 지적수준이 높은 이탈리아에 대한 열등감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시오노나나미, 신의대리인>.      

  독일의 피해의식

  교황은 추기경시절에 형제들과 독일을 여행하기도 했지만 독일인의 이탈리아에 대한 혐오를 절실하게 체감하지 못한 듯하다. 당시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어 교황의 힘이 프랑스 등에 비해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반면에 스페인이나 프랑스는 사실상 교회를 국왕 밑에 두고 있어 교회의 돈이 로마교황청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사람들은 자기들만 돈을 뜯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강력한 이탈리아 혐오증을 낳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강대국이 된 프랑스와 스페인의 각축장이 되고 있었다. 모두들 풍요로운 이탈리아를 뜯어먹으려 하고 있는데, 독일은 여기에 숟가락을 얹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었다. 이런 이탈리아에 독일이 호구가 되고 있으니, 독일 사람들은 더욱 분개했다. 

  민족국가가 성장하고 있었고 ‘유럽은 하나’라는 생각이 무너지고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기독교 아래 같은 형제’라는 생각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독일사람들은 이탈리아에 교회를 세우는데 왜 우리가 돈을 내야하느냐 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루터는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베드로 교회당 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라고 묻고 있다<95개조 중 86번 째>.      

  교황들의 부도덕한 모습

  루터는 당시 교황들이 얼마나 돈에 쪼들렸는지 알지 못했다. 당시 로마 등 고위성직자들은 부유한 생활에 젖어있어 돈이 많이 들었다. 반면에 신앙심이 떨어진 시기여서, 교황령의 봉신들은 연공금 납부를 게을리 하고 있었다. 이들을 손보기 위해서도,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도 군대가 필요했다. 군대와 전쟁으로 교황들은 빚더미에 앉았다. 

  한편 인쇄술의 발달은 교황들의 나쁜 모습을 알프스 북부에 생중계하고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의 피렌체 수도사 사보나롤라 화형, 독신주의 위반, 그리고 아들을 위한 교회국가 건설 등 비행이 전 유럽에 퍼졌다. 율리오 2세는 갑옷을 입고 직접 전쟁터에 나가는 비성직자의 모습으로, 레오10세는 각종 사치스런 축제와 교황령 정복 전쟁 등으로 악명을 더해갔다. 더욱이 알프스 이북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의 낙천적이고 남녀문제에 관대한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인에게 교황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는 도덕적 타락의 원천이었고, 이런 타락한 교황들이 독일의 돈을 갈취하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했다. 루터가 아니라도 누군가 깃발만 들면 소요가 일어날 판이었다.      

 루터의 행운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

 그런데도 교황은 이 사건이 가져올 파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에 마음을 뺐기고 있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독일까지 아우르는 황제가 막 탄생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견제심리가 작용해서 프랑스왕 프랑수와1세도 입후보했다. 그러니 투표권을 가진 선제후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루터를 지지하는 작센 선제후를 카를 5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카를 5세도 루터를 장래에 교황에 대한 견제수단으로 이용하려했는지 모른다<시오노나나미, 신의대리인>. 루터는 운이 좋았다. 교황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루터의 신학체계와 포퓰리즘 

  더욱이 교황은 이 수도사가 얼마나 영리하고 혁명적인 신학체계를 갖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루터는 모든 주장의 논거를 성경에 의지했다. 그러니 논리가 간명해서 일반사람도 알기 쉬웠다. 연옥개념이나 면죄부는 성경에 근거가 없으니 폐지해야 하고 구원은 면죄부가 아니라 믿음만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만인사제설도 성경에 근거가 있었다. 루터가 주장한 내용은 모두 성경에 근거가 있고 돈이 들지 않으며 실천하기 쉬운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주었다. 루터가 어떻게 대중의 환호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지세력이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사제가 결혼해야한다는 주장은 더욱 많은 지지자를 이끌어냈다. 르네상스시대에 많은 성직자들이 숨겨둔 애인과 자식이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를 제외하고는 아들을 조카로 불렀을 뿐이다. 독신주의는 성직자들의 위선을 낳았고 일반신도들의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교회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기존 교회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루터는 성경에 사제의 결혼을 금지하는 구절이 없고, 만인사제설에 따라 모두가 사제이니 사제도 결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타고난 정치인이었고 엄청난 공약을 했다. 자신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 또 사제들의 결혼을 장려했다. 튜튼기사단의 단장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세속군주가 되었다. 이것이 호엔촐레른 가문과 프로이센의 시작이다<피터마셜, 종교개혁>.     

  루터의 농민전쟁 반대

  1425년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전쟁에 루터가 반대의견을 표시한 것도 대단히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작센 선제후 등 세속 군주들의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루터가 농민반란을 지지했다면 제후들이 지지를 철회했을 테고 종교개혁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개혁의 대상을 종교에 한정했다. 로마서 13장을 거론하며 모든 정부는 신이 세운 것이므로 그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싸워야 할 적을 최소화한 것이다. 종교혁명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사회개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얀후스의 백조와 루터  

  루터도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큰 파문을 가져올지 몰랐다. 비텐베르그 성의 게시문은 토론을 위한 자료였을 뿐이었고, 루터가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행운이 따랐다. 100년 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을 당한 얀 후스의 말이 생각난다. “당신들이 지금 거위 한 마리를 태우고 있지만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태어날 것이다” 루터가 바로 후스가 말한 백조가 아니었을까.      

인간의 모든 분쟁은 돈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돈 문제로 독일에서 소요가 일어났다는 교황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돈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강구하지 못해 종교개혁을 맞았다. 

최근 정부가 긴축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지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국민의 세금을 아껴 쓰려는 태도를 우리는 장려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절약해서 살림을 꾸려가려는 취지를 존중해야 한다. 로마 교황들이 세입을 초과한 사업을 벌리고 돈을 과다하게 쓴 결과 종교개혁이란 파국을 초래했다. 현대국가도 돈을 물 쓰듯 하면 이러한 재앙을 맞게 된다. 정부의 지출은 국민들의 피땀으로 번 돈이기 때문이다. 아껴 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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