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세상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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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 속에 경쟁을 한다는 것은 필연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경쟁들 속에 이겨야 한다는 강박이 당연한 것이 되어 불문율이 되었다. 심지어 남을 밟고 일어서야만 한다는 지나친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흔하다. 그리고 이것은 다수의 두려움이 되어 사회적으로 자리 하기도 하였다. 대중의 경쟁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 정치권력의 속성이 되기도 하고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여 사회 곳곳은 경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천진한 아이들도 그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학교를 다니고 회사에 취직하는 순간순간이 경쟁이다. 사회모임에서도 경쟁을 하고 마을과 마을이 경쟁을 하고 다른 시・도간에도 경쟁이 당연시 되어 있으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경쟁을 한다.
경쟁은 생존을 위한 태생적 본능에서 출발한다. 새끼를 기르는 대부분의 동물에서 볼 수 있듯 갓 태어난 새끼들은 어미가 제공하는 먹이를 먼저 취하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것이 죽음을 강요받게도 한다. 이러한 냉엄한 생존투쟁은 인간이 이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동물과 다르다는 구별을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이지만 경쟁이 갖는 엄연한 현실의 자각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본성으로 자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쟁이 주어지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관념도 같이 하였다.
나는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그것은 내가 비교적 경쟁의식에서 자유로웠다는 사실에 있다. 타고난 천성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누구와 경쟁하는 것을 싫어했다. 부모님이 나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는 경우도 없었고 내가 누구와 경쟁의식을 갖는 경우도 없었다. 그러한 특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 그러한 이유로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고민을 한 경우도 없다. 나의 인생에서 특정한 상대와 경쟁한다는 의식은 거의 없던 셈이다. 이것은 스스로 매우 감사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경쟁의식이 없다는 것은 삶의 치열함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나를 아끼고 안타까움을 갖는 친한 지인일수록 그렇다. 그러한 내 모습이 간혹 오만해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형제 사이에도 부모의 사랑을 두고 경쟁한다. 우리가 흔히 ‘형제관계’라 칭하며 가장 가까운 사이를 표현하지만 사실 우애 있는 형제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에도 접하면 현실이 된다. 그렇듯 부모의 재산을 두고 싸우는 경우는 다반사가 되어 있다. 나의 두 동생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다. 그것은 나만큼이나 받은 것들이 많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은 살뜰하게 살피셨고 남들보다 앞서야만 한다고 우리 형제들을 채근하시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우리 형제들이 남들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에게 신뢰를 갖고 산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참으로 부족했던 나에게 형으로서 오빠로서 존중을 표해주는 모습에는 더욱 더 그렇다. 사실 나의 부모님도 동생들보다 나를 편애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학교교육은 치열한 경쟁의 현장이다. 불행한 현실이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교육의 현장을 바라보면 명분의 방향성과 현실이 모순을 낳고 탐욕의 덩어리가 교묘하게 얽혀 돌아가는 인간사회의 한계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경쟁이 교육의 유일한 수단이 되고 이를 감추려는 가면을 벗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교육은 ‘미숙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사고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누가 누가 잘하나?’를 통해 성적에 의한 줄 세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상위 10%를 위한 90%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대학을 서열화하는 대학입시로 이어진다. 그러나 학령인구 대비 120%가 대학을 진학하고 있는 현실에서 상위 10%의 대학과 학과를 제외하고는 달리 변별력을 필요로 하지 않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외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발전은 교육이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분명히 그렇다. 세계 최저의 문맹율과 모든 국민이 교육의 혜택을 받고 교육에 대한 열정적 믿음이 있었던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최면상태에 있는 것은 인재양성을 위해 경쟁적 교육환경이 어쩔 수 없었다는 인식과 그로 인해 인재양성에 성공하였다는 결과적 평가이다. 과연 그럴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했던 법조계와 의료계, 그 밖의 비생산적인 기득권 사회의 편입에만 상위 10%가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사회의 발전적 동력을 위한 인재양성이 현재의 교육제도의 결과였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이제 현대사회가 다양화 함에 따라 필요한 인재에 대한 교육혁신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요구가 되고 있다.
