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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Dec 03. 2023

카를5세의 기난긴 여행

전쟁과 종교, 신은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카를5세의 기난긴 여행          

  카를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스페인과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신대륙을 포함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통치했다. 신대륙 개척 등으로 영토를 늘리며 스페인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끝없는 반란과 전쟁에서 제국을 지켜냄으로써 황제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시기로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 제후들과, 그리고 욱일승천하며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와 싸워야 했다.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와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기나긴 전쟁을 해야 했다. 먼저 G1이 된 프랑스는 카를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경쟁자로 등장하자 질투와 불안 속에서 전쟁을 도발했다. 끝없는 전쟁 속에서 카를5세는 순간순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했다. 더욱이 카를의 제국은 프랑스처럼 한군데 몰려있지 않고 유럽의 이곳저곳에 산재해있었다. 통치를 위해 자기 제국 내 여러 나라를 40회 이상 여행했고, 그 시간이 통치의 1/4에 달했다고 한다. 그 자신도 그의 일생을 ‘하나의 긴 여행’이었다고 술회했다<Wikipedia>. 도로에서 통치했다고 할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당시의 열악한 교통사정과 문화 차이 등을 감안할 때 모든 사건사고를 직접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상당부분을 믿을 수 있는 대리인을 통해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큰 버팀목이었겠지만 엄청난 심리적 압박과 어려움을 참고 제국을 관리해간 힘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왕가의 상속자        

  카를의 친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이고, 외가는 이슬람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내고 신대륙을 개척한 스페인왕국이었다. 카를에게는 많은 행운이 따랐다. 원래 카를의 어머니 후아나는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2세의 자녀 중 왕위계승 서열이 3번째였다, 그런데 언니와 오빠가 자식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후아나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1504년 어머니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아버지인 필리프는 2년후 사망했다. 후아나는 남편이 죽자 정신병이 악화되어 스페인에 유폐되었다. 카를은 부모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이, 플랑드르에서 고모 마르가레테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는 독일과 스페인을 물려받게 될 카를의 교육에 주의를 기울였다. 직접 읽기, 쓰기를 가르치고, 당대의 석학인 에라스무스와 하드리아노 6세 교황이 되는 아드리안을 가정교사로 들여 카를이 착실하게 제왕학 수업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은 쉽지 않았고, 산 넘어 산인 기나긴 여정이었다. 스페인사람들은 플랑드르에서 자란 카를을 외국인으로 간주하며, 스페인에서 나고 성장한 동생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를의 스페인 왕위 승계를 위해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1515년 카를의 가정교사인 아드리안 주교는 아라곤의 왕이자 스페인의 섭정인 카를의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를 방문했다. 그가 후계자로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 형인 카를이 정당한 후계자임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아드리안은 1516년 1월 페르난도 2세가 서거하기 전에 카를을 후계자로 한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나무위키>.      

  1516년 3월 14일 카를은 페르난도 2세의 장례식 직후에 어머니 후아나와 함께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통치자로 선언되었다<위키백과>. 카를은 이러한 정지작업이 끝난 후에야 스페인에 도착했고 1517년 11월 4일에 어머니 후아나를 방문하여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치권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 의회에서 몽니를 부려 카스티야어를 배우고, 외국인을 관료로 임명하지 않으며, 카스티야의 재산을 국외반출하지 않고, 어머니 후아나 여왕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조건을 수락한 후에야 공동 통치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동생 페르디난트를 플랑드르의 고모에게 보냈다. 스페인에서 인기가 좋은 페르디난트는 카를의 왕권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나무위키, 페르디난트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다     

  1519년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언 1세의 뒤를 잇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 입후보 했다. 스페인까지 차지한 강력한 군주의 등장에 독일 제후들은 자신들의 권한이 위축될까봐,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 때 고모 마르가레테가 푸거가로 부터 100만 굴덴을 빌려 선제후들에게 뿌림으로써 상황을 역전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선거에는 돈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프랑수아1세는 30만 굴덴을 썼다는 소문이 있다<위키백과>.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황제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자 카스티야 지방 자치도시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반란에도 불구하고 카를 5세는 스페인으로 바로 돌아갈 수 없었다. 황제 대관식 및 1521년 1월 27일 루터 사건을 다룰 보름스(Worms)제국의회를 개최하여야 했다. 카를 5세는 루터에게 소명기회를 주며, 기존 입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루터는 거부했다. 이에 1521년 5월 8일 루터를 파문하고 그의 저서를 금서로 지정하며, 제국추방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보름스 칙령은 제후들의 비협조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확산되었다. 카를5세에게 는 사후관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스페인의 반란진압         

