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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Oct 07. 2023

박해 속에서 꽃을 피운 영어성경

윌리엄 틴들의 영어성경과 토마스 모어의 박해

윌리엄 틴들의 영어성경과 토마스 모어의 박해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주 옛날에는 전 세계의 말과 문자가 하나였다.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바빌로니아 평원에 정착했는데, 그들은 벽돌을 굽고 역청을 이용해서 하늘에 닿는 탑을 건설하려고 했다. 신을 찬미하기보다 이 건축물을 통해 자신들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그들 공동체를 결속하려했다. 신은 이들의 교만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이들의 언어를 다르게 했다. 건설현장에서 말이 통하지 않자 공사는 중단되고 그들은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지식의 독점과 라틴어 고집 

  종교개혁의 역사를 보면 카톨릭제국도 바벨탑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 것 같다. 로마 카톨릭의 공용어는 라틴어였다. 성경도 라틴어로 씌어졌고 설교도 라틴어로 했다. 성직자와 유럽의 지식인들은 라틴어로 소통했다. 과거 동아시아권의 한자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사용하는 고대 로마의 언어를 공용어로 한 것은 교회가 지식을 독점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문제는 영국 같은 변방에서는 라틴어성경을 읽지 못하는 목회자도 많았고 대중은 라틴어 설교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자국어를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국어 읽을거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으나, 로마교회는 지식의 확산이 두려워 라틴어를 고집하고 있었다. 드디어 루터가 개혁을 외치며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자국어 성경번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질서와 권력에 대한 위협이었고, 루터 등 종교개혁가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루터는 농민들도 이해할 수 있는 구어체를 사용해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보급하여 의식혁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자국어 성경번역을 금하고 있었던 만큼 독일어 성경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이었고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소박한 삶과 면죄부 등 카톨릭 제국의 타락을 더욱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위클리프 영어성경의 한계와 재번역 필요성

  당연히 영어 성경에 대한 요구도 일어났다. 성경은 과거에 영어로 번역된 적이 있었다. 14세기 말에 최초의 종교개혁자 위클리프가 로마 교황청에 저항하는 방편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다만 당시는 인쇄술이 보급되지 않아 영어 성경의 대량보급이 불가능했고, 위클리프 사후 로마교황청의 탄압이 강화되자 영어 성경의 보급은 확산될 수 없었다. 게다가 위클리프 성경은 그 번역 대본이 성서 원전(히브리어, 그리스어)이 아니라 라틴어성경이었고, 중세 언어인 고어가 많아 일반 독자들이 읽기 용이하지 않았다<위키백과>. 그리스 원본을 바탕으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번역할 필요성이 있었다. 윌리엄 틴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      

  틴들은 1494년 글로스터에서 태어나서 1515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성서연구를 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교황과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그리스원전에서 성경을 다시 번역했으며, 평신도들의 성경읽기를 통한 신앙개혁을 시도한 에라스무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틴들도 성경번역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는 신이 선택한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언어에 재능이 있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 등 7개 언어를 할 줄 알았고, 종교적 열정도 충만했다. 틴들은 새로운 영어 성경을 보급하여 영국을 개혁하고 싶었다. 영어성경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수지맞는 사업이 될 수도 있었다. 


  영어성경 인쇄와 재정난

  그러나 당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로마 교황청이 엄격히 금하고 있었고, 붙잡힐 경우 화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틴들은 안전을 위해 종교개혁의 발상지이자 루터가 활동하고 있는 독일 비텐베르크로 갔고, 루터의 번역을 직접 참고하고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하여 영어 신약성경을 완성했다(1526년). 인쇄를 하면서 사람들이 휴대할 수 있도록 핸드북 형태로 만드는 혁신도 단행했다. 아마 종이를 아끼고 부피와 무게를 줄여 운반비용을 절감하려했는지 모른다. 틴들은 대륙에서 밀 등을 수입하는 배의 곡식 통에 6천권을 숨겨 영국으로 보냈다. 한편 영국에서는 당시 런던 주교 턴스텔이 영어성경을 수거해서 불사르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틴들은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문제는 기발한 착상으로 해결되었다. 틴들의 친구인 오거스틴 팩킹톤이 턴스텔주교에게 가서 “내가 책을 수거해 올 테니 돈을 달라”고 꼬셨는데, 턴스텔이 선뜻 돈을 주자 팩킹톤은 성경책을 넘겨주면서 책값을 틴들에게 전달했다. 틴들은 그 돈으로 더 많은 책을 찍어 영국으로 보낼 수 있었는데, 탄압하던 영국 주교의 돈이 마중물이 되어 영어성경이 보급될 수 있었다. 


