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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Sep 28. 2020

'난 남자야~ 이제 난 남자야~'

내가 한 말은 아니고 그 옛날 가수 박지윤이 부른 노래.

'나도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육아와 살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한 엄마의 넋두리다.



요즘 아빠들이야 그렇지 않지만, 구시대적 아버지 모습은 대체로 이렇다. 늦은 밤까지 회사일 또는 회식 후 귀가. 술냄새 폴폴. 아빠 냄새란? 삼겹살에 소주, 담배 냄새 콜라보. 주말에는 '주중에 일하느라 힘들었다'며 늦잠자기 일쑤고 부인한테 '어이 거기 물 좀 떠 와'라고 윽박이나 지른다. 가끔 일찍 일어나는 주말은 접대든 취미든 골프 치러 나가는 날. 골프만 치면 다행인데 가서 무진장 취해서 돌아온다. 전업인 와이프 입장에선 월화수목금금금의 연속. 그러다 퇴직하고는 삼식이라는 핀잔만 들으며 와이프 눈치 보고 지낸다. 아니 모든 아빠가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맹비난받는 아저씨들을 극단적으로 묘사하자면 그렇다.



"여보 나도 그냥 옛날 아저씨들처럼 살고 싶어."


육아 휴직 1년간 전업주부로 살아본 내가 얼마 전 남편한테 이렇게 털어놨다. 아저씨 비하도 아니고 전업주부가 너무나 힘들어서 한 소리다. 나도 아침에 출근해서는 저녁 늦게까지 바깥으로 돌다 집에 오고 싶다. 가정일은 집사람에게 맡겨 놓고, '아이는 집사람이 잘 키워주니까'라며 내 일에만 매진하고 싶다. 주말에는 새벽 4~5시에 일어나 골프 캐디백을 챙겨 나가고 싶고 다음 날엔 '나 일하느라 힘들었잖아'라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퍼질러 자고 싶다. 정말 속없는 소리지만 헛소리라도 지껄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은 거다.



매일 매일 해도 티도 나지 않는 청소에 엄마 바라기인 아기를 업든 베이비룸에 가둬놓든 하고는 음식도 해야 한다.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열심히 아기 밥을 만들어 놨더니 아기는 모조리 바닥에 투척해 버린다. 특히 우리 아기는 매우 독립심과 자아가 강한 아기라서 일단 던지고 본다. 애 앞에서 며칠 전에 딱지치기를 보여준 게 잘못이었나. 흑흑. 땅바닥에 좌르르 투하한 음식물을 대강 치우고 나면 아기는 밥 먹은 손으로 나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긴다. 내 포니테일이 말총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고구려 민족의 후예답게 한바탕 내 머리카락을 당기고 나면 밥알로 머리가 말 그대로 떡이 된다.

(그 어느날 먹은 비트 쌀국수...)

  



대충 닦은 먹은 자리엔 밥알이 짓이겨져 있고, 다음 날 보면 딱딱하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더 절망적인 건 이걸 애가 밟고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는 거다. '아, 아까 너 잘 때 마대 걸레로 조용히 다 닦아놨는데...' 낙심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걷는 아기를 둔 가정집이 반짝반짝 깨끗하기란 인사고과 A만큼 어렵다.


주말이나 공휴일엔 남편이 같이 육아를 해준다고는 하지만 주 양육자가 엄마라면 결국 힘든 일은 대체로 엄마 몫이다. 힘든 일이란 우는 아기 달래주기, 잠재우기 등을 말한다. 24개월 이전의 아기에게 엄마(또는 주 양육자)는 곧 자기 자신이라서 그렇다. 이 시기 아기는 엄마와 자신이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기 전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엄마는 움직여야 한다. 그게 밤이든 낮이든.


남편이 아기와 잘 놀아주더라도 힘들 때, 아플 때 찾는 건 엄마다. 졸리거나 배고플 때도 엄마를 찾을 공산이 크다. 말은 할 수 없고, 분명한 니즈는 있기 때문에 자기 대신 이를 해결해줄 이를 찾는 것이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 처리에서는 엄마가 필수다. (어려운 얘기지만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뇌 기관이 안와전두엽인데 이게 성숙해지는 시기가 18개월 무렵이라고 한다. 그때까진 엄마가 아기의 감정적 니즈를 충족해줘야 한단 얘기다.)


이런 이유로 지금 내가 가장 존경하는 존재는 UN 총재도 정치가도 기업인도 인권운동가도 아닌 전업주부다. 전업주부들은 매일 반복되는 노동과 무보수에도 지치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낸다. 한 집안, 적게는 두식구 많게는 대여섯식구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뒷바라지 살뜰하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보고 또 1년 휴직하라고 한다면? 정중히 거절한다. 차라리 신입사원으로 1년 회사 더 다니라고 하시라.


그나마 우리 가정의 경우 남편이 주말에 전적으로 살림을 도맡아 해주니 집이 집다운 모습을 갖추고있다. 나 혼자 주중에 살림을 하려면 정말 눈가리고 아웅식이다. 남편이 이도저도 도와주지 않는 집은 대체 어느 정도 엄마의 피로도가 쌓일지 우려가 된다. 아빠가 해줄 일은 최대한 육아를 도와주고 말로라도 늘 위로해주는 거다. 여력이 된다면 일주일에 한번씩 화장실과 베란다 청소를 해주면, 아니면 전문 업체라도 불러준다면 1등 아빠, 1등 신랑이다. 행여 아내가 전업주부라고 해서 '집에서 살림하고 애 보는 게 뭐가 힘들어'라고 말했다면, 은연 중에 그런 뉘앙스라도 풍겼다면 우리 남편의 일침을 받아보시라.


" 이혼당하고 싶어?"


내가 구시대의 아저씨들처럼 가정일 내팽개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다고 헛소리나 하니까 한 소리다. 무서운 남자….



Photo by Allef Viniciu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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