  스페인에서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섭정을 맡은 아드리안 추기경은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아드리안 추기경은 카를 5세를 설득하여 섭정을 2명 늘리면서 모두 스페인 사람으로 뽑았다. 그리고 반란군이 사회혁명적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며 귀족들을 왕당파로 끌어들였다. 귀족들이 왕을 지지하게 되자 1521.4월 빌랄라르 전투에서 반란군의 주력을 격파하고 1522.2월 반란의 수도인 톨레도의 항복을 받아냈다. 카를 5세는 반란이 평정된 후(1522.7월)에야 스페인에 도착할 수 있었다<Wikipedia, Revolt of the comuneros>.           

  카를 5세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소수의 주모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일괄 사면했다. 그리고 전국 의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할 것을 약속하고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에도 섭정이나 행정 요직에 스페인 사람을 기용하며, 자치권을 광범하게 부여했다<나무위키>. 1524년에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은 농민전쟁이 일어났지만, 카를5세는 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골치 아픈 독일의 문제는 동생 페르디난트가 처리하도록 위임했다.      

  프랑스와의 끝없는 전쟁     

  하지만 프랑스왕 프랑수와 1세와 끝없는 전쟁을 해야 했다. 백년전쟁후 민족국가로 거듭나면서 패권국이 된 프랑스는 새로운 강대국의 등장에 불편해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부터 카를5세와 대립했다. 프랑수와1세와의 싸움은 이탈리아를 누가 지배하느냐는 유럽의 패권전쟁이기도 했다<encyclopedia>. 밀라노 등 북이탈리아를 카를5세에게 빼앗기면 이미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는 남쪽의 나폴리왕국과 함께 자연스레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이 프랑스 편을 든 것도 이 포위망에서 빠져 나오려는 시도였다.      

  1525년 밀라노에서 파비아 전투가 벌어졌다. 전력은 프랑스가 앞섰지만 기습과 화승총을 활용한 탁월한 전술로 황제군은 프랑스군을 패배시키고 프랑수아 1세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왕은 밀라노, 플랑드르, 부르고뉴를 모두 포기한다는 마드리드 조약(1526.1월)에 동의한 후 풀려났다. 프랑스는 왕의 석방을 위해 오스만 제국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 전까지 십자군 전쟁을 하던 이슬람 제국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었고,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교황은 파문도 하지 않았다. 1526년 오스만의 슐레이만 대제가 헝가리를 침입했고 헝가리는 대패했다. 페르디난트의 처남이자 왕인 러요시 2세까지 전사했다.      

  프랑수아 1세는 석방된 후 마드리드 조약이 강요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 클레멘스 7세,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와 함께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코냐크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카를 5세는 스페인 군과 독일 용병을 동원하여 1527년 5월에 로마를 공격하고 약탈을 방조함으로써 교황을 응징했다.      

  여유가 생기자 루터의 이단문제를 다루기 위해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개최하였다. 보름스 칙령대로 루터를 이단으로 단죄할 것을 결의하였지만, 신교제후들의 반발로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개최하여 신구교의 교리를 더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황제가 일방적으로 카톨릭 편을 들자 개혁을 지지하는 제후들이 슈말칼덴 동맹으로 결집했다. 이렇게 제후들이 대놓고 반항하는데도 카를 5세는 강경진압을 할 수 없었다. 오스만투르크와 프랑스가 합세해서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1529년 오스만군은 빈을 포위하기도 했다.     

  1529년 고모 마르가레테와 프랑수와 1세의 어머니인 루이제가 황제와 프랑수와 1세를 대신해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당분간 평화를 누렸다. 그리고 고모는 1년 후에 죽었다. 카를 5세에게는 사실상 어머니였다.      

