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지식과 통합의 딜레마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전문지식과 통합의 딜레마


인간이 지식을 나열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세상을 살아가며 경험하고 많은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얻게 된 지식의 양은 생각 보다 실로 엄청나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지만 사람들은 하루 30분만으로 10년을 꾸준하게 실천하면 한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 모두가 한 참을 지나야 느끼는 사실이 되었지만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쌓여가는 세상의 지식은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의 크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정보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어쩌면 인간은 남보다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데 만족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흔히 지식을 말하면 지혜라는 단어가 따라온다. 지혜는 단어의 수준을 넘어 개념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지식이란 의미가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이 표현되어질 수 있지만 지혜를 설명하려면 다소 복잡한 개념을 정리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해진다. “하나에 통달하면 세상이치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또한 모두에게 통용되는 말은 아니다. 이것도 자기변명의 수단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의례적 표현이 되는 경우가 사실상 흔하다.


지혜로움은 포용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감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합의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냉철함보다 따뜻함을 추구하고 남에 대한 이해와 삶의 이치에 다가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혜안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혜안은 오안의 하나로 모든 집착과 차별을 떠나 진리를 밝게 보는 눈이다. 오안은 불교 용어로 육안은 중생의 육신이 가진 눈이고 천안(天眼)은 색계의 사람이 가진 눈으로 멀고 가까움, 안과 밖,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다. 혜안(慧眼)은 사람의 눈으로 연기의 실상(實相)을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하고 법안(法眼)은 보살의 눈으로 중생을 제도키 위한 일체의 법문을 비춰보는 지혜의 눈이다. 마지막으로 불안(佛眼)은 부처님의 눈으로 일체를 알며 일체를 비춰보는 눈을 말한다.


지식을 통해 혜안이 열리지 않으면 그 지식은 의미가 없다.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결국은 인간의 의지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다르다.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전문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전문지식은 삶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요즘 세상은 전문성을 강조한다.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 사회가 복잡하여지고 자신의 역할이 구분되어 발전하는 사회에서 전문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한 전문성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사회가 이러한 전문적 영역이 다양화하고 풍성해진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적 영역이 우열의 기준이 되지 않아야 한다.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고 창조해 나가는 인간의 노력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과거 오락실을 다니며 게임에 빠져 있으면 불량청소년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솝우화인 ‘개미와 배짱이’를 읽고서 독후감을 쓰며 배짱이가 되지 말고 개미처럼 부지런해야 한다는 교훈을 강조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대낮에 한강변에서 운동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이를 질책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동의 개념이 과거 육체적으로 부지런히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으면 충분히 생각될 수 있는 생각이다.


노동의 개념도 확장되어 변화하고 있다. 노동도 즐겨야 하는 대상이 되고 생존을 위한 수단의 개념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노동의 범위 역시 확장되고 있다. 배짱이의 또 다른 이야기처럼 문화를 형성하는 모든 것들, 음악, 미술, 문예 등의 전통적 예술뿐만 아니라 대중예술과 게임, 레저에 이르기까지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이를 기획하고 공개된 무대에 올리거나 이를 기반으로 IT 기반의 컨텐츠를 개발하는 모든 행위들이 노동의 범주에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지식에 대한 평등의 시각은 지식의 효용가치를 확대하는 의미가 있다. 전문지식을 특정한 분야에 한정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회의 기득권과 연계되어 생각하는 고정관념에서 출발한다. 과거의 법률지식이나 의학지식처럼 특정한 우수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이제는 하나의 서비스 직종과 다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회의 다양성은 이 보다 더 유용한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전문지식의 다양성은 이에 대한 통합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지 전문가 만능주의에 빠져있다. 모든 언론이 보도사실을 확인하여 주는 수단으로 주로 전문가의 의견을 첨언하여 보도한다. 그러나 사실보도에 충실한 보도태도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비판적 의도를 담은 기사에 전문가의 평가를 함께 담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한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과 어떠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라는 이유로 특정사실에 대한 이해를 위한 설명을 넘어서 사견을 첨언하는 것은 일반인의 다양한 의견을 인터뷰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혼전문 변호사에게 법률적 자문을 구하는 것과 이혼의 급증에 따른 사회적 문제를 이혼전문 변호사에게 해결책을 묻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통찰력을 기르는 것은 결국 겸손한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시킬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지식에 대한 겸손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이를 고집하는 자기아집은 누구나 갖고 있다. 이러한 주관이 부족하다는 것도 삶의 자신감을 잃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남에 대한 배려 없는 지나친 과신은 남을 해하는 이유가 되곤 한다. 지적 능력이 많다는 것이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통찰력은 지혜로운 생각에서 출발한다. 맹자는 오상(五常) 중에서 지(智)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으로 규정했으며 별도의 학습 없이 습득할 수 있는 선험적인 미덕으로 간주했다. 이는 플라톤과 같은 관점이다. 반면에 같은 시대의 순자는 이것을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적인 미덕으로 간주했다. 주자를 비롯한 다수의 후대 학자들은 맹자의 견해를 계승했다. 지혜가 선험적이든 경험적이든 결국은 사유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인간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이다. 인간이 지식을 축적했을 경우 본성적인 나약함으로 인해서 그 지식과 함께 편협한 아집을 갖기 쉽고,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 경우도 있다. 20세기의 이단아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의 경우에는 인간의 지식은 진정한 지혜를 깨닫는 방해물이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지혜로운 인간이 지혜로운 통치를 하는 것도 아니다. 로마 제국은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이후 가장 현명했던 사람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는 플라톤이 제시한 '철인정치'라는 이상에 가장 가까운 통치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인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며 동시에 스토아학파의 마지막 거봉이었다.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로마 철학의 여러 흐름 중에서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일체 배격하고 초기의 윤리학적인 전통을 고수한 학파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그를 능가하는 철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전장에서 남긴 개인적인 사유의 기록들로 그의 ‘명상록’이 있다. 애석하게도 황제로서 그리고 철학자로서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황제로서의 그는 인류애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철학자이기 보다 엄격한 통치자였다. 인본주의적인 정책이 아니라 열정적인 입법 활동과 엄격한 법치를 통해 통치했다. 로마의 적에 대한 입장도 강경했다. 파르티아와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 방식은 전임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철저한 민족 말살 정책을 폈다. 기독교도들에 대한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치세 동안 처형된 기독교도들의 숫자는 기독교 박해를 상징하는 네로 황제 시대의 희생자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지혜로울 수는 없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결국 지혜롭게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 하며 살았느냐에 귀결되는 것이다. 지식의 습득도 이러한 차원의 삶의 노력의 하나가 되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삶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겸손의 미덕이 되어야 하고 남의 위에 서는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도 특정사실에 대한 사실의 이해를 구하는 것 이상은 될 수 없다. 세상의 지식은 무한하여 남의 지식을 조금은 빌릴 수 있으나 모든 판단은 스스로 내리고 행동해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비우는 자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자신이 경험해온 고정관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 모든 아집과 인간이기에 느껴야 하는 순간의 다양한 불편한 감정 등을 객관화하는 작업이 없다면 통합적 사고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남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무시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노력은 있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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