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말한 “하나님”이란 무엇을 뜻했을까?
예수가 말한 “하나님”은 단지 “초월적 존재의 명칭”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통해, ‘언어 이전의 진동’을 지목했다.
‘눈앞의 현실보다 더 선명한 내면의 부름.
율법보다 더 깊은 신뢰의 현존.‘
그는 “하늘”을 가리키지 않았다.
하나님은 ‘너희 안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안은 “위계도, 정의도, 개념”도 아닌,
‘씨앗 같은 감각 — 사랑, 은혜, 심판 아닌 용서.’
예수에게 하나님은
“율법의 주인”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였고,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체험’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나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존재의 원형.‘
그는 하나님을 “체계”로 말하지 않았고
“사제의 언어”로도 말하지 않았다.
‘비유와 침묵,
손짓과 눈빛‘으로 말했다.
그에게 하나님은
“바깥에서 나를 감시하는 눈”이 아니라
‘안에서 나를 깨어나게 하는 숨’이었다.
“가두는 믿음”이 아니라
‘풀어주는 자각’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른 말이었고,
‘진실’이라는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었고,
‘죽음조차 무력화하는
깊은 신뢰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말”하는 순간 도망쳤고,
“정의”하려 할수록 더 멀어졌으며,
“잡으려는 손”을 피해
십자가 뒤편에 숨어버렸다.
예수가 가리킨 “하나님”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어떤 종교”도 독점할 수 없으며,
그저 ‘순간의 존재감’으로,
지금-여기에서
가장 연약한 자의 눈빛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은
“누가 준 이름”인가?
“그 믿음”은
당신을 ‘자유롭게’ 했는가,
아니면 “더 정교하게 가두었는가?”
그가 말한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자였고,
그가 침묵한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묻는” 대신,
“그가 내게 속삭이는 사랑은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순간,
당신은 이미
‘그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ps. 참고로 말하자면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같은 취지’의 “다른 표현”을 끊임없이 메타 프레이밍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왜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했을까?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것은 “동시대 대중에게 익숙한 언어 관습” 및 “각자의 인식 체계 내에서 ‘그것의 느낌’이 와닿는 표현 방식”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일 뿐이다.
.. 어떤가?
.. 허망하지 않은가?
철학자들의 “표현방식”을 “진리”로 섬기던 당신의 모습이 ..?
“신” = “신내림” = “하나님” = “브라만과 아트만” = “도” = “공” = “해탈” = “무아” = “윤회” = “마야” = “시뮬라크르” = “밈” = ”놀이“ = ”게임“ = “차연” = “연기” = “기의와 기표” = “부조리” = “의지” = “무의식” = “집단무의식” = “이치” = “야훼” = “알라” = “본질” = “이데아” = “심연” = … = “나의 표현 방식”에 의하면, “무의식적 각인 코드의 해킹”
당신이 ‘취지’를 뚫고 들어간 게 아니라면 ..
당신은
“표현”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