  1535년 11월에 밀라노 공작(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이 후계자 없이 죽자,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친아들 펠리페를 그 자리에 앉혔다. 분개한 프랑수아 1세는 1536년 3월 오스만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후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만 제국 해군이 이오니아해 연안의 프레베자 해전에서 카를 5세 휘하의 해군을 격파하였으나<오가사와라 히로유키, 오스만제국>, 프랑스군은 밀라노 점령에 실패했다.      

  1539년에는 아내 이사벨라가 유산을 하고나서 죽었다. 포르투갈 공주 출신으로 카를이 믿고 사랑했으며, 남편이 외국에 있을 때 섭정으로 스페인을 훌륭하게 다스린 왕비였다. 카를5세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죽는 날까지 그녀의 초상화를 휴대했다고 한다.       

  1542년에도 프랑수아 1세와 오스만 제국은 다시 힘을 합쳐서 이탈리아를 공격했다. 프랑스-오스만 연합함대가 니스를 점령했으나 카를은 헨리 8세와 다시 손을 잡고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였다. 이에 프랑스군은 밀라노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1544년 평화 조약이 맺어지면서 프랑수와 1세와의 전쟁은 종식되었고, 모든 영토도 전쟁 전으로 복귀되었다<위키백과, 이탈리아전쟁>. 아무 소득도 없는 허무한 전쟁이었다. 3년후 프랑수와 1세는 죽게 된다. 카를5세가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 동맹을 맺은 것이 1540년대의 휴식을 가져왔는지 모른다. 사파비왕국과 오스만제국의 전쟁으로 슐레이만 대제가 동쪽 전선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Wikipedia, The Indian Ocean in world history? Milo Kearney>.     

  신교제후들과의 전쟁과 승리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이 마무리 되자 카를 5세는 미뤄왔던 종교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카를5세가 외부전쟁에 몰두하느라 1530년대에는 독일 내에서 신 구교 간 갈등이 군사 대결로 비화하지 않았다. 다만 황제는 종교가 광대한 영토의 접착제 역할을 할 것이라 믿었고, 제국의 안정을 위해 종교의 통일을 꾀했다<E.M번즈,서양문명의 역사Ⅱ>. 1545년 교황바오로 3세와 협의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개신교 측을 포용하기보다 기존 카톨릭의 입장을 강화하는 ‘반대 종교개혁’이었고 종교개혁을 분쇄해야 한다는 카를5세의 신념을 더욱 강화했을 뿐이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지원도 있었다. 카를 5세의 독일원정에 보병 12,000명과 기병 500명을 지원해주기로 했다<위키백과, 바오로3세 교황>. 이에 카를 5세는 루터가 죽던 해인 1546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의 루터파 제후들을 공격했다. 당시 신교측 슈말칼덴 동맹군은 상호간의 협력이 원활하지 않아 황제군에 각개격파 당했다.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황제군이 대승함으로써 루터파 제후들의 슈말칼덴 동맹은 궤멸되었다.      

  카를 5세의 오만과 반란     

  전쟁에 승리하자 카를 5세는 오만해졌다. 제후들과의 약속을 함부로 무시했고, 동생 페르디난트가 1531년 선거를 통해 다음 황제로 내정되어 있는데도 아들 펠리페 2세를 황제로 앉히려고 시도했다. 형제간의 동맹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카를 5세는 광명정대하지 못했다. 그동안 거대한 제국을 유지 관리 할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카를이 프랑수와 1세와 싸우는 동안 페르디난트는 독일 내의 문제를 해결하고 동유럽에서 오스만투르크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 1529년 오스만제국에게 빈이 포위당하는 위기 속에서 이를 방어해낸 공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교도 제후들을 제압하자 동생을 토사구팽(兎死狗烹)한 것이다. 독일의 카톨릭 제후들까지 반발했다. 펠리페 2세가 황제가 된다면 제국이 사실상 스페인의 속국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제에 대한 불만세력이 늘어나자 1551년 개신교 선제후 등은 프랑스의 앙리2세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선제후들은 인스부르크에 있던 카를 5세를 사로잡으려 했고, 황제는 가까스로 도망을 쳤다. 그 결과 1552년 8월 2일 파사우 조약과 3년 뒤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황제 측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종교화의를 맺었다.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인정되고, '영주민은 영주의 종교를 따른다'는 원칙이 결정되었다. 카를5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 페르디난트는 선제후들과 합의하여 이를 밀어붙였다. 카를 5세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무력감 속에 1556년 속세의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스페인의 유제트 수도원으로 향했다.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는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는 신성로마제국을 물려주며….        

