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산에 녹아내린 고정관념, 그리고 새로운 창

<다윈의 위험한 생각>을 읽고

by 겨울호랑이



들어가며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우리는 종종 하늘에서 내려온 마법 같은 갈고리가 나를 단숨에 끌어올려 주길 꿈꿉니다. 하지만 900페이지에 달하는 대니얼 데닛의 거대한 담론은 우리에게 차갑지만 정직한 진실을 건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차가운 진실과 그 끝에 담긴 저자의 따뜻한 감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늘의 갈고리(Skyhook)는 없다. 오직 지상에서 쌓아 올린 기중기(Crane)만이 존재할 뿐이다."



1.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만능산'의 등장


다윈의 아이디어는 단순한 생물학적 발견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체를 입은 환원주의이며, 모든 것을 설명하고 통일하겠다고 약속하는 관점입니다.

"다윈의 위험한 아이디어는 육체를 입은 환원주의이며, 하나의 웅장한 시각으로 모든 것에 대한 것들을 설명하고 통일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환원주의이다." (p.155)

저자 데닛은 본문에서 다윈의 생각을 '만능산(Universal Acid)'에 비유합니다. 모든 그릇을 녹여버리고 결국 세상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는 강력한 산처럼, 다윈주의는 우리가 소중히 여겨온 '의도'나 '설계'라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녹여버립니다. 저자는 우리가 마주한 세계가 그리스 비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극적 장치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A, C, G, T라는 네 글자로 쓰인 방대한 '멘델의 도서관'에서, 지루하지만 멈추지 않는 알고리즘이 빚어낸 결과물이 바로 우리와 우리의 세계인 것입니다.


2. 요행이라는 갈고리, 실천이라는 기중기


우리는 종종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구해줄 '스카이후크(Skyhook)'를 찾습니다. 하지만 데닛은 슬프게도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기중기(Crane)'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기중기는 요행에 기대지 않습니다. 이미 수중에 있는 부품들로 설계되어야 하며, 단단한 지면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공이산(愚公移山)'과도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마법 대신 묵묵한 노인의 발걸음을 통해 지형이 바뀌듯, 진화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수를 찾아내어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꾸준한 실천'의 역사. 이것이 바로 진화의 역사이며 결과입니다.


"스카이후크는 있으면 매우 좋은 것... 그러나 슬프게도,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크레인이 있다. 크레인은 정직하게 그 작업을 수행한다." (p.141)



3. 우연이 빚어낸 필연의 결과


900페이지에 걸쳐 저자는 데이비드 흄부터 스티븐 제이 굴드까지, 이 '만능산'을 거부하려 했던 수많은 지적 시도들을 논파합니다. 다윈의 알고리즘은 매 순간 완벽한 최적화에 이르지는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긴 시간의 축 위에서 그것은 반드시 한 단계 높은 복잡성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태도를 배웁니다. '雖不常勝 而恒上昇(수불상승 이항상승)', 비록 항상 이기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진화의 역사는 수많은 시행착오(우연) 속에서도 결국 더 정교한 층위(필연)로 올라서는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의 기록입니다.


4. 역설계: 차가운 알고리즘에서 발견한 따뜻한 위안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유전자에 의한 알고리즘 결과라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데닛은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라는 개념으로 이 물음에 답합니다. VCR의 물리적 구조를 아는 것이 '물리적 태도'라면, 그 설계자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읽어내려는 노력은 '지향적 태도'입니다. 우리는 멘델의 도서관에서 쌓아 올린 산물이지만, 동시에 그 과정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밈(meme)이 얽혀 만든 세계에 살고 있지만, 매 순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데닛이 우리에게 건네는 따뜻한 결론입니다.


"그들이 역설계를 할 때면... 타사의 설계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p.400)


나가며 : 녹고 녹이는 과정 속에서 피어나는 창조


다윈의 위험한 생각은 분명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만능산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낡은 것이 녹아내린 토양 위에서,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재료를 만들고 의미를 쌓아 올릴 수 있으니까요. 비록 단숨에 목적지에 닿는 '갈고리(스카이후크)'는 없어도, 한 걸음씩 지면을 딛고 올라가는 우리만의 '기중기(크레인)'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녹고 녹이는 과정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창조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던진 차가운 진실 끝에 서린 따뜻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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