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감사

by Benih

집 앞에 고향이 남아프리카인 거베라 (Gerbera)가 초록빛 옷을 입고 빨간 얼굴을 내밀고 보란 듯이 자신의 미모를 자랑한다. 고향을 떠나 인도네시아에 살면서도 이곳이 자신의 고향인 듯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며 고개를 들고 서 있다.

그런데 난 16년째 인도네시아에 살면서도 여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Gebera

이제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함께 은퇴를 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

20년을 함께 살아왔고 한국에서 함께 인도네시아로 건너온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 중 한 녀석이 얼마 전 수명을 다하고 다른 사람의 차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며 한쪽 가슴이 먹먹해졌다

바로 냉장고와 세탁기 중 세탁기가 수명을 다하고 영원한 안식을 하게 된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아내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세탁기를 사용할 때마다 기도를 한다.

"하나님!
우리가 은퇴할 때 냉장고와 세탁기도 함께 은퇴할 수 있도록 고장 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지만 세탁기의 운명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한동안 세탁기 없이 불편한 생활을 하던 중 저희와 친분이 있는 고마운 분이 작은 중고 세탁기를 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크기가 워낙 적어 이불 빨래는 물른 조금 큰 용량의 세탁물은 거부를 한다.


괘씸한 마음에 인터넷을 통해 세탁기를 알아보던 중 40% 할인하는 삼성 세탁기를 만났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세탁기를 신청하고 기다린다.

그런데 주문은 공손하고 예의 있게 받았는데 배송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를 하는 건 뭐지?

일주일을 신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만날 날을 소망했지만 티끌만 한 징조마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던 중 일 때문에 집을 비우고 부부가 함께 자카르타(Jakarta)로 가야만 했다.

아침부터 마음이 불안하였다.

우리가 집을 비울 때 기다리던 세탁기가 올 것만 같은 예감 아닌 확신이 점점 드는 것이 아닌가?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자카르타(Jakarta)에서의 일을 마치고 저녁 7시쯤 집에 돌아오니 문 앞에 예쁘게 포장된 세탁기가 새색시 마냥 앉아 웃고 있다.


이런!!!!

"이팔청춘" 도 아닌데 이 세탁기를 어떻게 옮기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내 나이가 되면 운동 신경이 둔하여 누가 부르면 돌아보는 속도가 청년들보다 ㅇ. 5초는 느리다.

그뿐인가?

지긋지긋한 관절염은 일어날 때마다 "아이고!" 하며 곡소리를 내게 하고

허리는 두 손으로 짚으며 "끙" 소리를 내게 만드는 특이한 능력이 생긴다.

할 수없이 동네 청년 한 명을 불러 두 사람이 세탁기를 운반하기 시작한다.

satu! dua! tiga !(하나 둘 셋 !) 을 힘 있게 외치며 세탁기를 들어 보지만 다시 바닥에 세탁기를 내려놓게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슬프지만 상황은 이렇다

동네 청년이 세탁기를 땅에서 20cm를 들어 올리는 동안 나는 겨우 땅바닥에서 5cm 도 못 들어 올린 것이다. 그러자 세탁기의 무게가 내가 있는 쪽으로 쏠리면서 세탁기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는 연약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때 갑자기 뒤쪽에서 암울한 기운이 밀려온다.

젊었을 때였다면 하는 아내의 눈총이 날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아내의 눈빛은 촉촉하지만 불쌍함이 느껴지는 그런 눈빛이다.

악전고투 끝에 세탁기를 밀어 넣고 보니 온몸은 땀에 절고 숨도 가빠지자 찬물로 열기를 식힌다.

세탁기와의 전쟁을 끝내고 샤워를 한 후 커피 한잔을 내려 책상 앞에 앉아 편안함을 느껴본다.

작은 텃밭에서...

이제는 세탁기조차 감당 못하는 나를 향한 아내의 걱정과 염려와는 달리 나는 감사할 뿐이다.

분명 육신은 쇠하고 신체적 기능은 떨어지지만 생각의 깊이는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생각이 곧 감사다." 란 말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생각(think)과 감사(thank)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깊은 생각이 감사를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세탁기를 살 수 있어서 감사하고, 선뜻 도와준 동네 청년이 감사하고, 염려해 주는 아내가 감사하고, 세탁기를 옮긴 후 따뜻한 커피 한잔에 편안함을 누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


우리 안에 불평과 불만이 많아서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아갈 때가 있다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작아지고 멀어질 때에 삶의 한축이 무너진다.


반면에

나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함께 하는 아내를 바라보면 그녀가 나와 함께 함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 넉넉함으로 돌아볼 때 내 안에서 깊은 울림이 생긴다.

이때 우리는 이것에 대해 "감사"라고 부른다.


오늘

나는 세탁기를 청년처럼 들 수는 없었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그 누구보다 좋은 사람과 함께 했기에

난 누구보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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