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모임
야트막한 산 언저리를 산책하다가 수세미를 만났다. 어느 밭의 경계로 쳐 놓은 철망에 매달려 있었다. 어릴 적에 보고 아주 오랫만이었다.
다시 마주친 수세미꽃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했다. 내 팔뚝만 한 크기로 매달린 수세미는 내 탄성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어릴 적, 나는 수세미꽃, 호박꽃, 오이꽃, 참외꽃, 배추꽃, 붓꽃을 좋아했다.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꽃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거기다가 그 당시 나는 노란색을 좋아했는데 이 꽃들이 모두 노란 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앞뒤가 뒤바뀐 것 같다. 노란 꽃이 예뻐서 노란색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수세미는 박과다. 한해살이 덩굴식물이다.
수세미 꽃은 7~9월경부터 피기 시작한다. 암수가 한 그루에서 피어나지만 암꽃과 수꽃은 한 몸이 아니고 다른 꽃으로 핀다. 잎은 손바닥 모양이며 덩굴을 감고 올라간다.
열매는 9~10월경에 맺힌다. 처음 열매가 열리고 7~8일 이내의 수세미는 음식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해열과 거담에 좋다고 약재로 사용하기도 하고, 줄기에서 나는 수액을 화장수로 이용하기도 한단다.
그럼 이 수세미 열매를 그릇 닦는 수세미로 만들 수 있는 때는 언제 일까?
처음엔 딴딴하고 무겁던 열매가 시간이 지나면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진다. 바로 이때가 기다리던 때다.
잘 익은 수세미 열매를 솥에 넣고 펄펄 끓인다. 껍질을 벗긴 후 바짝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말은 아주 간단하지만, 수세미 하나를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수세미를 만든는 것 만큼 수세미를 그리는 것도 정말 쉽지 않았다. 마른 잎을 표현하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더 큰 난관은 말라서 서로 얽혀 있는 덩굴 줄기와 잎사귀들이었다. 어느 만큼 표현해야 하는지도 가늠이 안 됐다. 생각해 낸 방법이 줄기를 배경색처럼 그려 넣는 거였다.
그런데 어쩌나, 잎과 수세미, 꽃이 동동 떠 있었다.
이럴 땐 옆에 있는 분들의 그림을 슬쩍 훔쳐보면 된다.
별꽃님이 그린 덩굴처럼 나도 따라 그렸다. 그랬더니, 겨우 담장에 걸친 수세미가 됐다.
모임은 이래서 좋다.
'열매가 익어가면 잎은 시들어 간다.'
미루나무님이 그림을 다 그리고 쓴 글귀다.
마음에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