  영어성경의 혁신적 용어 선택

  틴들은 영어 성경에서 로마 교황청에 유리하게 사용된 단어들을 새로운 용어로 변경했다. “고해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느니라” 가 카톨릭의 의례인 고해성사를 연상시키므로 ‘고해’를 그리스어 원전에 가깝게 신 앞에서의 ‘회개’로 바꾸었다. 에라스무스도 이렇게 번역했었다. 카톨릭 제국의 지체처럼 느껴지는 ‘교회(church)’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회중(congregation)’으로 대체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교황 지배권의 근저를 흔들었다. 

  또한 기존 라틴어성경에서 ‘믿음 소망 자선’으로 되어 있던 고린도 전서 13장의 내용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번역했다. 그리스어 ‘아가페’를 기존성경에서는 ‘자선’으로 번역했으나 틴들은 ‘사랑’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이 자선이란 단어가 면죄부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제’를 ‘장로’로 번역했는데, 로마 카톨릭에서 일반신도 위에 사제 계급을 두고 있는 제도가 성경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토마스 모어의 영어성경 박해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된 카톨릭교회의 핍박은 가혹해 졌다. 가장 적극적으로 탄압에 앞장선 사람이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토마스모어였다. 유토피아를 쓴 사람답지 않게 토마스 모어는 구체제의 수호자가 되었다. 출세를 함에 따라 그렇게 변해간 것인지 모른다. 유토피아를 쓸 당시에는 낮은 계급이었으나 틴들을 박해할 때는 재상(대법관 겸임)이 되어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틴들의 성경이 카톨릭 교회를 위협하고 있으며 틴들이 대중들을 선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모어는 점점 더 강경해져서 책만 불사른 게 아니라 책을 반입한 사람들도 화형에 처했다. 영어성경을 반입한 베이필드와 런던의 가죽상인 존 튜크스베리, 틴들의 서적을 가지고 있던 법률가 제이스 베인햄을 화형시켰다. 베인햄은 화형당하면서 “틴들의 저작에 오류가 없으며 영어 성경이 무척 좋다”고 고백했다<이동희, 종교개혁가들>. 

  윌리엄 틴들은 토마스 모어가 성경보다 전통을 더 높게 평가한다며 비판했다. 고백성사, 순례, 연옥, 십자가 기둥에 기도하기 등 가톨릭 전례들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바보스러운 의식과 성사이며, 이런 카톨릭의 전례를 옹호하는 모어는 명예와 권력, 돈을 위해 복음의 진리를 팔아버린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고 비난했다<이동희, 전게서>.     

  토마스 모어의 구체제 수호와 죽음

  토마스 모어는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했고, 로마 카톨릭 제국을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의 행위에는 나름 일관성이 있었는데, 교황청의 결정에 불복해서 이혼하려는 헨리8세에게도 반대했다. 그 결과 그는 처형되었다. 

  토마스 모어가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본인은 대의라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끝까지 구체제와 기득권을 옹호했다. 유토피아를 쓴 이상주의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교황의 승인을 얻지 않고 이혼을 강행한 헨리8세의 행위는 절차상 하자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왕비 캐서린의 조카가 당시에 로마를 파괴(사코디로마)하고, 교황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카를5세 황제였다. 교황의 불승인은 카를 5세의 강박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사건만 없었다면 왕의 이혼 건은 관행상 승인되었을 사안이었다. 헨리8세는 교황의 불승인 문서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교황은 자기의 결정을 강제할 힘도 없었다. 그래서 헨리8세는 자기 고집대로 이혼을 강행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카톨릭 제국에서 탈퇴해서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반면에 토마스 모어는 보수적이었다. 형식에 사로잡혀 타락한 교회의 이익을 지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영국의 이익을 꾀하지도, 성경읽기를 통해 일반 대중을 변화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았고 에라스무스와 친구였던 옛날의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종교개혁으로 자기들의 계급적 이익이 침해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반동세력이 되어있었다. 틴들도 화형을 당했지만, 그가 번역한 성경은 살아남았다. 영국의 공식번역인 킹 제임스 성경의 기반이 되었다. 70%정도를 틴들의 번역에 의존했다고 한다.  


  바벨탑 붕괴와 동일한 방법의 징벌

  지금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알고 있다. 신은 헨리 8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로마 카톨릭에 대한 징벌에 더 역점을 두었던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서유럽의 공용어가 사라지고 나라마다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카톨릭 제국은 분열되어 1/3이 분리되어 나갔다. 영어, 독일어 등 자국어 성경 번역이 라틴어 제국의 몰락을 재촉한 것이다. 신이 카톨릭 제국을 벌하면서 바벨탑을 무너뜨릴 때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


  사법부의 신뢰 회복 기원

  최근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부결되었다. 정쟁이 심화되어 무너진 사법부의 신뢰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판결이 나도 판사의 성향이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재판기간도 무한정 느려지고 있다. 판사님들이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하여 공평무사한 판결을 신속하게 내려 주시기를 기대한다. 신이 판사님들의 말까지 달라지게 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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