   카를5세에 대한 평가전쟁과 종교       

   카를 5세는 프랑수와1세와의 끝없는 전쟁으로 신대륙에서 들어온 황금 등 제국의 자원을 너무나 많이 허비했다. 후계자인 펠리페 2세에게  빚더미를 남겼고, 제국이 다음 세기에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프랑스와 평화를 모색하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했으면 훨씬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실제로 당시 상인들은 지중해와 대서양의 상업망 확충과 보호를 위해 이슬람 해적 등을 막아주기를 기대했다<Wikipedia, Charles V>.            

  둘째 카를 5세는 종교에 관한한 너무 고지식했다. 독일에는 30년 가까이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있었다. 농민전쟁, 프랑스-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때문에 신교측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향유되고 있던 자유를 빼앗는 정책은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고 성공하기 힘들다. 신교에 대한 무력 탄압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반(反)합스부르크 항쟁으로 변모시켜 제후들과 도시시민계급이 결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조용석, 루터소송사건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연세대>. 다음 세대에서 제국 세입의 보고였던 네덜란드를 잃어버린 것도 신교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원인이었다. 마치 홍콩의 자유를 뺏어 금융중개지를 잃어버린 시진핑처럼….      

  카를5세는 1527년 클레멘스 교황을 응징하기 위해 로마를 철저히 파괴하면서도, 종교개혁을 위한 공의회 개최를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종교의 타락을 교황 개인의 일탈로 보고 종교교리나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독일 선제후들의 입장을 깊이 알지 못했다. 독일 선제후들은 돈을 교황청에 뺐기는 것이 싫었다. 루터의 건의에 따라 수도원 등 재산을 몰수해서 이미 사용했는데 어떻게 돌려주겠는가. 제후들의 신교 지지는 종교의 교리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강했다. 독일은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있어 교황청의 성직세 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는 왕이 성직자 임면권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교황청에 돈을 뺏기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의 제후들은 왜 독일만 교황청의 봉이 되어야 하느냐며 불평했다. 카를5세는 로마교황과 협의해서 독일제후들에게도 프랑스와 같은 성직자 추천권 등을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영국도 수장령을 선언해서 성직에 대한 임명권을 왕이 갖고 있었다.       

  또한 마음의 문제인 종교를 무력으로 통일하겠다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처럼 다른 종교를 끌어안아야 대제국을 이룰 수 있다. 관대한 종교정책으로 제국을 부유하고 위대하게 만든 오스만제국을 목도하면서도 벤치마킹하지 못했고, 스페인에서 유태인과 아랍인들을 내쫓아 경제를 위축시킨 실패한 정책을 유럽전체에 적용하려했다. 숙적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내의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면서도 오스만투르크와 결탁하고 독일의 신교권 제후들을 지원하는 유연함을 보여줬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알고 있다. 종교통일은 허상이었고 풍차였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알고 달려들었듯이 카를 5세는 풍차인 종교문제를 거인으로 알고 뛰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이란 진짜거인과 싸우려는 통 큰 대의를 보여주지 못했다. 종교문제는 종교인에게 맡겨두는 것이 옳았다. 세속의 군주가 너무 깊이 종교 문제에 개입했다는 느낌이다.      

  신은 종교개혁을 원했다           

  카를의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유지한 힘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헌신적인 노력이었다. 그의 성공 여정에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언 1세의 심모원려, 서로 믿고 의지하던 아내 이사벨라, 카를을 키운 고모 마레가르테, 독일을 책임진 동생 페르디난트, 스승 아드리안 등 주변사람들이 큰 힘이 되었다. 인복이 많았고 가문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는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모범생이었고 일찍 죽은 아내에 대한 순정,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노예화와 착취를 금지하려 한 점을 보면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기에는 포부가 너무 작았고 융통성이 부족했다.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이룩하였지만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당시 백성들이 종교 갈등과 전쟁으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하다보니 제국의 기초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 때문에 종교개혁이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카를5세가 더 유능했다면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은 종교개혁을 원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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