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은 실재하는가, 아니면 ‘기대한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인가
배신은
타인의 문제가 아니다.
배신은
나의 믿음이 붕괴될 때 생긴 감정적 이름이다.
그 믿음은 무엇이었나?
“너는 나와 같을 것이다.”
“너는 내가 준 만큼 돌려줄 것이다.”
“너는 적어도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말하지 않고 쌓은 무의식적 전제’의 집합이다.
그래서 배신은
타인의 행위가 아니다.
내가 나조차 몰랐던 믿음이
깨졌을 때 느끼는 충격이다.
그 믿음은 과연 정당했는가?
혹은
나의 열등감이 낳은 소유욕이었는가?
“나보다 더 높은 선택을 하지 마.”
“나보다 더 멀리 가지 마.”
“네가 나를 거절하면, 나는 무가치해져.”
혹은,
그 믿음은
타인의 위장이 만든 환상이었는가?
그는 애초에
너의 믿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다만
너의 믿음이 투사되었을 뿐.
그러니,
배신이란 단어는
내 감정의 실망을
타인의 죄로 치환하는 기술일 수 있다.
배신은 실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제’는
항상, 내 안의 믿음과 상처로 구성된 프레임 위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되묻는다.
“정말 그가 나를 배신했는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속인 것은 아닌가?”
“나는 어떤 보상을 기대하며 그를 신뢰했는가?”
“나는 언제부터 그를 나의 ‘확신의 부속물’로 간주했는가?”
배신은
누군가의 행위가 아니다.
배신은,
자신이 몰랐던 기대의 ‘발각’이다.
그리고
그 발각된 나 자신을
외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배신”(신뢰의 배반)이라 부른다.
그러니 진짜 배신은
‘타인의 거짓’이 아니라,
‘나의 믿음의 허상’이 드러날 때 일어난다.
그 순간,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1. 타인을 원망하며 관계를 파괴하든지,
2. 나를 해체하며 의식을 재구성하든지.
배신은 타인의 사건이 아니다.
배신은 내 믿음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을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진짜 자유에 다가갈 수 있다.