교육의 다양성 확보는 보편교육의 실현에 있다. 일반적으로 형식화 된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청소년 교육이 스스로 진로와 삶을 선택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0.1%의 가능성만으로도 예체능을 어린 시절부터 교육시키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고 보면 교육에 대한 경쟁의 함정은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부모의 선택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경쟁의 틀에 자신의 자식을 가둬놓는 것이 죄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다양성의 사회다. 학교교육은 보편교육을 지향하여야 하고 다양한 선택의 권리는 아이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 보편교육의 핵심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를 알게 하고 이해하도록 해야 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다원화하는 사회에서 학교가 모든 것을 가르치려 하는 과욕도 버려야 하고 가능한 일도 아니다. 예체능의 전문적 교육이 학교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음에도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인재를 배출하며 이제는 문화강국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또한 이에 상응하는 글로벌 스포츠 스타가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많은 시사점이 있다.
어린 내가 경쟁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인식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더 잘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다. 나는 친구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면 어느 순간도 누구에게 져본 적이 없었다. 하루는 한 친구가 나에게 도전을 하였다. 쉬는 시간 몇몇 친구들 앞에서 시합을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날은 그 친구에게 간발에 차이로 졌다. 억울한 마음에 다시 하자고 제안하여 다시 하였지만 또 지고 말았다. 그 후 그 친구에게 달리기를 다시 진 적은 없었지만 당시의 친구의 말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오늘은 네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내가 이겼다.” 그 친구는 그 순간 다른 친구들 앞에서 나의 패배감을 진심으로 위로하여 주었다. 남보다 앞서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는 몰랐다. 다른 사람의 뒤를 보고 달린다는 것에 다리가 무뎌지는 무거움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순간 머리가 비어버리는 무력감이 무엇이었는지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앞만을 바라보며 바람을 가른다는 만족의 쾌감에 취할 수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고 꽤나 충격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는 고등학교까지 육상선수를 하였지만 전문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에서 성장이 멈추어 더 이상 기록이 좋아지지도 않았고 전문적인 훈련시스템도 접하지 못했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중학교 3학년 무렵 100M 기록이 11초F이었고 이후 고등학교 가서는 오히려 후퇴하였다. 사실 전문적인 육상선수가 아니면 타 종목의 국가대표 선수도 11초대에 진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00M 11초F의 수준은 손흥민 선수의 순간속도가 시속 35km라는 사실에 비견된다. 스포츠는 사람의 운동능력이 훈련방식과 정도에 따라 발전의 정도를 극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경쟁심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나는 간혹 축구선수로 학교를 대표하여 시합에 나가기도 하였지만 이를 통해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의지는 애초에 없었다.
모든 분야에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다. 냉정한 현실은 이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그들끼리도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공평한 것은 천재의 일반적 특성이 관심분야에 고도의 집중력이 가능한 만큼 그 외에는 문외한이 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통합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식의 문제는 또 다른 세계다. 경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는 문제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능력이고 세상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에서 비롯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력의 과정이기도 하고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주어지는 현실에 만족하며 경쟁의식 없이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 이는 다른 이를 평가 하는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치열함이 없는 삶이 무기력한 삶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경쟁에서 낙오된 인생이라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자신의 자식을 가르치는 방식이 되어 다시 반복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자식이 패배할 확률이 더 큼에도 남들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희망에 모든 부모가 매달리는 교육 현실이 이를 고착화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 교육의 결과를 만들어 온 모든 것에 변화를 가져가야 한다. 경쟁을 통한 교육만큼 비교육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쟁이 주어지는 것은 삶의 현실이다. 그러한 이유로 선의의 경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가 공정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경쟁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것은 공정한 사회의 기본이다. 그러나 개인에 있어 이러한 경쟁을 이겨나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하나의 큰 숙제가 된다. 공정한 경쟁은 무엇일까? 그것은 함께하는 것이다. 경쟁이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경쟁에서 이기고 그 성취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취를 나눌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함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삶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