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쾌락의 본질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문화예술, 쾌락의 본질


즐거움과 삶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이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필연이다. 살아있는 육체는 순간마다 모든 종류의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모든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인 것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예술이다. 이러한 이유로 말초적인 감각적 쾌락과 유희를 구분하는 이유가 된다.


인간은 개인의 삶과 상호작용에 대한 모든 것을 문화로 규정했다. 그리고 문화예술은 인간의 삶을 종합하여 표현하는 예술적 문화로 한정되어 설명되어질 수도 있다. 인간의 문화가 예술을 통해 투영되는 것이다. 예술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단어이고 기술 또는 학습되어진 특별한 능력을 의미한 것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예술이라는 말은 어떤 기술을 익힌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 G. W.)은 그의 저서에서 예술은 관념적이고, 그것은 표현 양식의 감각적 형태라고 말한다. 예술이란 이 두 측면을 자유스럽게 해석하는 총체적 개념이며 예술 작품의 탁월성은 바로 이러한 관념과 형태, 형상이 멋지게 어울려 나타나는 긴밀함과 결합의 정도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헤겔에 있어 예술은 정신적 관념을 알아보기 위한 하나의 통로였다.


영국의 작가, 시인, 미술사가, 평론가, 예술 철학자인 리드(Read)는 예술은 즐거운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고, 미와 예술은 별개의 것으로 구별했으며 아름다움이란 감각과 지각에 있어서 형식 관계의 통일이나 조화의 인식이라는 형식주의 정의를 하고 있다.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척도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예술은 즐거움을 표현하는 방식이고 그를 통해 즐거움을 나누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달성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같은 쾌락주의의 전형은 고대 그리스의 키레네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나타났다. 키레네학파의 창시자인 아리스티포스는 덕이 있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원리를 강조했다. 키레네학파는 미래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현재의 감각적·육체적 쾌락을 강조했다. 이후 염세주의에 빠진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는 처음의 목표와는 정반대로 외적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최고선으로 설정하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학파는 순간적·감각적·육체적 쾌락보다는 영원한 정신적 쾌락을 강조했다. 에피쿠로스는 마음의 안식과 쾌락을 결합함으로써 고통을 피하고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평정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이상적 쾌락주의를 주장하였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달성된다는 쾌락주의의 전형을 만든 것이다. 이후 현대에 와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는 고통을 극소화하고 쾌락 또는 행복을 극대화하는 행위라고 주장한 공리주의는 쾌락주의가 윤리학의 형태로 나타난 경우다.


그러나 행복과 쾌락의 상호연관성에 대하여 전제가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행복이 인간이 절대 선이고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목표라는 인식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쾌락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초적 인식을 정신적이며 궁극적인 행복으로까지 관념화 한 결과이다. 인간이 욕망의 충족으로 만족하게 되는 순간의 행복감이 보다 바람직한 그 무엇으로 대변될 수 있는 절대 선을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행복이 절대가치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이러한 절대 선과 정신적 행복의 궁극적인 목표가 혼용되어 인식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쾌락과 유희에 대한 커다란 오류를 낳게 하였다. 그러한 오류의 대표적인 것이 자유의 방종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것과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이란 것조차도 인간의 쾌락적 욕망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행복감이란 감정의 파편들이 모아져 만들어진다. 이것은 마치 강력한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순간의 감정을 붙잡으려는 경향으로 또 다른 욕망의 모습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인간의 행복이 단지 감정에 국한시킨다면 마약으로 인한 환각의 상태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젊은 날 사랑의 고뇌는 이러한 이유에서 시작되었고 훗날 이러한 행복감이 감정의 파편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어도 행복에 대한 소망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궁극의 행복을 찾아 고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동양의 도교에서 유희(遊戱)와 관련되어 다루어지는 책은 ‘장자’이다. ‘장자’의 ‘유희’의 개념 즉, ‘노닐다’는 말은 놀이의 요소를 포함하지만 그와는 다른 삶의 차원과 더 가까운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유희의 개념은 정신적 요소와 관련된다. 초월적이거나 종교적인 차원의 것과 관련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실리적인 어울림에 관련되어 이로부터 기인한 정신적 초월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정신적 과정으로서 마치 여행처럼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처럼 결국에는 일상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삶 자체가 유희 그 자체가 된다는 생각이다. 유희는 현실이나 세속을 떠나려는 태도도 아니고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거나 변화시키려는 변혁적 실천도 아니다. 그것은 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겪는 갈등과 억압의 승화를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유희가 놀이로서 예술적 영감이나 창조적 활력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희는 감각적 쾌락의 승화를 말한다. 그것이 신이든 궁극의 진리든 절대 선의 존재를 가정한다면 유희는 이에 다가서는 방법이자 그 자체인 것이 된다. 직관적 철학의 정수는 통합과 다양성에 있다. 본질은 하나이지만 이를 나타내는 형상은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쾌락주의가 추구하는 궁극의 행복도 절대가치로 인식될 수 있으며 유희라는 가치개념 또한 마찬가지다. 우주라는 공간적 개념이 가치기준이 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출발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무와 유는 동시한다는 사실 속에 인간의 살아있음을 만끽하고 그 가치를 직관으로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것이 즐거움인 것이다.


자연이 요구하는 본능의 소리를 듣고 이를 과감하게 실천하라고 말하는 선각자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연이 요구하는 본능의 소리가 무엇인가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본능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고 이를 ‘자신의 본능을 믿고 과감하게 실천하라’는 문자 그대로만을 받아들인다면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죄악으로 가득 찬 혼돈의 세상을 만들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예술의 가치는 지금까지 말한 유희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문화예술 활동이 그 자체로 예술적 가치를 당연히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욕망의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 인간의 예술적 접근은 직관적 경험을 통해 통찰력을 갖게 하는 통로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나아가는 말초적 감각에서 유희의 세계를 알고 그러한 즐거움의 본질적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섹스와 같은 극단적인 쾌락에서 뿐만 아니라 슬픔, 분노, 고통 등의 감정의 승화를 통해 이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활동의 종류와 품위가 그 가치의 정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유희는 인간의 사유나 직관적 경험의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절대 선의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예술은 수단이 되는 것이고 유희는 궁극의 목표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궁극의 행복이라는 것도, 인본적이며 실용적인 시각에서 삶의 갈등과 억압의 승화를 이루는 도교의 해방도 궁극의 절대 선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해야만하기 때문에 직관적 경험을 통한 사유를 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본능은 끝임 없이 쾌락적 충족을 요구받기 때문에 유희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만물의 하나이고 이를 통한 상호작용의 질서에 순응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이 이를 끊어내려 할 수도 없지만 설사 발버둥 친다 하여도 이러한 우주만물에 이어진 순환의 고리는 결코 인간의 자각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절제와 겸손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환의 질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결과가 인간의 존재의지에 반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인간이 일정한 수준의 통찰력에 이른다는 것에는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세 인본주의의 철학적 정립은 신학중심주의에 대한 대립적 개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는 쾌락적인 본능을 따라가는 방종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에 부합하려는 인간의 능동적인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문화예술과 유희에 대한 고찰은 인간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본능에 대한 그 당위성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본능적인 행동 자체가 다른 외부적인 편견에 의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문화적 또는 개인적 성향의 차이가 만드는 다양성을 먼저 이해하려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 즐거움 속에서 유희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을 먼저 접하고 그를 통해 즐거움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가치가 동시에 수반되어야만 한다. 새로운 생명에 이유 없이 미소를 보내는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도 예술은 승화되어 발현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조금은 거리를 두어 즐거울 수 있는 삶에 미소를 머금고 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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