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정권의 탄압과 민중 가요의 등장

by 나사

그렇다고 현대 한국 대중음악사를 트로트로만 치부하면 그 다양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가 된다. 라디오가 보급되면서 미국 AFKN 방송을 통해 미국 대중음악에 자연스럽게 노출된 청춘들은, 1960~70년대 한국에서도 록과 컨트리 음악을 즐겼다. 이러한 환경은 한국 록의 부흥기로 이어졌다.


이 때 등장한 한국 록의 대부가 신중현이다. 그는 고등학교 중퇴 후 미 8군 공연팀 조수로 들어가 음악 실력을 쌓았으며, 1957년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히키 신Hicky Shin이라는 예명을 갖게 된 그는 큰 인기를 얻게 됐으며 마침내 1964년 미8군 연예단을 나와 록밴드 애드 훠를 결성한다. 신중현은 애드 훠 활동으로 ‘한국적 록’ 음악을 추구하며 <빗속의 여인>을 발표한다[i1]. 이어 펄 시스터즈의 프로듀싱을 맡으며 <커피 한 잔>을 히트 시킨다.


음악은 단순한 풍류의 요소가 아니다. 인류의 기원과 함께 음악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든 염원을 담든 어떠한 매개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국가 권력과 음악 역시 뗄레야 뗄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개 ‘고급 문화’의 반대자로서 생겨난 대중 문화는 지배계층의 탄압 대상이었고 이는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반복되어 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은 한국 대중음악의 현대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군부 정권은 음악 검열 작업을 통해 이른바 ‘국민 정서에 건전한’ 가요만을 취급하려했다. 정권은 방송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방송법에 따라 ‘공공 질서를 해치는’ 음악에 대해 TV와 라디오 방송 송출을 금지했다. 록의 대부인 신중현이 대마초 파동으로 구속된 시점도 이 시기다.


1960년대에 10~20대를 보낸 청춘들에게 개인의 자유는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이는 부모 세대가 식민지 지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지켜낸 핵심 가치이기도 했다. 군부의 탄압에 대한 저항 정신은 록과 포크송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포크송은 1970년대 반정부 사상을 가진 도시 청년층의 주축이 됐다. 대표적인 포크 가요가 1971년 김민기가 내놓은 <아침 이술>이다. 이 노래는 이후 반정부적 메시지 때문에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도 이어진 포크송 중심의 민중가요 인기는 김광석, 동물원, 양희은, 송창식 등이 주도했다. 현대 케이팝의 아버지인 이수만 역시 1976년 포크송 가수로 데뷔했으며, 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i1]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45993




이전 11화밀려난 국악과 밀려오는 외래 음악- 일제 시대와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